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치안대란, 1945년 광복 직후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의 산하기관으로 치안유지를 위해 조직한 자치단체를 말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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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은 여운형1945년 8월 16일 오후 3시 서울 계동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당시 YMCA 체육부 간사이고 유도 사범이던 장권(張權)을 대장으로 조직했다. 여운형은 이 단체를 자신의 직속으로 두고(1945년 9월 20일 정식으로 건국준비위원회에 소속됨) 시내 체육계 대표 및 체조교사, 전문학교 이상 학도대표들을 총망라하여 안국동 풍문학교에 본부를 설치했다. 이 단체의 편제를 보면 사무국장 정상윤, 총무부장 송병무, 경제부장 한필구, 경리부장 석진경, 정보부장 김규엽, 동원부장 김경석, 운송부장 이용진, 학도동원부장 김규현 등이었다. 그리고 중등대대·전문대학대대·지역동원본부·건설대·전령대·소방대·선전대·공작대·구호대·감찰대·건설본부 등을 두었다.

이 단체는 청년 및 학생 2,000명을 동원하여 서울시내 치안을 확보하게 하고,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 200명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각 지역별로 직장 및 주요기관에 치안대를 조직, 치안을 유지하게 했다. 지방의 치안대 대부분은 중앙과의 조직적 관계에 앞서 독자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임무는 국내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는 데 있었으나 일제 경찰서를 접수·관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헌병·경찰 또는 조선인 일제경찰과의 충돌도 자주 있었다. 또한 미군의 진주가 늦어지는 동안 일본인들은 그들 소유의 재산과 물자를 파괴하거나 매각하고, 심지어는 친일파와 정상배(政商輩)들에게 무기를 넘겨주어 이 단체의 업무수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기도 했다.

물론 건국치안대 자체가 급조되어 조직과 규율이 소홀하기도 했고, 각종 유사단체들이 나타나 재산을 강제 접수하거나 몰수하는 등 불법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사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이 단체의 자주적 활동으로 곧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고, 특히 일본인들은 분노한 한국인들의 격앙된 민족감정 앞에서 생명의 안전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후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이 사설단체의 치안행위를 금지하여 중앙조직은 해체되었지만, 대부분의 지방조직은 그 이후까지 계속 활동했다. 특히 좌우합작운동 기간 동안 지방의 치안대는 민족국가 수립의 정당성에 관한 홍보에 주력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해방 직후 국민들에 의한 자주적 치안유지 조직으로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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