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쉐량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장쉐량(중국어 정체자: 張學良, 병음: Zhāng Xuéliáng(만주 조선말: 장학량), 1898년 6월 4일 ~ 2001년 10월 15일)은 20세기 중엽 시대 중화민국(만주 태생의 타이완)의 군인군벌 정치가(예비역 장성급 장교 출신)였다.

장쉐량
張學良
중화민국의
동북지역 행정도독 직무대리
임기 1928년 6월 4일-1929년 1월 4일
주석 단얀카이 중화민국 국가주석
장제스 중화민국 국가주석 권한대행

중화민국의
남경 국민정부 총통부 사정비서관
임기 1936년 8월 31일-1936년 11월 12일
주석 린썬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행정원장

중화민국의
남경 국민정부 국방부장 사정비서관
임기 1936년 11월 13일-1936년 12월 12일
주석 린썬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행정원장
장관 허잉친 중화민국 국방부장

신상정보
출생일 1898년 6월 4일(1898-06-04)
출생지 청나라 랴오닝성 안산 부 하이청 현
거주지 중화민국 타이베이
사망일 2001년 10월 15일(2001-10-15) (향년 103세)
사망지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국적 중화민국
학력 봉천동북육군강무학교
경력 중국국민당 고문 겸 당무위원
정당 무소속
부모 아버지 장쭤린
어머니 자오춘구이
계모 라오서우쉔
형제자매 아우 장충량(張忠良)
아우 장쉐밍(張學铭)
배우자 자오이디(재혼)
위펑즈(이혼)
취루이위(옛 첩실)
자녀 4남 1녀
첫째아들 장뤼쉰(張閭珣)
딸 장뤼잉(張閭瑛)
둘째아들 장뤼위(張閭玗)
셋째아들 장뤼치(張閭琪)
넷째아들 장뤼린(張閭琳)
종교 불교개신교
군사 경력
복무 봉천군벌국민혁명군
복무기간 1915년 12월 27일-1937년 1월 28일
근무 서북초비사령부 부사령관
최종계급 국민혁명군 육군 소장
지휘 동북군
주요 참전 중국 내전

중일전쟁

청나라 랴오닝성 하이청 출신. 그는 20세기 중엽의 군벌 시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며 1936년 12월 12일을 기하여 시안(西安)에서 이른바 장쉐량이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하고 제2차 국공 합작 관련 요구를 한 이른바 시안 사건을 주도하였다.

그의 (號)는 이안(毅庵)이었고 별칭(別稱)은 샤오솨이(小帥)였으며 아명(兒名)은 장샤오량(張孝良)이었고 미국식 이름은 Peter Chang이었다.

생애 편집

일생 편집

1898년 6월 4일 군벌 시대 수장 장쭤린(1873~1928)과 그의 사별 초배 부인 자오춘구이(趙春桂, 1876~1913, 장쭤린 장군의 상배 초취 부인.)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장쭤린은 청나라 만저우 지역 펑톈 군벌의 수장이었는데 중화민국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도 친일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중화민국 국가원수 권한대행을 거쳐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원수 직위를 역임하는 등 중화민국 국민정부 과도군사정권 시대 정부수반 직무대리를 역임하였고 1928년 6월 3일,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원수 직위에서 퇴임하였는데 장쭤린이 국민정부 과도군사정권 국가수반 직무대리 퇴임 선언하고 장제스에게 국민정부수반 직위 인수한 이 날은 당시 현역 중화민국 육군 소좌였던 장쉐량의 30번째 생일 그 전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튿날(장쉐량 자신의 30번째 생일 당일), 1928년 6월 4일 아버지 장쭤린이 일본 제국 관동군 소속의 고모토 다이사쿠에 의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여성 편력과 아편 중독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장쉐량을 오히려 중국 내 영향력 행사에 이용하기 더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장쉐량은 이를 극복해 내었고, 이후 장쉐량과 그가 이끌게 된 봉계 군벌은 항일 성향으로 전환하였다.

1931년에 관동군의 공격이 있었으나, 차라리 부저항을 명령하여 만주 전토를 관동군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훗날 장쉐량의 비서장이었던 궈웨이청(郭维城)은 장쉐량이 장제스의 지시를 따른 것이라 증언하였지만, 훗날 장쉐량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끄는 동북군 무력이 일본군을 감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부저항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으며, 장제스는 자신에게 저항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1][2]

그러나, 장제스는 동북군에 저항 명령을 내렸음에도 전폭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만주 사변에서의 부저항 사건의 전모는 장제스와 장쉐량 양 사이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2]

이후 그는 만주 선양의 영향력을 잃었지만, 적지 않은 병력을 보존한 상태였기에 국민정부에서 요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6년 반공산군 공세를 위해 방문한 중화민국장제스시안에서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한 시안 사건을 주도하여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뤄낸다. 장제스를 감금한 혐의로 10년 간의 징역형을 받았고, 출감 후 1949년에 타이완으로 끌려가서 중국 국민당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장제스가 사망한 후, 1993년에 처음으로 중화민국 당국에 의해 출국이 허용되어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거주했다.

2001년 10월 14일 오후 8시 50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자택에서 향년 10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연보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沈永興、朱貴生著:《二戰全景紀實》,打個狗日的(1)”. 2021년 1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1년 1월 20일에 확인함. 
  2. 洪鈁:〈九一八事變當時的張學良〉,《文史資料選輯》第六輯,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全國委員會,北京:中華書局,1960年

외부 링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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