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데르(히브리어: חֶדֶר, cheder)는 유대교히브리어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초등교육체계이다.

헤데르의 수업광경, 1912년 촬영

역사 편집

헤데르는 18세기 이전까지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다. 수업은 교사의 집에서 이루어지며, 교사는 유태인 공동체 및 아이들의 부모에게 교육의 대가로 수업료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남자아이들만이 수업을 받을 수 있었으며 여자 아이들은 자신들의 집에서 어머니에게 가정교육을 받았다. 여러 연령대의 남자 아이들이 한 집단에서 교육을 받았다.

남자아이들은 5살 정도에 헤데르에 들어갔다. 히브리 문자히브리어 읽기(중세 이래 북부 유럽 유태인들의 공용어는 이디시어였다.)를 배운 뒤, 바이크라탈무드(미슈나, 게마라 및 추가 주석들)와 함께 토라를 배웠다. 여기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본 방식은 서로를 향해 큰 소리로 읽은 뒤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13세에서 14세가 되면, 바르 미쯔바를 끝으로 교육 과정을 마무리한다. 헤데르를 마친 후에 랍비 또는 소페르가 되고 싶은 학생들은 예시바라는 탈무드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유명한 유럽 내 예시바로는 독일 보름스, 퓌르트체코 프라하에 있던 학교들로, 예시바들 중에서도 이 곳들은 최고 수준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십자군과 얽힌 중세 포그롬을 피하여 동유럽으로 도망쳐 오면서, 유럽 유대교 지성의 중심지는 피난민들과 함께 동유럽으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 헤데르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된다.

18세기 말 헤데르는 정통파 유대교 및 자유파 하스카라에게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정통파 유대교는 헤데르 교사들의 자질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그 당시 유럽 작은 마을 헤데르 교사의 생업은 도축업, 가수, 묘굴인 등이었으며, 부업으로 교사를 했고 수입은 매우 열악했다. 또한 종종 교사들은 진도를 고급 과정으로 지나치게 빨리 옮겨갔는데, 그 이유는 고급 과정을 가르치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스카라는 계몽주의에 전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헤데르의 교육 시스템 자체를 부정했다. 그들은 헤데르가 언어적, 공간적으로 유대인들을 고립시켜서, 민족의 단결과 독립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독일 유대인들은 18세기 말부터 개혁적 유대주의 및 프라이슐렌(자유 학교)을 만들어 그들이 주장했던 사안들을 실천에 옮겼다. 이와 같은 운동 및 의무교육제로 인하여 유럽 내 헤데르는 독일어를 사용하던 여러 국가들에서는 와해되었으나, 동유럽권에서는 홀로코스트까지 남아 있었다.

오늘날 편집

서구 선진국에서 헤데르는 정규 수업 이외 시간에 교육이 이루어지나, 정통 유대교 학교의 경우 전일제로 운영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헤데르가 전일제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