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설씨

경주 설씨(慶州 氏)와 경주 설씨(慶州 氏)는 한자 표기와 시조가 다른 한국의 성씨이다.

경주 설씨(慶州 氏)의 시조 호진(虎珍)은 신라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 촌장이다.

경주 설씨(慶州 氏)의 시조 설손(偰遜)은 위구르 사람으로 원(元)나라의 단주태수(單州太守)를 지내다가 1358년(공민왕 7년) 고려에 귀화하여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다.

경주 설씨(慶州薛氏)편집

경주 설씨 (慶州 薛氏)
관향경상북도 경주시
시조호진(虎珍)
주요 인물설총, 설경성, 설문우
인구(2015년)3,407명

설(薛)씨의 기원은 신라 건국 설화의 고야촌(明活山 高耶村) 촌장 호진(虎珍)이다. 신라 유리 이사금 9년(기원후 32년)에 6촌이 6부로 개칭하고, 명활산 고야촌을 습비부로 고칠 때 성을 설(薛)씨로 사성받고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1]

신라시대 설총원효대사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 사이에서 태어나 국학(國學)을 크게 진흥시키고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였다. 31대 인손은 순창을 본관으로 분적하였다.

고려시대 대대로 의술을 가업으로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난 설경성(薛景成)은 의술에 정통하여 처음에 상약의좌(尙藥醫佐)에 보임되었다가 거듭 승진해 군부총랑(軍簿摠郞)이 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했으며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전임한 후 벼슬에서 물러났다. 충렬왕은 병이 들 때마다 설경성(薛景成)을 주치의로 삼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나중 특별히 찬성사(贊成事)까지 역임하였다. 설경성의 아들 설문우(薛文遇)는 과거에 급제해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까지 지냈다.[2]

경주 설씨는 조선시대 무과 급제자 10명, 생원·진사 7명을 배출하였다.

항렬자편집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1세
口기(基) 진(鎭) 口원(源) 표(杓) 口열(烈) 재(在) 口현(鉉) 택(澤) 口식(植) 환(煥) 口규(圭)

경주 설씨(慶州偰氏) / 맑을 설(偰)편집

경주 설씨 (慶州 偰氏)
관향경상북도 경주시
시조설손(偰遜)
주요 인물설장수, 설미수, 설순, 설송웅, 설민석
인구(2000년)3,269명

위구르(回鶻) 사람이 설련하(偰輦河)에서 살았기 때문에 설(偰)로 성씨를 삼았다.

원나라 태부 설극직(偰克直)의 6세손 설문질(偰文質)이 원나라에서 참지정사를 지냈고, 설문질의 손자 설손(偰遜, ? ~ 1360년)은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을 지내고 홍건적이 대령을 침범하자 1358년(공민왕 7)에 병란을 피하여 고려로 왔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황태자를 단본당(端本堂)에서 시종하면서 설손과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를 크게 후대했다. 집을 하사하고 고창백(高昌伯)으로 봉하였다가 부원후(富原侯)로 다시 봉하고 부원(富原)에 농토를 하사하였다.[3]

설손의 맏아들 설장수(偰長壽)는 서역인(西域人) 출신이기 때문에 왕의 특명으로 1362년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89년(창왕 즉위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禑王)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양왕을 세울 때 모의에 참여, 공이 있었으므로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이 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지목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太祖)의 특명으로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고, 계림(鷄林)을 본관으로 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4]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설손의 넷째 아들 설경수(偰慶壽)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글씨를 썼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偰循)은 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설손의 다섯째 아들 설미수(偰眉壽)는 1407년 참지의정부사로 재직 중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고, 호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쳐, 1410년 예조판서,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후(恭厚)이다.

현대 인물편집

  • 설송웅(偰松雄, 1942년 ~ ) : 용산구청장, 제16대 국회의원
  • 설민석 : 태건에듀 대표이사 (한국사 강사)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권, 유리 이사금 條) 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 一云牟梁 姓孫 干 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祇 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
  2. 『고려사』 권122, 열전35
  3. 『고려사』 권112, 열전25
  4. 설장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