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화(己和, 1376년 ~ 1431년)는 조선 전기의 승려이다.[1] 속성(劉)씨이며, 본관충주이다. 함허(涵虛), 득통(得通), 무준(無準)이다.[1]

생애 편집

21관악산 의상암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이듬해 회암사자초대사로부터 법요를 닦은 뒤 전국명산을 주유하고 돌아와 수도에 전념하였다.[1]

이때부터 공덕산대승사, 천마산관음굴, 불회사 등지에서 강설하고자 모산 연봉사 등에서 3년간 수도하였다.[1]

세종 2년(1420) 45세 때 오대산에 들어가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월정사에 있을 때 왕명에 의해서 대자어찰에 머물다가 4년 이후 이를 사퇴하고 길상산, 공덕산 등 여러 산을 편력하였다.[1]

가평 운악사, 현등사에 머문 때는 세종 9년(1427)이었는데, 그는 현등사에서 3년간을 머물다가 세종 13년(1431)에 회양산에 이르러 봉암사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58세로 열반하였다.[1]

사상 편집

기화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오도송(悟道頌)에서 "그 자리에 가 눈을 드니 10방(十方)에 푸른 하늘이요, 무(無)속에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로다(臨行擧目 十方碧落 無中有路 西方極樂)"라고 하였고, 또 "감연공적(湛然空寂)하니 본래는 1물(一物)도 없고, 신령한 빛이 빛나니 10방을 환히 통한다. 다시 몸과 마음이 있어 저 생사(生死)를 받을리 없으니, 거래왕복함에 마음에 거리낌이 없도다(湛然空寂 本無一物 靈光赫之 洞撤十方 更無身心 受彼生死 去來往復 心無墨)"라고 읊어 자기의 선풍(禪風)을 드러낸 시문을 여러 편 남겼다.[1]

한편 조선왕조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이론적으로 비판한 《현정론(顯正論)》속에, "불교인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情)을 버리고 (性)을 빛나게 할 뿐이니, (情)이 (性)에서 나옴은 마치 구름이 장공(長空)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고 을 버리고 을 빛냄은 마치 구름이 걷혀 청명한 하늘이 나타남과 같다" 라고 말하여 불교는 청풍(淸風)과 같아 감정의 구름을 깨끗이 제거하고 맑은 심성의 하늘을 나타내게 한다고 하였다.[1] 또한 억불책을 개탄하되 "불교는 비유컨대 청풍이 뜬 구름을 쓸어 버리는 것과 같다. 또렷하게 보기를 소망하면서도 청풍을 싫어함은 이상한 일이다"고 하였다.[1]

나아가서 그는 불교윤리유교윤리를 조화시키려 하여 유가(儒家)에서는 5상(五常)을 가지고 도추(道樞: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상대적인 대립을 넘어선 절대적인 도의 경지)로 삼지만, 불가(佛家)의 5계(五戒)가 바로 그 5상(五常)이라고 말하고, 유가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불교에 의해서 수도해야만 된다고 강조하였다.[1]

유가에서 불교윤회전생설을 비난하는데 대하여 천당지옥이 설사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천당을 흠모하여 (善)을 행하고 지옥을 싫어하여 을 멈추면 천당지옥설은 민중을 교화하는데 큰 이익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1]

그는 결론적으로  ·  · 3교는 근본은 같은 것이니 서로 배척 대립하기보다는 상호보충 종합됨으로써 화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 ·  · 3가의 말한 바는 은연중에 서로 맞춰져 하나가 되는 관계에 있으니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1]

저서 편집

저서에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현정론(顯正論)》·원각경소(圓覺經疏)》·금강경오가 설의(說誼)》·함허당어록(涵虛堂語錄)》,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1]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設宜) 등이 있다.

관련 문화재 편집

각주 편집

참고 문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