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언종(眞言宗, 일본어: 真言宗 신곤슈[*])은 밀교의 종파로, 신라의 승려인 혜통(惠通: fl. 7세기)을 종조로 하는 해동 진언종과 일본의 승려인 구카이(홍법 대사)에 의해서 9세기 초에 열린 일본의 진언종이 있다.[1][2][3] 신라의 승려인 명랑(明朗: fl. 668)은 진언종의 별파인 해동 신인종(神印宗)의 종조이다.[2][4] 중국에 전래된 밀교를 중국의 진언종이라하기도 한다.[5][6]

연표 편집

연표: 불교 전통의 성립과 발전 (기원전 450년경부터 기원후 1300년경까지) v  d  e  h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인도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금강승

 

 

 

 

 

스리랑카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

 

 
 

 

 

 

중앙아시아

 

그레코 불교

 

티베트 불교

 

비단길을 통한 불교 전파

 

동아시아 · 
··

  천태종 · 정토종 · 일련종

밀교 · 진언종

 

 

  450 BCE 250 BCE 100 CE 500 CE 700 CE 800 CE 1200 CE
  범례:   = 상좌부 불교 전통   = 대승불교 전통   = 밀교·금강승 전통

중국의 진언종 편집

중국의 밀교를 진언종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밀교 또는 중국의 진언종은 인도의 승려인 선무외에 의해 716년에 시작된 것으로 《대일경·금강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한다.[5][6]

한국의 진언종 편집

신인종 편집

신라밀교(密敎)가 처음 들어온 것은 명랑법사(明朗法師: fl. 668)가 선덕왕 4년(635)에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부터이다.[2] 그는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 590-658)의 외숙(外叔)으로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 신인비법(神印秘法) 혹은 문두루비법(文頭婁秘法: Mantra)이라는 방위신(方位神)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주술적(呪術的)인 신앙을 들여왔다.[2]

밀교대승불교를 난숙하게 발달시켜 타력신앙(他力信仰)을 강조하다 파생된 신앙형태로서, 주술(呪術)을 통해 병귀(病鬼)와 악귀(惡鬼)를 쫓고 초자연적 힘을 구사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등 실리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교파이다.[2] 명랑은 이러한 밀교신라에 처음 전래하여 진언종의 별파인 신인종(神印宗)의 종조가 되었다.[2][4]

같은 시대의 밀본(密本: fl. 7세기)도 비밀법(秘密法)을 통해 선덕왕의 질병을 치유하여 밀교 전파에 공헌하였다.[2]

진언종 편집

명랑밀본 이후 혜통(惠通: fl. 7세기)은 당에서 인도 밀교승 선무외(善無畏: 637-735)에게 밀교 교의를 배운 다음 문무왕 5년(665)에 귀국하여 크게 교풍(敎風)을 일으켰다.[2]

후대에서는 혜통을 해동 진언종(眞言宗)의 조사로 삼았는데, 그만큼 그의 밀교 전파에 대한 공로는 큰 것이었다.[2] 혜통 이전까지 전래된 밀교잡밀교(雜密敎)여서 주술적인 면이 강조되었지만, 혜통은 영묘사승(靈妙沙僧)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순밀교(純密敎)를 처음 신라에 전하여 태장법(胎藏法)과 금강법(金剛法)에 의해 불교의 오의(奧義)를 터득하는 길을 열었다.[2]

그러나 신라 후대의 불교신앙미신과 결부된 주술적 밀교신앙이 횡행하여 본래의 탄력을 잃고 타락적인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2]

일본의 진언종 편집

일본의 진언종은 구카이가 중국(당나라)의 장안으로 건너가 청룡사에서 혜과로부터 배운 밀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3] 일본의 진언종은 밀교를 불교의 최고 진리라 천명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사상을 강조하였다.[3] 종교의 실천적인 면에서 일본의 진언종은 밀교의 방법을 더욱 중시한다.[3] 일본의 진언종은 또 "국가의 안정을 수호"하며 "재앙을 없애고 복을 쌓는 것"을 경서를 읽고 불사에 종사하는 목적으로 간주하였다.[3]

헤이안 초기의 입당 팔대가 가운데 밀교를 전수받고 정통 밀결(密訣)을 얻어 귀국한 이는 구카이뿐이다.[3] 구카이는 다른 밀교가와 달리 밀교를 위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을 진행하고, 불교밀교의 관계를 설명하였으며 불교의 궁극적 진리가 밀교에 있다고 말하였다.[3] 여기에 중국 밀교와 일본의 진언종의 차이점이 있다.[3]

구카이는 어려서부터 《논어》와 《효경》 등의 한문 서적을 배웠고, 18세에는 유학(儒學)을 깊이 연구하여 한문에 조예가 깊었다.[3] 후에 불교를 신봉하고 22세(798)에 출가하여 나라대안사에서 삼론종을 배웠다.[3]

구카이는 31세(804)에 최징과 더불어 당나라에 건너갔다.[3] 그는 장안(長安)의 여러 불사를 방문하고 혜과(惠果)를 스승으로 모시며 진언밀교를 배웠다.[3] 혜과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그에게 밀종태장계금강계를 전수하였으며, "편조금강(遍照金剛)"이라는 밀호를 수여하였다.[3] 806년에 귀국한 후 그는 일본 진언종(일본어: 真言宗 신곤슈[*])을 창립하였다.[3]

구카이는 학식이 넓고 재능이 많은 학자로서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산스크리트어를 알았던 사람이며 한문시에도 능숙하였다.[3] 그는 한자의 편방(偏旁)을 참조하여 일본 자모인 가타가나를 만들었다.[3] 또 일본의 최초 사립학교인 종예종지원(綜藝種智院, 지금의 綜智大學 전신)을 세워 불교유교를 가르쳤다.[3] 835년에 입적한 후 "홍법(弘法)대사"라는 시호를 받았다.[3]

구카이의 저서 가운데 《심부심론》(10권)은 일본 최초의 사상사라고 할 수 있다.[3] 구카이의 제자는 수십 명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10대 제자가 유명하다.[3]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외부 링크 편집

참고 문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