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 시대

일본의 역사적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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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훈 시대(일본어: 古墳時代 고훈지다이[*])는 고고학적 일본사 시대 구분으로, 전방후원분이 성행한 시기인 3세기 중반부터 7세기 말까지의 약 400년을 가리킨다. 야요이 시대의 뒤를 이었으며, 아스카 시대로 이어진다. 3세기 이후 도래인의 유입은 드물어지다가,[1] :19 3세기 후반부터 호족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각지에 고분(고훈)이 축조되었다.

대외관계에서는 4세기 이후 한반도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싸웠다광개토대왕릉비가 전해진다. 5세기에는 왜5왕이 중국에 사자를 보냈다. 왜가 한반도에서 얻은 철자원은 갑옷, 무기, 농기구, 공구 등에 사용되었다. 백제를 통해 대륙으로부터 문자(한자)와 불교를 수입하였다.[2]

시대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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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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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국가(야마토 정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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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전기에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서 왜국왕(친위왜왕) 히미코가 나타나고, 그 본거지 야마타이국이 음의 유사성에 의해 후대의 야마토 정권의 모태라는 설이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3세기 후반에는 나라분지를 중심으로 초기 전방후원분이 형성되어 이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체가 나타났음이 인정된다. 이후 적어도 4세기 중엽까지 기나이에서 기타큐슈까지의 넓은 영역이 하나의 정치체인 야마토 정권 아래에서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3]

고고학적 발굴 결과 나라분지의 세력이 열도 각지의 호족세력(기비씨족, 가쓰라기씨족 등)과 연합해 야마토 정권으로 점차 성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기타큐슈의 세력은 쇠퇴했음을 시사한다. 다만 이와 반대로 일각에서는 기타큐슈 세력이 나라 분지로 동천한 후 나라 분지 세력을 제압해 야마토 정권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야마토 정권 성립기에는 커다란 규모의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나라분지를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야요이 말기에는 기나이, 기비, 이즈모, 쓰쿠시 등의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묘제가 전개되고 있었지만, 전방후원분에서 이들 각 지역의 특징이 융합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야마토 정권은 열도 각 지역의 정치세력이 연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야마토 정권은 야마토 지방(기나이)을 본거지로 혼슈 중부에서 큐슈 북부까지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야마토 정권은 왜국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지배확대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세력 및 부족과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등 사서에서 이를 암시하는 내용(야마토타케루 설화 등)이 있으나 그 진위여부는 불분명하다.

공백의 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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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66년부터 413년에 걸쳐 의 역사문헌에 일본에 대한 내용이 없어 상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기간은 일본 학계에서 '공백의 4세기'라고도 불린다. 이를 두고 본래 일본과 교류하던 대방군팔왕의 난으로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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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정권과 호족층이 협력하여 호족층의 무력은 국조군이라 불리며 왜군을 담당하였다. 전방후원분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왜5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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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한 기록은 5세기 초인 413년에 다시 나온다. 이 때 왜국이 공물을 바쳤다는 사실이 『진서』 안제기에 기록되어 있다. 421년에는 『송서』 왜국전에 『왜찬』 기사가 보인다. 이후 다섯 명의 왜왕에 관한 기사가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데, 각각 순서대로 찬(讃), 진(珍), 제(濟), 흥(興), 무(武)이다. 이들을 아울러 왜5왕이라 한다. 왜5왕을 『일본서기』에 기록된 천황에 비정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왜왕 무의 경우 유랴쿠 천황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무가 황제에게 올린 상표문(上表文)에는 조상 대대로 고생하여 왜의 국토를 통일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順帝昇明二年, 遣使上表曰: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五十五國, 西服衆夷六十六國, 渡平海北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緒,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逕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吞, 掠抄邊隸,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 臣亡考濟實忿寇讎,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偃息未捷. 至今欲練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效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假開府儀同三司, 其餘咸各假授, 以勸忠節.」 詔除武使持節·都督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순제 승명 2년(478)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기를,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치우쳐 있으며, 바깥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의 조상으로부터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 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衆夷) 66국을 복종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여러 대에 걸쳐 조종(朝宗)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아주 어리석으나 조상의 뒤를 이어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의 속한 곳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이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조하여 무를 사지절,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宋書 卷97 열전 第57 이만 (동북아역사재단 역)

사이타마현 교다시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검명과 구마모토현 다마나시 에다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대도명이 당시의 상황을 암시한다. 여기서 '장도인(杖刀人)', '전조인(典曹人)'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에서 5세기 말 당시에는 아직 부(部) 제도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시마네현 마쓰에시 오카다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도의 명문에 '누카타베노오미(額田部臣)'라는 표현이 나타나 6세기 중반에는 부 제도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대신(大臣), 대련(大連) 제도가 생겨 대신에는 헤구리씨(平群), 대련에는 오토모씨(大伴), 모노노베(物部)가 선출되었다. 이즈음 씨와 성씨 제도가 어느 정도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아스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대화의 개신으로 '일본'이라는 국호와 함께 원호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대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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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걸쳐 왜의 군대가 한반도의 백제·신라 및 고구려와 싸운 것이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문장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을 도입하기 시작하여 전국에서 군마 사육을 시작하였다.

6세기에는 쓰쿠시의 국조 이와이가 신라와 통하면서 주변국들을 동원하여 왜군의 침공을 막으려 했다고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으며, 이를 이와이의 난(527)이라 한다. 일본 학계에서는 거듭된 한반도 출병의 군사적 경제적 부담이 북부 규슈에 가중되어 난동을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북부 규슈 세력이 야마토 왕권의 완전 지배하에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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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국가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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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칸 천황(531년-535년), 센카 천황(535년-539년), 긴메이 천황(539년-571년)의 각 왕조를 통해 지역 국가에서 벗어나 초기 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왕권의 기원은 우지(, 氏)를 가진 모노노베씨·오토모씨·소가씨 등이 있었고, 신(臣), 연(連), 국조(國造), 군사(郡司) 등의 지위가 있었다. 지방에서는 기비씨계씨족이 우지, 신(臣)을 세우는 등 각지의 호족들이 부 등을 만들어 세력을 펴고 있었다.

센카 천황 통치기에는 소가씨가 대신이 되어 기세를 올려 스슌 천황(587년-592년)대에는 소가씨 대신 혼자 정권을 잡았다. 스슌 천황은 592년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 암살당한다. 소가노 이나메, 소가노 우마코,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카를 비롯한 소가씨 일족이 정권을 잡은 뒤 고교쿠 천황 4년(645년) 을사의 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소가씨에 의한 정치가 계속되었다.

불교의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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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재위 523 ~ 554년)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4] 이 불교의 전파를 기점으로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짓는다.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5]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 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6][7]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8]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10] 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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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중반부터 6세기 말까지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북쪽으로는 도호쿠 지방에서 남쪽으로는 규슈지방 남부까지 계속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전방후원분의 세기라고도 말한다. 전방후원분은 야마토 조정이 통일정권으로서 확립되어가는 중에, 각지의 호족에게 허가한 형식이라고 여겨진다. 3세기 후반부터 나라 분지에서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전대보다 각별히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이 출현하고, 4세기 초기에는 오사카평야에서 거대고분이 만들어졌으며, 4세기 말기 무렵에는 키나이(畿内)의 일부 지방에서 선진적인 고분군이 출현했다. 계속되는 5세기 중반에는 각지에 거대고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6세기 말기에는 일본 각지에서 거의 시간적으로 동일하게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야마토 정권이 확립에 따라 중앙・지방의 통치조직이 완성되어 더욱 강력한 정권으로 성장하였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된 7세기는 방분(方墳)·원분(円墳)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오오키미(大王)의 무덤은 특별히 팔각분(八角墳)으로 만들어졌다. 7세기 이후를 종말기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국가의 성립부터 고찰해보면, 전기・중기의 고대국가의 형성기를 지나, 후기에서 종말기에 걸쳐서 일본의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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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에서 6세기 중기까지 도래인이 급증하기 시작했다.[1] :19 고구려가 4세기 후반부터 남진 정책으로 한반도 남부의 백제가야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일본 열도로 피난 오는 사람들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1] :19 이 시기 일본 왕실은 백제를 비롯하여 백제 등지에서 피난 오는 도래 기술자로부터 유용한 대륙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위해 백제가 고구려에 대적할 수 있도록 전면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 :20 이처럼 일본 왕실이 도래인들에게 각종 특혜를 주면서 외교와 경제 분야에서 도래 씨족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1] :21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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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문자와 유교가 전해졌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토사기(土師器)와 스에기(須惠器)를 사용했다. 청동기도 대륙에서 들어왔지만, 고대 오리엔트 지역과 달라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격차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할 기회가 없었고, 성능이 뛰어난 철이 대신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청동기는 동탁(銅鐸)과 같은 제사, 종교용으로만 쓰이게 되었다.

대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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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관계로는, 5세기에는 야마토의 오왕(倭の五王)이 중국에 사자를 보냈다.

백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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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주 1]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양국은 활기차게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11]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서기 366년(진구 황후 46년, 근초고왕 21년)[주 2]에 이뤄졌다.[12] 이처럼 왜는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하는 등[13],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근초고왕 때,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14] 당시 백제가 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하구에 위치한 하동을 대왜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성에서 천안을 거쳐 금강상류로 와서 남원에서 섬진강을 타고 하동으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였다. 하동에서 쓰시마섬을 축으로 해서 이키섬, 그리고 규슈마쓰우라 반도(松浦半島)에 이르는 길과 쓰시마섬에서 오키노시마(沖ノ島), 후쿠오카현 북쪽 해안에 이르는 길이 생겨났다.[15]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남침해 개로왕이 살해(475년)[16] 되고, 왕자인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은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목만치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여기서 "남쪽"이 일본을 뜻한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다.[17][18][19]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목만치는 일본에 건너가 성(姓)을 바꾸어 소가노 마치라는 이름의 귀족이 된다. 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일단 문주왕은 백제의 귀족에게 암살당해 죽었다. 그래서 목만치와 같이 일본에 갔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게다가 목만치가 일본 귀족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어 확실한 것은 없다.

 
스다하치만 동경

현존하는 인물화상경(5~6세기)은 백제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이 게이타이 천황(재위 507년 ~ 531년)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인데, 이것은 백제와 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무령왕은 513년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20]516년 고안무(高安茂)[21]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문화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의 왕위를 계승한 성왕(재위 523 ~ 554년)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성왕 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22] 이 불교의 전파를 기점으로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짓는다.

신라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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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신라의 건국 초부터 시달리게 하였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으로서 거의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3] 신라의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64년 음력 4월 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 왔는데,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마주하게 하였다. 왜병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달려들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24]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는데 이사금이 거부,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25]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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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엔 전무하고,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때문에 그 사이에 근초고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2. 일본서기진구 황후(神功皇后) 46년조에 초고왕(肖古王)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신공황후 46년은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서기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한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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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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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
  2. 일본의 역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3세기 후반부터 호족(豪族)의 연합정권인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의 상징으로서 각지에 고분이 축조되고, 대륙과 한반도(韓半島)에서 산업기술과 한자를 수입하여 고분문화가 성립되었다. 
  3. 白石, 1999年.
  4.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 
  5.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3). 《세계 종교사 입문》. 청년사. 229쪽. ISBN 89-7278-376-5.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6.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4쪽. ISBN 89-349-1654-0.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7.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92쪽. ISBN 89-86361-32-9.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 〕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 
  8. 卷第十九 欽明天皇〉. 《일본서기》. 720. 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9.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 
  10.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11.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근초고왕은 왜와 국교를 수립하고 많은 선진 문화를 전했다. 백제가 언제부터 왜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12.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140~141쪽. ISBN 89-01-04751-9. 백제와 왜의 국교 수립은 신공황후 46년(서기 366년)에 이뤄졌다. 
  13.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9쪽. ISBN 89-86142-81-3. 4세기말 이후가 되면 정치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백제로부터 우수한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또 한반도로부터 많은 기술자와 농민이 도래하여 각종 기술을 전했다. 
  14. 조법종 (2007). 《이야기 한국고대사(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역사를 찾아서)》. 청아출판사. 210쪽. ISBN 978-89-368-0359-9. 백제의 일본 문화 전파는 다방면에서 이루어졌다.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 때에는 유교경전에 밝은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이후 박사 왕인(王仁)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경사를 가르쳤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있어 유교적 이념은 다른 토착신앙이나 불교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고대 사회의 형성기에 유교 사상의 수입에 적극적이었다. 
  15. 도민을 위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 200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6.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 
  17.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18. 정윤미 (2011). 《일본에 고함(KBS 국권 침탈 100년 특별기획)》. 시루. 31쪽. ISBN 978-89-966493-2-8. 비상시국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주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린다.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기 위한 숱한 고민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그 신하의 이름이 바로 목협만치(木劦滿致)였다. ...말 그대로 문주왕은 목협만치를 남쪽으로 보냈고 그가 향한 남쪽은 바다 건너 섬나라, 즉 일본을 뜻했다. 
  19.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84쪽. ISBN 89-86361-55-8. 소가노의 증조부는 백제에서 건너왔는데 한국에서는 목협만치(木劦滿致, ‘목례만치’라고도 함), 일본에서는 소가노 만치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개로왕(蓋鹵王) 21년 (475)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위급한 상황에서 이 목협만치가 개로왕의 아들 문주와 함께 웅진으로 천도한 것으로 나온다. 
  20.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720. 七年夏六月 ... 貢五經博士段楊爾。 
  21. 卷第十七 繼體天皇〉. 《일본서기》. 720. 十年夏五月 ... 別貢五經博士漢高安茂、 
  22.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 
  23. 김용운 (2010). 《천황이 된 백제의 왕자들》. 한얼사. 45쪽. ISBN 978-89-89148 32-6.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신라는 건국 초부터 왜의 침범에 시달린 것이 역력합니다. 이들은 신라출신이 아닌 가야 또는 백제 등 다른 나라 출신의 왜였을 것입니다. 즉 신라를 침범한 왜는 이즈모에서 온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대마도 규슈 북부 또는 가야국에 근거를 두는 왜였을 것입니다. 
  24.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 
  25.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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