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전투 (1950년)

상주 전투한국 전쟁 초중기 미 제25사단이 상주를 중심으로 중부지역의 국군을 지원하고, 미 제1기갑사단은 경부국도상의 미 제24사단을 지원키로 결정됨에 따라, 이들 양 사단이 낙동강선을 기저로 한 상주와 영동-김천의 축선에서 제8군의 계획에 따라 지연전을 함께 벌인 전투이다.[1]

상주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미국 24연대의 화포 지원.
날짜1950년 7월 22일 ~ 7월 31일
장소
결과 북한군의 승리 상주 함락
교전국
미국의 기 미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 윌리엄 B. 킨 미 제25사단장 소장
미국 허튼 V. 화이트 제24연대장 대령
미국 제1대대장 불명
미국 조지 R. 콜 제2대대장 중령
미국 존 T. 콜리 제3대대장 중령
미국 존 M. 마이클리스 제27연대장 중령
미국 길버트 J. 체크 제1대대장 중령
미국 고든 E. 머치 제2대대장 소령
미국 헨리 G. 피셔 제35연대장 대령
미국 버나드 G. 티터 제1대대장 중령
미국 존 L. 윌킨스 제2대대장 중령
미국 허버트 R. 게이 제1기갑사단장 소장
미국 마르셀 G. 크롬베즈 제5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제1대대장 불명
미국 존 클리포드 제2대대장 중령
미국 세실 W. 니스트 제7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피터 D. 클레이노스 제1대대장 중령
미국 오마 T. 히치너 제2대대장 중령
미국 레이먼드 D. 팔머 제8기갑연대장 대령
미국 로버트 W. 케인 제1대대장 중령
미국 유진 J. 필드 제2대대장 중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광 제1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진 제1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성철 제15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현 제2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영호 제3사단장 소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경수 제105전차사단장 소장
병력
제8포병대대
제64포병대대
제159포병대대
제90포병대대 A포대
제79전차대대 A중대
제72전투공병대대
제61포병대대
제77포병대대
제82포병대대
제99포병대대
제92공포대대 A포대
제71전차대대 A중대
제8전투공병대대
피해 규모
27명 전사
293명 부상
3명 실종
약 5000명 사상

전투 과정 편집

미 24사단에 이어 전선에 투입된 미군 사단은 25사단이었다. 예하에 24·27·35연대를 가지고 있던 미 25사단은 7월 12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7월 13일부터 한국에서 유엔군의 작전을 지휘하게 된 8군사령부는 25사단에게 1개 대대로써 포항비행장을 경비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중부전선에서 적의 전진을 막고 있던 한국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 명령에 근거하여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소장이 이끄는 제25사단은 27연대를 안동으로 추진시키고(후에 보은~황간 축선에 투입), 35연대의 1대 대대를 뽑아 포항비행장 경비임무를 맡기고(후에 27연대 증원임무수행), 24연대는 전투단을 편성하여 국군 6·8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사단장은 지휘소를 영천에 이어 상주에 두고 독자적인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제25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킨 소장은 53세의 노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1918년 11월 1일 1년 4개월 만에 미국 육사(West Point)를 떠나 임관한 “생도장교”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다시 1919년 6월에 육사를 다시 졸업하여 2년 동안만 생도생활을 한 장교들이 되었다.

졸업서열이 낮은 킨 소장은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의 경력상 전망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그러나 1939년 육군성 인사참모부에서 오마르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과 근무할 기회를 가졌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브래들리 장군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참모장으로 킨 준장을 계속 보직하여 킨 장군은 1군사령부의 참모장이 되었다.

브래들리 장군이 12집단군 사령관이 된 후에도 1군 참모장으로 남게 되어 1군이 태평양지역 작전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킨 장군은 태평양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48년 9월 당시 참모총장까지 오른 브래들리 장군은 킨 준장을 25사단장에 임명하여 별을 하나 더 달아주었는데 그리하여 25사단은 역전노장인 사단장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단의 전력은 그렇게 강한 편이 되지 못했다. 7월 10일 부산에 도착한 미하 엘리스 대령이 27연대는 비교적 건전한 지휘관들과 능력 있는 병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연대장은 2차 대전 후 동양인들이 싸우는 전술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으며, 능력있는 연대장으로서 7월 8일 먼저 한국전선에 킨 사단장과 같이 와서 현지 정찰을 할 정도로 사단의 중추적 지휘관이었다.

킨 소장은 특히 병사들을 모아놓고, 옛날 패튼 장군과 같이 “귀관들은 이곳에 죽으러 온 것이 아니고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Remember, you're here to kill and not to be killed.)'고 기염을 토할 정도의 열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인병사와 백인장교들로 구성된 24연대는 전투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했다.

흑인 병사들은 한국의 혹서와 습기, 비위생적인 환경, 험준한 산악지형을 일단 싫어했고,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 역시 부연대장 폴 F. 로버츠(Paul F. Roberts) 중령을 제외하고는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있었다. 35연대장 헨리 G. 피셔(Henry G. Fisher) 대령은 전문 직업군인으로서 다른 지휘관과 전혀 손색이 없었지만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 역시 평화시 점령군 임무에 익숙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25사단의 전력은 전체적으로 강한 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중부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는 국군 후방의 제2선에서 대기중이던 25사단은 7월 18일 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하자, 8군이 1기병사단을 경부본도의 24사단을 대신하도록 조치함에 따라, 상주 정면의 한국군의 지원임무에 전념하게 되었다.

사실 월턴 워커 8군사령관은 25사단이 먼저 한국전선에 도착되었으나, 이 사단의 전투력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보다 늦게 포항에 상륙한 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경부본도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25사단 예하 각 연대는 7월 22일경부터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1개 대대를 포항비행장 경비로 남겨둔 35연대는 2대대를 함창으로 추진하여 국군 6사단을 지원하도록 했다. 2대대는 주력을 영강 남안에 배치하고, 1개 중대(F중대)를 뽑아 강 북안으로 추진시켜 6사단 진지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 중대는 북한군의 포위망에 걸려 전사 6명, 부상 10명, 실종 21명의 막대한 손실만 보고 강 남안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대대는 상주 북쪽 8km 지점을 점령하여 상주~함창간의 주보급로 확보임무를 맡게 되었다.

7기병연대의 병력에게 포항비행장 경비임무를 넘기고 연대로 복귀한 1대대는 황간지역에서 싸우고 있던 27연대를 증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7월 29일 연대는 상주 북쪽 3km 지점으로 철수하였다가, 7월 30일에는 상주 남쪽고지로, 그리고 7월 31일에는 27연대를 증원하던 1대대와 합류하여 김천 북방 15km 지점인 옥산동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여 상주에서 김천에 이르는 도로와 선산을 잇는 분기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북한군의 남진을 막을 기약은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24연대 2대대는 상주 서쪽으로 괴산에 이르는 도로를 지키는 임무를 맡아서 화령장(상주 서쪽 20km 부근)에서 박성철 소장이 이끄는 북한군 15사단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힌 바 있는 국군 17연대의 진지를 인수하려 했다. 그러나 대대의 선두에 섰던 E중대가 불시에 적의 사격을 받아 흩어지자 본대 역시 분산되었다.

이에 놀란 24연대장 허튼 V. 화이트 대령이 이 직접 현장(평온리 : 상주 서쪽24km 지점)에 나가 병력을 수습하였다. 7월 25일 24연대는 1·2·3대대를 투입하여 화령장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진격해 오는 북한군을 맞아 지연전을 벌였으나, 선두 2대대가 패한 후로 전 장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3대대 L중대는 장교 4명, 부사관[2] 105명이 진지를 점령했으나, 이틀 후까지 진지를 지킨 병력은 장교 1명과 부사관[3] 17명뿐이고, 장교 3명과 부사관[4] 88명은 진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따라서 상주 서쪽 800m지점에 설치한 낙오자 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75명의 진지 이탈병을 수습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연대는 대체로 낮에는 고지를 지키다가 밤이면 후방진지로 철수하여 포격으로 적의 전진을 견제하는 식의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연대의 전투손실을 그렇게 대단한 편은 아니었다. 7월 22일 ~ 7월 30일까지의 기간 중 24연대는 전사 27명, 부상 293명, 실종 3명의 손실을 입은 반면 국군의 포탄과 폭탄세례를 받은 북한군 15사단은 약 5,000명의 손실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연대는 7월 31일 상주를 거쳐 철수했다.

7월 25일 영동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25사단이나 국군의 방어능력 역시 한계가 드러나자, 7월 26일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선에서의 방어작전을 구상하고 철수계획을 세우는 한편, 8군사령부도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려 했다. 도쿄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건의를 받자, 7월 27일 10:00시 대구의 군사령부를 방문했다.

90분간의 회담에는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 겸 극동군 사령부의 참모장 에드워드 M. 알몬드(Edward M. Almond) 장군 등 셋만이 참석했다. 맥아더 장군은 워커 장군의 건의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책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의 덩커크는 없다고 강조하고, 미 24사단과 한국군수도사단을 칭찬했다. 그러고는 다시 바삐 왔다갔다하는 주위사람들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린 걸음으로 8군사령부를 떠났다. 역시 그는 한국전선에서 또 하나의 극적인 순간을 연출해 냈다.

그로부터 이틀 후 7월 29일, 25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는 상주에는 워커 장군이 나타나 이렇게 소리쳤다.

이틀 전에 맥아더 장군이 여기에 왔었다. 그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요구를 알고 있으며, 적이 어디를 죽어라 하고 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증원군을 보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해병부대와 2개의 연대가 우리를 증원하기 위해서 수일 내에 도착될 것으로 기대된다. 추가적인 부대도 가능한 빨리 보내어질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고 있다. 더 이상 철수이건, 후퇴이건, 전선의 조정이건, 또 귀관들이 택한 어떠한 용어도 없다. 우리 뒤에 우리가 물러설 어떠한 선도 없다. 모든 부대는 역습을 반드시 실시하여 적의 허를 찔러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해야 한다. 덩커크(Dunkirk)나 바탄(Bataan)은 있을 수 없다. 부산으로의 철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살육을 의미한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적들에게 포로가 되는 것은 죽느니만 못하다. 우리는 하나의 팀으로 싸워야 한다. 우리 중에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싸우다 같이 죽어야 한다. 진지를 포기하는 사람은 수천의 동료를 죽게 했다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책임을 져야 할는지 모른다. 나는 이 점을 사단의 전장병에게 알리기를 바란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우리가 이 선을 지켜야 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워커 장군은 이와 같은 조의 훈령을 다른 사단에도 하달하면서, 한국 전쟁에서의 최초의 방어선이자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이 호남을 돌아 진주~마산으로 진격하여 부산으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전선의 축소조정이 없이는 방어선을 방어선답게 유지할 수 없었다.

"고수냐 아니면 죽음이냐"로 나타난 워커 장군의 고수의지는 여러 가지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결과 및 영향 편집

8월 1일 오후에 제8군으로부터 삼랑진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은 받은 제25사단은 이날 밤중부터 가용한 수송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삼랑진으로 전진케 되었으나, 그 이동 도중에 다시 목적지가 마산으로 변경되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삼랑진을 거쳐 곧바로 마산으로 집결케 되었는데 사단사령부의 선발대는 8월 2일 21:15에, 그리고 사단 주력은 3일 낮중에 마산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사단은 지난 7월 20일에 제 27연대가 안동에서 광간으로 기동한 것에 이어 두 번째로 36시간만에 240km를 주파하는 기동성을 보임으로써 낙동강 서남부 지구의 공백상태를 미봉케 되었다.

각주 편집

  1. 한국전쟁사(국방부), 한국전쟁사(전쟁기념사업회)
  2.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3.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4.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