고난의 행군

1990년대 북한의 최악의 식량난

고난의 행군(苦難의 行軍, 영어: Arduous March, March of Suffering, North Korean Famine in the 1990s)은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일어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악의 식량난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난의 행군
날짜1996년 ~ 1999년
위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인
결과
사망자약 33만 명 ~ 약 60만 명

소비에트 연방을 포함한 동유럽 공산국가가 붕괴하며 경제적으로 고립된 후, 미국에 의한 경제 봉쇄로 인해 농업 기계를 가동할 석유 및 식량의 수입이 제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농업 생산력이 점차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5년 대홍수로 인해 농지의 대규모 파괴가 겹쳐지면서 기아가 발생하였다. 결국 배급제와 광범위한 복지 체계의 붕괴로 사회주의 질서에 혼란이 생겨났고 다소 이루어지던 경제발전이 심각한 저해를 입었으며, 사회 전반의 군사화(militarization)의 가속에도 영향을 끼쳤다.

본래 해당 명칭은 심각한 경제위기가 오자 정부에서 김일성의 항일 활동에 빗대어 위기를 극복하자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채택한 구호로, 이후 해당 시기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유래는 1938년 말 ~ 1939년 초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일화에서 왔다.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자의 수는 명확하지 않으나, 2010년 11월 22일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바탕으로 발표한 북한 인구 추계에 따르면, 1996~2000년 간 아사자 수는 33만여 명으로 추산된다.[1] 미국 통계청에서는 1995년에서 2000년까지 경제난에 의해 직간접적 영향으로 사망한 인구를 50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2]

배경 편집

1989년에 동구권 공산당 일당 독재가 붕괴하였고 199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였다. 동구권의 붕괴로 고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였으나, 이는 역부족이었으며, 중국이 경제 교류 방식에서 그간 유지하였던 물물 교환의 방식을 폐기하고 경화 결제 방식을 요구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1993년 흉작,[3] 1990년대 중반에는 수해로 인한 최악의 대흉작으로 배급제가 붕괴되며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모자라는 식량을 함께 나눠먹으며 일본군에 맞서 투쟁한 항일빨찌산의 눈물겨운 고난과 불굴의 정신력'을 상기하자며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자"고 호소했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익측(翼側)도 후방도 없이 걸어온 간고한 행군길'에 관한 항일빨치산 1세대들의 증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서정시 《끝나지 않는 행군길》, 가요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아버지 어머니의 청춘시절》 등과 영화들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1989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 쌀, 옥수수 생산량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쌀 (정미 100만 톤) 3.24 3.36 3.07 3.34 3.56 2.18 1.40 0.98 1.10
옥수수 (100만 톤) 4.34 3.90 4.20 3.72 3.94 3.55 1.37 0.83 1.01

[4]

이로 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1998년에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우리 인민의 투쟁으로 여러 해째 계속된 어려운 행군이 마침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선언했다.

실제에 근접한 사망자 수 편집

2000년대 초중반까지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일부 미국 언론으로부터 고난의 행군 동안 사망자가 3백만 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평양 특파원을 지낸 하기와라 료(萩原遼)의 저서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金正日 隠された戦争)"에서 처음 나온 것이며, 실증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5]

2010년 11월 22일 대한민국 통계청이 발표한 북한 인구 추계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1996~2000년)' 시기에는 33만여 명이 사망했다. 북한이 199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1994~2005년)간 식량난으로 61만 명의 인구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됐다.[1] 기초자료는 유엔의 지원 아래 인구센서스를 실시한 1993년과 2008년의 통계. 통계청은 93년 통계를 나이와 사망률, 탈북인구, 연령별 출산율을 고려한 뒤 2008년 통계와 비교·분석했다. 통계청 관계자는 “인구센서스를 바탕으로 추계한 만큼 이번에 발표한 숫자가 실제와 가장 근접할 것”이라고 말했다.[1]

각주 편집

  1. 북한 ‘고난의 행군’ 5년 동안 주민 33만 명 굶어 죽어 중앙일보 2010.11.23 종합 6면
  2. Daniel Goodkind; Loraine West; Peter Johnson (2011년 3월 28일). “A Reassessment of Mortality in North Korea, 1993–2008”. U.S. Census Bureau, Population Division: 3. 2019년 9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1월 8일에 확인함. 
  3. 『現代北朝鮮経済研究へのアプローチ』王勝今, 藤田暁男, 龍世祥著 104p 「1993년 곡물생산실적은 춘경기의 저온기상과 8월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 피해로 전년보다 12% 감소한 481만 3000톤(정곡기준)으로 멈추었다.」
  4. 『UNDP[1998]』
  5. 북한의 대 기근은 김정일의 인위적 조작 자유아시아 방송 2004-12-05
    萩原 遼, 『金正日 隠された戦争―金日成の死と大量餓死の謎を解く』 文藝春秋 2004年11月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 김일성의 죽음과 대량 아사의 수수께끼를 푼다』 하기와라 료 지음 | 양창식 옮김 | 자유미디어 | 2011년 12월 10일 출간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