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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공(高長恭, 541년 ~ 573년)은 중국 남북조시대북제(北齊)의 황족이며 무장이다. 장공이란 이름은 그의 자(字)이며, 이름은 숙(肅) 또는 효관(孝瓘)이다. 고징(高澄)의 넷째아들. 그의 작호인 난릉왕(蘭陵王) 또는 나릉왕(羅陵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북주나 이민족과의 전투로 상당한 용맹을 천하에 알렸으며 곡률광(斛律光)과 함께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무장이었다.

생애편집

541년 고징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알수 없다. 559년 3월 난릉왕으로 책봉되고, 뒤에 병주자사가 되었다. 돌궐(突厥)이 진양(晉陽)에 침입했을 때, 분전하였고 요격했다. 564년 11월 단소(段韶), 곡률광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구원을 갔다. 고장공은 중군을 이끌고 북망산(北芒山)에서 북주군과 전투를 벌렸고 이에 물리쳤다. 고장공은 500기를 이끌고 북주군에 대항하려고 김용성(金墉城)에 당도했지만, 북주군의 포위가 극심했기 때문에 성의 수비병들에는 고장공의 부대가 아군인지 몰랐다. 고장공은 착용한 가면을 벗었고 민낯이 드러내었다. 아군인 것 알게 된 수비병들은 문을 열었다, 이 사건으로 북주와 전쟁에서 승리했다. 북제의 병사들은 난릉왕입진곡(蘭陵王入陣曲)이라는 민요를 만들고 그의 용맹을 기렸다.

564년 12월, 상서령이 되었다. 나중에는 사주목(司州牧)을 역임했다. 569년 12월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571년 2월 태위(太尉)가 되었다. 단소와 함께 백곡(栢谷)을 공격했다. 그리고 정양(定陽)을 공격했다. 단소가 병에 걸리면서 고장공은 단소의 군권을 이어받아 통솔했다. 전후에는 전공에 의해서 거록, 장락, 악평, 고양 지역의 식읍을 받았다. 572년 8월, 대사마가 되었다. 573년 4월 태보가 되었다.

고 장공은 그 용감함과 무훈등의 명성이 높아지자, 당시 황제였던 후주 고위에게 미움을 샀고, 자신이 숙청될 것을 두려워했고, 일부러 전리품을 탐하였고 평판을 안좋게하였고, 전공을 세우는 것을 꺼리게 하였고 병에 걸려도 일부로 치료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라를 내 집같이 생각한다." 라는 실언을 하였는데, 당시에는 황제만이 국가를 집이라 칭할수 있슴으로 모반의 뜻이 있다고 의심받았다. 573년 5월 후주로 부터 독약을 받아 자살했다. 이때 왕비인 정씨(鄭氏)가 "이제라도 폐하에게 해명을 못하나요 "라고 울면서 호소했지만, 고장공은 "이제 와서 어떤 호소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고 대답하였고, 재산을 부하에게 나누어 주었고, 아무말 없이 죽음을 당하였다.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가족관계편집

  • 정실: 왕비 정씨(王妃 鄭氏)
  • 후실: 수비 양씨(粹妃 梁氏)
  • 딸: 목염군주(穆念郡主)

평가편집

서진의 명사였던 반악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의 4대 미남으로 불릴 만큼 수려한 용모로도 유명하다. 낙양 방위전 당시에 혼전 중에 난입하여 성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투구를 벗고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원군으로 자신이 왔음을 알렸는데, 성안의 병사들이 한눈에 고장공을 알아보고 사기가 올라 대승을 거두게 된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용맹한 장군이지만, 음용겸미(音容兼美)를 갖추었다고 사서에 기록되었다. 과일을 하사 받았을때 장졸에게 나눠 주었다. 군공을 얻어서 황제로부터 20명 미녀를 하사받을때 부하 장병들에게 미녀들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겸허한 인물이기도 했다.

같이 보기편집

  • 란료오(蘭陵王) - 난릉왕 전설에서 비롯된 일본의 가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