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北魏, 386년~53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선비족 탁발부화북에 건국하여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정복 왕조이다. 정식 국명은 탑가치이지만 한자 국호는 위(魏)라고 불렸기 때문에 전국 시대 그리고 삼국 시대 위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후위(後魏), 선비족 탁발씨(拓跋氏)가 지배했다고 하여 탁발위(拓跋魏),이후 탁발씨가 원씨(元氏)로 개명했기 때문에 원위(元魏)라고도 한다.


 

 

 

386년~534년
 

440년 당시의 북위(파란색)
440년 당시의 북위(파란색)
수도성락, 평성, 낙양
정치
정치체제군주제
황제
386년 ~ 409년
532년 ~ 535년

태조 도무제
효무제
국성탁발씨 → 원(元)씨
역사
 • 성립
•멸망
386년
534년
인문
공용어탁발어, 중세 중국어
민족선비족, 한족
종교
종교불교
위진 남북조 왕조들의 계통도
479년 당시의 북위.

역사 편집

261년 선비족 탁발역미가 한족들을 원정하여 정복하였다. 후세에 선비족 탁발씨가 정복한 지역에 옛 위나라가 존재했어서 위나라라고 기록하기도 하였고 현재는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부르고 있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파언탑랍(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다. 삼국을 통일한 서진은 탁발부의 세력을 이용해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의 산시성 북부의 땅을 내어주어 살게 했다. 하지만 선비족들은 지속적으로 서진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선비족 탁발부는 세력이 강해졌다.

315년에 침략해오는 선비족을 달래기 위해 서진은 선비족 탁발의로에 관작을 주어 대나라(代)의 왕으로 봉했으나 선비족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다.

대나라는 탁발십익건376년에 저족의 국가 전진에 멸망하였다.

북위의 성립 편집

대나라가 멸망했으나, 383년에 탁발규는 선비족들을 이끌고 전진과의 비수 전투에서 이겼고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는 386년대나라를 재건하고 전진과 화북의 한족들을 정복하였다. 이후에 탁발규는 황제를 자칭하고 타브가치를 건국하였고 한족들은 중국을 정복한 탑가치의 국호를 (魏)라고 기록하였다. 이 탁발규가 바로 초대 황제인 도무제이다.

도무제는 지금의 내몽골 일대로 북상해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족 등 기마민족들과 함께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이어서 선비족 도무제는 남쪽으로 정복활동을 벌이면서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후연을 공격하였고, 397년에 수도 중산(中山)을 함락하고 후연을 멸망시켰다. 398년에 수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 다퉁으로 옮겼고, 그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소개시켰다.

도무제는 갈족, 흉노족, 선비족의 군사로 남쪽으로 한족들을 정복하면서 선비족 체제를 유지하였다. 피지배층 한족에 대한 차별과 학살이 존재하였다. 후세의 기록에는 선비족이 피지배 문화인 중국 한족 문화도 일부 수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탁발도(拓跋燾)의 한족 원정 편집

도무제의 뒤를 이은 선비족 명원제는 대규모 선비족 군사들을 이끌고 한족 국가인 유송을 공격하였고 하남을 정복했다. 명원제를 이은 태무제 탁발도는 호하, 북연, 북량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한족 국가 유송 원정하면서 유송의 회남 강북을 정복하였고 439년에는 화북을 통일하였다. 북위에 굴복한 유송의 한족들이 조공과 한족 공녀들을 보내니 북위 선비족들은 중국 전체에서 우세한 세력을 떨쳤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화북 정복 과정에서 많은 한족들이 학살되었다. 서진 시절부터 내려오던 많은 한족들이 노비로 강등되었고 선비족과 갈족, 흉노족 군인들에게 한족들을 노비로서 배분하였다. 또한 많은 한족(漢族) 여성들을 기생으로 만들었다. 선비족 군사들에 정복된 화북에서 한족들의 인구는 대량으로 줄게 되었고 한족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태무제 탁발도는 유송의 회남과 강북을 점령한 이후 도사 구겸지가 접근하였다. 불교가 성행하던 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 교단을 확립하였고 이어서 한족인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 최호는 한족으로서 선비족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유송에서 한간(매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삼무일종의 폐불 첫 번째) 태무제의 북위 시절 한족들을 등용한 적이 없었으나 도사 구겸지의 요청에 의해 한족 출신 최호를 등용하였는데 최호는 선비족들이 한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한족화). 선비족 지배층들은 이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고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호는 한족들을 모아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하였고 탁발도는 한족 시점의 역사서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였다. 이후 탁발도는 선비족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한자 체제화(한족화)를 추진하던 최호와 한족 출신 관료들을 전부 숙청하였다.

효문제 때 풍태후가 섭정하면서 유교적인 예법을 받아들이고 균전제를 시행하였으며 또한 삼장제를 확립했다. 풍태후 사후에 친정을 시작한 효문제는 493년에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는 선비족의 성씨도 중국풍으로 바꿔 탁발씨를 원씨(元氏)로 고쳤으나 피지배민족인 한족의 성씨를 쓰는 것에 선비족의 반발이 심해 북위를 이은 북주에서 다시 선비족 성씨로 휘귀하였다. 선비족에 충성을 하는 한족 일부에 관직을 주었으나 선비족은 선비족끼리 혼인하는 풍습은 지속되었고 한족에 차별이 있었다.

북위의 쇠퇴 및 멸망 편집

효문제 사후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혔다. 또한 태무제 때 선비족들이 한화정책에 불만을 가져 최호와 화북의 한족들을 대부분 숙청하였지만 효문제와 풍태후 그리고 영태후는 또 한화정책을 실시하였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들의 불만은 523년에 일어난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6진은 원래 북위의 수도 평성을 지키던 6곳의 군사기지로 북위 선비족 왕실의 선비족과 흉노족의 명족들이 있는 곳이였다. 하지만 급진적인 한화정책으로 인해 이민족들인 6진의 불만이 누적되어 6진의 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황제를 두 번이나 바꿔 세우지만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흉노족 출신 이주 영(爾朱 榮)이 군사를 일으켜 영태후에 맞서 효장제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에 낙양을 함락한 뒤 영태후와 영태후가 세운 황제를 황하에 빠뜨려 죽이고, 승상 이하 대신 천여 명을 처형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하음의 변이라고 한다.

이주 영은 진양(晉陽)에서 조정과 효장제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이주씨(爾朱) 휘하의 선비족 장군 고환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를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고환은 6진에 있던 선비족들과 흉노족을 모아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여 정권은 효무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효무제는 이번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 낙양을 탈출해 장안으로 도망쳐 선비족 우문태에게 의지하자, 선비족 고환은 효정제를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으로 옮겼다. 같은 해 선비족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 서위라 부른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어, 고환의 아들 고양이 재상이 되어 550년에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북제를 건국했다. 서위에서도 정권은 우문씨가 차지하여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556년에 공제를 폐위하고 다음 해 북주를 건국하니 이로써 동서 양위는 멸망했다.

모사자귀제도 편집

북위에선 외척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실시한 모사자귀제도라는 잔혹한 제도를 실시했다. 이것은 후궁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생모를 죽이고, 아이는 따로 키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항상 있어온 것은 아니다.

주요 명신 및 명장 편집

역대 황제 편집

북위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헌명황제
(獻明皇帝)
(위 도무제 추숭)
탁발식(拓跋寔) - - -
제1대 위 태조
(魏太祖)
도무황제
(道武皇帝)
탁발규(拓跋珪) 등국(登國) 386년 ~ 396년
황시(皇始) 396년 ~ 398년
천흥(天興) 398년 ~ 404년
천사(天賜) 404년 ~ 409년
386년 ~ 409년 성락금릉
(盛樂金陵)
제2대 위 태종
(魏太宗)
명원황제
(明元皇帝)
탁발사(拓跋嗣) 영흥(永興) 409년 ~ 413년
신서(神瑞) 414년 ~ 416년
태상(泰常) 416년 ~ 423년
409년 ~ 423년 운중금릉
(雲中金陵)
제3대 위 세조
(魏世祖)
태무황제
(太武皇帝)
탁발도(拓跋燾) 시광(始光) 424년 ~ 428년
신가(神䴥) 428년 ~ 431년
연화(延和) 432년 ~ 435년
태연(太延) 435년 ~ 440년
태평진군(太平眞君) 440년 ~ 451년
정평(正平) 451년 ~ 452년
423년 ~ 452년
제4대 -
<남안은왕(南安隱王)>
탁발여(拓跋余) 승평(承平) 452년 452년 -
- 위 공종
(魏恭宗)
(위 문성제 추숭)
경목황제
(景穆皇帝)
탁발황(拓跋晃) - - -
제5대 위 고종
(魏高宗)
문성황제
(文成皇帝)
탁발준(拓跋浚) 흥안(興安) 452년 ~ 454년
흥광(興光) 454년 ~ 455년
태안(太安) 455년 ~ 459년
화평(和平) 460년 ~ 465년
452년 ~ 465년 운중금릉
(雲中金陵)
제6대 위 현조
(魏顯祖)
헌문황제
(獻文皇帝)
탁발홍(拓跋弘) 천안(天安) 466년 ~ 467년
황흥(皇興) 467년 ~ 471년
465년 ~ 471년
제7대 위 고조
(魏高祖)
효문황제
(孝文皇帝)
원굉(元宏) 연흥(延興) 471년 ~ 476년
승명(承明) 476년
태화(太和) 477년 ~ 499년
471년 ~ 499년 장릉(長陵)
제8대 위 세종
(魏世宗)
선무황제
(宣武皇帝)
원각(元恪) 경명(景明) 500년 ~ 504년
정시(正始) 504년 ~ 508년
영평(永平) 508년 ~ 512년
연창(延昌) 512년 ~ 515년
499년 ~ 515년 경릉(景陵)
제9대 위 숙종
(魏肅宗)
효명황제
(孝明皇帝)
원후(元詡) 희평(熙平) 516년 ~ 518년
신귀(神龜) 518년 ~ 520년
정광(正光) 520년 ~ 525년
효창(孝昌) 525년 ~ 528년
무태(武泰) 528년
515년 ~ 528년 정릉(定陵)
임시 - - 효명제의 딸(孝明皇帝女) - 528년 -
임시 - 유주
(幼主)
원조(元釗) - 528년 -
- 위 숙조
(魏肅祖)
(위 효장제 추숭)
문목황제
(文穆皇帝)
원협(元勰) - - -
- - 효선황제
(孝宣皇帝)
(위 효장제 추숭)
원소(元劭) - - -
제10대 위 경종
(魏敬宗)
효장황제
(孝莊皇帝)
원자유(元子攸) 건의(建義) 528년
영안(永安) 528년 ~ 530년
528년 ~ 530년 정릉(靜陵)
제11대 - -
(장광왕(長廣王))
원엽(元曄) 건명(建明) 530년 ~ 531년 530년 ~ 531년 -
- - 선황제
(先皇帝)
(위 절민제 추숭)
원우(元羽) - - -
제12대 - 절민황제
(節閔皇帝)
(폐황제(廢皇帝))
원공(元恭) 보태(普泰) 531년 ~ 532년 531년 ~ 532년 -
제13대 - 폐황제
(廢皇帝)
(안정왕(安定王))
원랑(元朗) 중흥(中興) 531년 ~ 532년 531년 ~ 532년 -
- - 무목황제
(武穆皇帝)
(위 효무제 추숭)
원회(元懷) - - -
제14대 - 효무황제
(孝武皇帝)
(출황제(出皇帝))
원수(元脩) 태창(太昌) 532년
영흥(永興) 532년
영희(永熙) 532년 ~ 534년
531년 ~ 534년 운릉(雲陵)

참고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