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로드 작전

연합국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마친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넘어옴)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은 노르망디 전투에 대한 암호명으로, 연합국제2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에서 성공적으로 마친 작전이다. 1944년 6월 6일 암호명이 해왕성 또는 디데이로 부여된 노르망디 상륙이 개시되면서 작전이 시작되었다. 1,200대의 비행기가 공수부대를 상륙작전 이전에 노르망디 지역에 침투시켰다. 상륙 작전은 5,000대의 함선과 160,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던 지상 최대의 상륙 작전이었고 8월 말 프랑스에 주둔한 연합군은 200만 명 이상이었다.

오버로드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서부전선의 일부
날짜1944년 6월 6일 ~ 1944년 8월 24일
장소
결과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지휘관

1944년 해협 도하 침공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결정은 1943년 5월 워싱턴 회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 장군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연합국 원정군 최고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버나드 몽고메리가 침공의 모든 지상군을 담당하는 제21군집단의 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노르망디의 해안가 5곳이 침공 장소로 선정되었다. 미국군이 담당한 해안은 유타, 오마하로 명명되었고, 영국군이 담당한 해안은 소드, 골드, 캐나다군의 담당 구역은 주노로 임명되었다. 노르망디 해안가의 상황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특수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멀베리 항구호버트의 장난감이라 불리는 것이 바로 이 기술들이다. 연합군은 침공 몇 달 전 여러 기만 작전을 수행했으며 보디가드 작전이라 불린 이 기만전은 전자기술과 시각적 오류를 사용하여 독일군이 연합군 상륙 날짜와 상륙 지점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돌프 히틀러대서양 방벽을 따라 치몽이 예상되는 지역에 요새를 구축했다.

연합군은 작전 초기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지만 6월 26일 셸부르 항구를 점령하고, 7월 21일 을 탈환하면서 점진적으로 거점을 확장해나갔다. 8월 8일 뤼티히 작전에서 독일군의 반격이 실패로 끝나자 50,000명의 제7군팔레즈 포위전에 갇혔다. 연합군은 용기병 작전이라 불리는 남프랑스 상륙 작전을 8월 15일 개시했고, 독일군은 8월 15일 프랑스 전역에서 후퇴를 시작했다. 8월 25일 파리 해방 이후 8월 30일 독일군은 센강 동쪽으로 후퇴했고, 오버로드 작전은 이로써 성공적으로 종결되었다.

배경 편집

1940년 6월 독일군 지휘자인 아돌프 히틀러프랑스 공방전을 일컬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강조했다.[7] 영국군 승조원들은 1940년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북부 프랑스 해안을 따라 갇힌 338,000명의 연합군 병력을 다이너모 작전 때 영국으로 이동시켰다. 이 중 대다수는 영국 원정군 소속이었다.[8] 영국의 계획 입안가들은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에게 10월 4일 다른 영국 연방 국가들과 미국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유럽 대륙에 거점을 되찾는 것은 근래에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9] 추축국이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면서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서부 유럽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처칠은 미국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그러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적절한 병력이 없음을 알고 이를 정중히 거절했으며,[10]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솜 전투파스샹달 전투와 같은 희생이 많은 전방 공격을 피하는 것을 희망했다.[11] 라운드업 작전슬레지해머 작전이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수행되었으나 영국군은 이 작전들을 실용적이거나 성공적일 것이라 판단하지 않았다.[12] 대신에 연합국은 1942년 11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는 횃불 작전을 개시하여 지중해에서의 활동을 증가시켰다.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같은 해 9월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도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졌다.[13] 이러한 전역들을 통해 연합군은 상륙작전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쌓게 되었다.[14]

노르망디 전역 편집

노르망디 상륙 편집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 예정되어 있었던 디데이 상륙 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시작함으로써 오버로드 작전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군이 유타 해변과 소드 해변 내륙 쪽에 상륙하였는데 두 지역 모두 치열한 작전 끝에 배후 내륙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합군 해군도 독일 해군의 출몰의 막기 위해 브르타뉴 반도의 해안가에 기뢰를 매설하였고, 유보트 기지를 습격하였다. 한편, 연합군의 상륙을 쉽게 하기 위해 공군은 윈도우나 폭발 인형과 같은 가짜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였다. 연합군 정보국도 얼트라를 이용해 독일군에게 가짜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에게 독일군의 교통, 통신 등을 마비시키라는 작전을 전달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상륙을 시작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지역은 오마하 해변과 포앵트뒤오크였다. 유타 해변과 골드 해변, 소드 해변에서는 연합군이 큰 피해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특히 영국군은 공수 부대가 성공적으로 캉 운하를 장악함으로써 해변 상륙이 쉽게 이루어졌다. 생메르에글리즈는 미군 공수 부대의 전투 끝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해방된 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본디 바이외, 등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반격 및 연합군의 진격 속도 저하로 이들을 탈환하지는 못했다.

독일군은 오후 3시경부터 전열을 정비해 캉과 바이외 근처에 기갑사단과 히틀러 유겐트를 파견했지만 연합군을 막기에는 때가 늦었다. 영국군은 독일군 기갑 사단의 마이어 중령의 군단을 격퇴하였으며 유타 해변의 미군은 공수 부대와 만나는데 성공했다. 결국 노르망디 상륙은 연합군이 프랑스에 교두보를 확충하는 계기가 되었다.

캉 탈환 편집

연합군은 생로를 탈환하는데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셸부르로의 진격 편집

포위 돌파 편집

코탕탱 반도 편집

팔레즈 포위전 편집

센 강으로의 질주 편집

파리 해방 편집

 
자유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 중 하나인 르클라크 장군.

연합군과의 갈등 편집

연합군의 전략은 라인강 쪽으로 후퇴하는 독일군의 전력을 파괴시키는데 있었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파리를 주요한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미군영국군소련군의 공산화 우려로 최대한 빨리 베를린을 함락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파리 침공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파리 전투가 소모전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아서 독일군에게 도시의 완전한 파괴를 지시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파리가 폐허가 될 경우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너무나 큰 가치의 손실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포위전이 발발하면 파리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많은식량이 요구될 것이라 추정되었다. 현저한 양의 건물과 인구, 그리고 기술공들 역시 파리 해방 이후에 요구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부활한 프랑스군의 샤를 드 골 장군은 프랑스 제 2부대에게 파리로 진격하라고 명령할 것을 강요했다. 파리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는 경쟁에 대한 상이었고 파리는 프랑스의 중심지이고 레지스탕스 군은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추방하고 신념 견해가 다른 이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드 골 장군은 그의 임시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프랑스 외부에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했으나 프랑스 내부에서는 드 골의 지도력에 대항하여 좌파가 형성되고 있었다. 8월 24일, 2부대의 자유 프랑스장군인 클라라크 장군이 미국 육군 사령관인 레너드 T. 게로 장군의 말을 거부하고 선봉대를 파리에 보냈다.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들로 구성되었던 9 군단은 미국식 M2 반궤도장갑차, M4 셔먼 전차들로 무장했고 레이몬드 드론 장군이 이들을 지휘했다.

전투 개요 편집

노르망디 상륙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재빠르게 탈환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고립되거나 철수를 시작하며 모든 친독일계 경찰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몇몇 반독일 시위가 일어났고, 무장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활발히 일어났다.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지역적인 중앙적 지시 없이 경찰서, 마을 회관, 공공기관, 신문사, 그리고 드 빌 호텔에서 활동 중이던 프랑스 국내군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약 20,000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파리에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로 표지판을 파괴하고, 독일 병사들의 자동차 바퀴를 구멍냈으며 통신선을 두절했고, 정유소를 폭발시켰으며, 고립된 독일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부적절하게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전쟁을 하기를 두려워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스웨덴의 라울 노들링에게 독일군 담당자와 파리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리츠와의 협상을 원했다. 8월 19일 이들은 협상을 계속 이어갔다. 레지스탕스군은 서열이 모호했고, 콜리츠는 파리의 일부분을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넘기기로 협의했다. 레지스탕스 대원은 특정 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하는 것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이었고 독일군과 레지스탕스 대원 둘다 그들의 구역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은 8월 24일에 발족한 후 독일군은 대부분 파리에 철수했고, 8월 25일경 진격하던 연합군은 파리로 입성했다.

프랑스 탈환 편집

각주 편집

  1. Williams 1988, x쪽.
  2. Luxembourg Army website.
  3. Beevor 2009, 76쪽.
  4. Beevor 2009, 82쪽.
  5. Beevor 2009, 492쪽.
  6. US Navy website.
  7. Dear & Foot 2005, 322쪽.
  8. Churchill 1949, 115쪽.
  9. Zuehlke 2004, 20쪽.
  10. Ford & Zaloga 2009, 8–10쪽.
  11. Churchill 1951, 582쪽.
  12. Zuehlke 2004, 21–22쪽.
  13. Ford & Zaloga 2009, 10–11쪽.
  14. Beevor 2012, 3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