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에카르트

디트리히 에카르트 (Dietrich Eckart, 1868년 3월 23일 ~ 1923년 12월 26일)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SDAP, 또는 나치당)의 중요했던 초기 당원이자 1923년 맥주홀 폭동의 참가자이다.

1890년 경의 에카르트

1868년 독일의 노이마르크트에서 요한 디트리히 에카르트라는 출생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계열의 공증인이자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그가 열 살이 되던 해인 1878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학교를 일곱 번이나 옮겨야 했다.

1891년 에를랑겐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중 잦은 싸움으로 인해 퇴학을 당하였다. 에카르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저널리스트, 시인, 극작가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라이프치히, 베를린, 레겐부르크로 이주해 다녔다. 평소 술과 담배를 즐겼었는데, 1899년 재산을 거의 탕진한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왕립 극장 예술 감독에게 지도를 받으며 많은 연극을 썼다.

극우 오컬트 단체인 툴레 협회의 일원이었던 그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창설멤버였으며, 초기에 아돌프 히틀러를 발굴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치당의 세력을 확장하고 헤르만 괴링, 에리히 루덴도르프 등의 인물들이 들어오면서 그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으며 뮌헨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상황을 전달받는등 중심 세력에서 멀어졌다.

1923년 11월 뮌헨 폭동의 실패로 연루되어 히틀러와 함께 교도소에 갇혔다가 곧 풀려나 음주로 인한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으로 "히틀러를 따르라, 춤은 그가 추지만 노래를 내가 고른다. 나때문에 슬퍼하지 마라. 나는 독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히틀러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을 에카르트에게 바쳤으며 그를 국가 사회주의의 아버지라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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