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징병거부 폭동

뉴욕 징병거부 폭동(New York City draft riots)은 남북 전쟁이 일어난 동안 새로운 연방 징병제에 노동자 계급의 뉴욕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1863년 7월에 일어나 5일간 미국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가장 파괴적인 일부였다. 수백명의 주민들이 살해되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으며 흑인 뉴욕 시민들이 가끔 폭동인들의 폭력의 목표였다.

뉴욕 징병거부 폭동
경찰의 진압 상황을 그린 삽화
날짜1863년 7월 13일 ~ 7월 16일
지역미국 뉴욕 맨해튼
원인남북 전쟁 징병제, 인종 차별 주의, 흑백인 사이의 직업들을 위한 경쟁
결과궁극적으로 억압
시위 당사자
폭도들 (대부분 아일랜드계 미국인)
뉴욕 경찰국, 뉴욕주 방위군, 북군
사상자
사망자수119명-120명
부상자수2,000명

남북 전쟁 전에 뉴욕의 분할 편집

 
1863년 6월 23일 뉴욕에서 북군을 위한 군사 징병제를 위하여 연방 정부의 군사 징병 초안 혹은 등록 행위를 위한 신병 모집 포스터

미국비지니스 수도로서 뉴욕은 중요한 교역 상대로서 남부를 잃는 것을 의미하면서 남북 전쟁의 시작을 환영하지 않았다.

목화는 뉴욕의 상인들을 위하여 극도로 가치 있는 생산물이었는 데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목화는 도시의 항구에서 출하되는 모든 상품들의 40 퍼센트를 대표하였다. 1808년 노예 무역이 불법으로 만들어진지 오랜 후에 도시의 노예의 지하 시장은 지속적으로 번창하였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심지어 뉴욕주합중국으로부터 탈퇴하는 얘기도 나와 맹방주들과 도시의 비지니스 이익에 관하여 너무 얽혀있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뉴욕의 반전 정치인들과 신문들은 많은이들이 아일랜드 혹은 독일 이민자들이었던 그 근로자 계급의 백인 시민들에게 해방은 남부로부터 해방된 수천명의 노예들에 의하여 노동력에서 그들의 대체를 의미할 것을 계속 경고하였다.

1862년 9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을 공고하여 노동자들의 최악의 두려움을 확인하였다.

당시 해방을 위한 링컨의 결정은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닌 합중국을 보존하는 데 가입한 뉴욕주 연대들의 군인과 장교들은 물론 도시에서 노동자들 사이에 항의를 일으켰다.

화를 촉발한 새로운 연방 초안 법 편집

 
1860년부터 1870년까지 뉴욕 경찰청장을 지낸 존 알렉산더 케네디

1863년 초순에 극심한 인력 부족을 향한 링컨의 정부는 20세와 35세 사이의 전체 남성 시민들과 35세와 45세 사이의 전체 미혼 남성들을 병역 의무 대상으로 만든 엄격한 새 징병법을 통과시켰다.

모든 적격 남성들이 추첨에 들어갔어도 그들은 대체자를 고용하거나 300 달러 (오늘날 대충 5,800 달러)를 정부에 지불하면서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을 살 수 있었다.

당시 그 합계는 평균 미국인 노동자를 위하여 연봉이었고 가장 부유한 남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징병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문제를 복잡하게 한 흑인 남성들은 자신들이 숙고되지 않은 시민들로서 징병으로부터 면제되었다.

징병제에 폭동들은 디트로이트보스턴 같은 다른 도시들에서 일어났으나 뉴욕에서 일어난 것 만큼 나쁜 곳은 없었다. 반전 신문들은 새로운 징병법에 대한 공격을 게시하여 7월 11일 도시의 첫 징병 추첨에 이르는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부채질하였다.

폭동들이 시작되며 편집

 
렉싱턴가에 건물을 공격하는 폭도들

추첨이 있던 첫 24시간 후에 도시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으나 7월 13일 월요일 아침 일찍이 폭동이 시작되었다.

주로 아일랜드인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던 수천명의 백인 노동자들은 군사와 정부 건물들을 공격하면서 시작하여 경찰관군인들의 불충분한 수를 포함하여 그들을 막으려고 한 사람들에게만 폭력적이 되었으며 도시의 지도자들은 시초적으로 그들을 반대하는 데 집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흑인 시민들, 주택과 비지니스들을 목표로 이동하였다.

하나의 악명 높은 예로서 수천명의 사람들, 그중에 어떤이들이 곤봉과 방망이로 무장한 폭도가 42번가 근처 5번가에 있는 2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을 수용한 4층 건물 유색인 고아원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침구, 식량, 옷과 다른 물건들을 가져가고 고아원에 불을 질렀으나 도시의 사설 구빈원들 중의 하나로 강제로 이동한 어린이들에게 폭행을 멈추었다.

폭력과 유혈 사태를 일으킨 폭동들 편집

 
징병거부 폭동이 일어난 동안 화형을 당한 한 흑인 남성

흑인들 자신에 추가로 폭도들은 분노를 백인 노예폐지론자들과 흑인 남성들에게 결혼한 여성들에게 돌렸다.

1863년 초순 선착장에 흑인 노동자들을 기용한 고용인들에 대한 시위는 폭력적으로 변하여 자신들과 나란히 선착장에 일을 하던 흑인 남성들에게 오랫동안 반대한 백인 항만 노동자들은 흑인 노동자들을 만족시킨 선착장들 근처에 많은 비지니스들을 파괴하고 도시에서 흑인 노동자 계급을 없애는 데 자신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의 주인들을 공격하는 기회를 얻었다.

여태까지 최악의 폭력은 충격적인 잔인함으로 린치를 당하거나 맞아 죽은 흑인 남성들을 위하여 예약되었다. 전체적으로 살해된 사람들의 실제 숫자 추정이 1,200명 만큼 높이 도달하였어도 뉴욕 징병거부 폭동의 발표된 사망자 수는 119명이었다.

폭동의 종말 편집

뉴욕의 지도자들은 징병거부 폭동 진압 임무와 분투하였으며 뉴욕주지사 호레이쇼 시모어는 징병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폭동에 동정적으로 보였던 평화민주당원이었다.

뉴욕의 공화당 시장 조지 옵다이크는 연방군들을 보내는 데 미국 전쟁부에 유선으로 연결했으나 폭동으로 응답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에 망설였다.

7월 15일 항의의 셋째 날 폭동은 브루클린스태튼아일랜드로 확산되었다. 이어진 날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싸운 뉴욕 연대들로부터 4,000명 이상의 연방군들 중에 첫번째가 도착하였다.

오늘날 머리힐 이웃인 곳에 폭도들과 충돌한 후, 군인들은 결국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고 7월 16일의 자정까지 뉴욕 징병거부 폭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여파와 유산 편집

 
징병거부 폭동의 여파

사망자 수에 추가로 폭동들은 재산 피해에 수백만 달러를 발생시켰고 도시의 흑인 거주민들 중에 3,000명을 노숙자로 만들었다.

뉴욕 징병거부 폭동은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폭동으로 남아 로스앤젤레스 폭동 (1992년)과 디트로이트 폭동 (1967년)보다 더욱 최악이었다.

폭동 후에 유색인 고아원이 똑같은 현장에 재건을 시도했을 때 이웃하는 부동산 소유자들이 항의하였고 고아원은 결국적으로 이후에 할렘이 될 도시의 북부에 드물게 정착지로 이전할 것이었다.

폭동들에 의하여 기절한 뉴욕에서 노예 폐지 운동은 천천히 되살아났고 징병거부 폭동 발생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1864년 3월 뉴욕은 북군에서 전흑인 지원병 연대가 허드슨강에서 자신들의 배에 타기 전에 거리들을 통하여 화려함과 상황에 따라 행렬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의미있는 승리에 불구하고 징병거부 폭동은 도시의 흑인 공동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1860년 인구 조사는 12,414명의 흑인 뉴욕 시민들을 기록했던 동안 1865년까지 도시의 흑인 인구는 9,945명으로 감소하여 1820년 이래 가장 낮은 숫자였다.

대중문화에 나타난 뉴욕 징병거부 폭동 편집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한 《갱스 오브 뉴욕》의 마지막 장면이 이 폭동 사건을 다루고 있다. 폭동의 전개 과정이나, 당시 상류층의 둔감함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