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경기도 광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광주 안씨
廣州安氏
나라한국
관향경기도 광주시
시조안방걸(安邦傑)
집성촌경기도 하남시, 광주시
충청남도 천안시·보령시·부여군
전라북도 남원시·장수군
전라남도 화순군·곡성군
경상북도 영천군·청도군·경주시
경상남도 김해시·밀양시·함안군
주요 인물안성, 안완경, 안팽명, 안윤손, 안윤덕, 안사웅, 안민학, 안황, 안정복, 안유수, 안병훈, 안병길, 안강민, 안동수, 안경환, 안석환, 안희연, 안병현, 안은수
인구(2015년)48,033명

역사 편집

광주 안씨(廣州 安氏) 시조(始祖) 안방걸(安邦傑)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고, 광주군(廣州君)에 봉(封)해졌다고 한다.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삼국(三國)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廣州地方)의 향리(鄕吏)로 광주의 안정(安定)에 공적(功績)이 있어 대장군(大將軍)의 군직(軍職)을 가지고, 토성분정(土姓分定)에 의한 성씨(姓氏)를 안씨(安氏)로 스스로 가지고 광주(廣州)를 생활 근거로 거주하였으므로 후손(後孫)이 본관(本貫)으로 삼아 왔다.

분파 편집

광주 안씨(廣州 安氏)는 완귀공파(玩龜公派), 총랑공파(摠郞公派),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위위주부공파(衛尉注簿公派) 등이 있다.

  • 총랑공파(摠郞公派) - 안정(安禎)
  • 봉사공파(奉事公派) - 안덕개
  • 락도공파(樂道公派) - 안후개
  • 동주공파(東注公派) - 안세경
  •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 안국주(安國柱)
  • 진사공파(進士公派) - 안광
  • 불언재공파(不言齋公派) - 안영
  • 완귀공파(玩龜公派) - 안증
  • 사맹공파(司猛公派) - 안순
  • 사직공파(司直公派) - 안길
  •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 - 안준
  • 참봉공파(參奉公派) - 안세기
  • 도곡공파(道谷公派) - 안세국
  • 월호공파(月湖公派) - 안세택
  •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 안응구
  • 사간공파(思簡公派) - 안성(安省)
  • 주부공파(主簿公派) - 안철관
  • 서령공파(暑令公派) - 안철산
  • 감찰공파(監察公派) - 안종생
  • 판사공파(判事公派) - 안몽득(安夢得)
  • 봉사공파(奉士公派) - 안시명
  • 매죽헌공파(梅竹軒公派) - 안신명
  • 첨지공파(僉知公派) - 안귀명
  • 사헌공파(使憲公派) - 안휴명
  • 교리공파(校理公派) - 안주
  • 호군공파(護軍公派) - 안충(安沖)
  • 참의공파(參義公派) - 안숙인
  • 집의공파(執義公派) - 안숙신
  • 위위주부공파(衛尉注簿公派) - 안창(安昌)

세계 편집

  • 광주안씨 시조(始祖) 諱 안방걸(安邦傑) : 고려태조 때 광주군(廣州君) 고려대장군(高麗大將軍)
  • 2세 안국신(安國信) : 문하시중(門下侍中)
  • 3세 안여중(安礪仲) : 문하시랑(門下侍郞)
  • 4세 안보평(安輔平) : 내사시랑(內史侍郞)
  • 5세 안헌사(安憲思) : 첨의중찬(僉議中贊)
  • 6세 안무성(安武成) : 평장사(平章事)
  • 7세 안경립(安慶立) : 참지의사(參知議事), 묘가 양주 서면에 있다. (墓在楊州西面)
  • 8세 안석창(安石昌) : 중서령(中書令)
  • 9세 안필몽(安弼夢) : 내사령(內史令)
  • 10세 안홍미(安弘美) : 문하시중(門下侍中)
  • 11세 안익상(安益相) : 내의령(內議令)
  • 12세 안학성(安學成) : 내봉경(內奉卿)
  • 13세 안충계(安忠季) : 문하시중(門下侍中)
  • 14세 안유(安 綏) :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 15세 안지(安 祉) : 군기사판사(軍器寺判事), 광록대부(光錄大夫), 상호군(上護軍)
  • 17세 안충(安 忠) : 상호군(上護軍)
  • 21세 안숙신(安淑信) : 집의공(執義公)

인물 편집

  • 안성(安省, 1344년 ∼ 1421년) :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었다. 조선 개국 후 최초 청백리이며 영백, 해백, 한성윤, 강원도 관찰사, 좌참찬, 개성유휴를 거쳐 평양백하다. 관찰사 부임시 태종의 친필을 받았고 그 판각본이 현재 남아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 안완경(安完慶, ? ~ 1453년) : 1423년(세종 5) 식년문과 급제, 집현전 직제학, 중시(重試)급제, 부제학, 대사헌을 거쳐 충청감사 재임시 계유정난후 수양대군에 의하여 순절하다. 단종의 충신으로 강원도 영월 정충단(貞忠壇)에 부식하다. 호는 정암(貞庵)이다.
  • 안팽명 (安彭命, 1447년~ 1492년) : 안성(安省)의 손자. 1476년 문과급제, 통정대부, 지재교, 대사간, 대사성겸 춘추관 편수관하다. 청백리(淸白吏)에 록(錄)함.
  • 안윤손(安潤孫, 1450년 ~ 1520년) : 147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 안황(安滉, 1549년 ~ 1593년) : 1574년(선조 7) 문과에 합격하고, 1590년 사도시정(司䆃寺正), 1592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다가 1593년 의주로부터 환도하는 중도에 졸하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광양군(廣陽君)에 추봉되었으며, 뒤에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안정복(安鼎福, 1721년 ~ 1791년) : 역사학자, 실학자, 조선조 최고 역사서 동사강목 외 다수 저술. 광주안씨 경술보(1790년)서두에 변무(辨誣=거짓을 밝힘)글로 "안씨동원보(安氏同原譜=조선의 안씨들은 중국에서 온 이씨이다 라는 거짓 족보)에 후손들은 속지말라" 라고 경계함. 광성군에 봉해짐. 잡동사니(雜同散異)라는 책명은 명사가 되었다.
  • 안종화(安鍾和)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과 함께 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였다.‘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를 편찬했다.

현대 인물은 안병화(대종회장, 상공부장관), 안병규(국회의원), 안병태(서강대재단이사장), 안병훈(조선일보 편집국장), 안시환(삼성전자사장), 안병희(서울대교수, 문학박사), 안병준(연세대교수, 정치학박사), 안태원(경희대교수, 농학박사), 안상환(서울대교수, 철학박사), 안경수(대종회장, 재일교포중앙총본부고문), 안병근(대종회장, 재일교포), 안정수(독립운동가), 안학순(건국준비위원, 반민족재판소검사), 안제원(과도정부수반민정장관 비서관), 안필수(통일당당수, 민추협부회장), 안병대(대의원), 안일수(대의원), 안재권(전 부산시의원,구의원,평통자문위원), 안병진(평통자문의원), 안병도(대의원), 안철환(조선일보 편집부장), 안병선(매일경제기자), 안병훈(광안회보 편집주간), 안종숙(광안회보 편집위원), 안무진(광안회보 편집위원), 안경수(대통령표창포상), 안창수(농림부 이사관), 안길현(부이사관), 안식환(부이사관), 안신환(부이사관), 안롱(이사관), 안갑수(국립가축검역소소장), 안장수(부이사관), 안종백(해외주재영사), 안종립(서기관), 안충수(서기관), 안창수(보사부 참사관), 안현수(총경), 안택수(감사원감사관), 안태환(항만청 선박과장), 안종명(철도청기정), 안병립(건설부기정), 안병길(준장), 안종훈(준장), 안병호(수도방위사령관, 중장), 안석주(변호사), 안병태(변호사), 안종식(지방법원장), 안종년(지방검찰청장), 안종순(소년원원장), 안병희(변호사), 안병국(고법부장판사), 안강민(서울지검부장검사), 안영욱(검사), 안병상(대검공안과장), 안영문(판사), 안긍수(판사), 안종택(검사), 안경환(서울대교수, 법학박사), 안병열(안동대교수, 문학박사), 안희수(인하대교수, 법학박사), 안봉원(경희대교수, 농학박사), 안민수(서울대교수), 안택수(교대학장, 안동대교수), 안현수(교수), 안병민(교수), 안재구(경북대교수, 이학박사), 안종운(교수, 철학박사), 안삼환(경북대교수), 안재수(교수), 안재두(교수, 의학박사), 안병돈(교수), 안상환(서울대교수, 철학박사), 안재환(교수, 공학박사), 안인수(교수, 공학박사), 안재환(아주대교수), 공학박사), 안병걸(안동대교수), 안종윤(경북대교수, 철학박사), 안교환(교수), 안종석(성균관부관장), 안영환(교수), 안봉환(교수), 안세원(교수, 문학박사), 안종건(교수, 농학박사), 안종구(교수, 공학박사), 안효팔(교수, 문학박사), 안병기(서울대교수), 안상훈(서울대교수, 사회수석), 안철환(교수, 통계학박사), 안병대(연세대교수, 정치학박사), 안태환(교수), 안정환(교수), 안철환(교수), 안삼용(교수), 안병식(일본천엽공대교수), 안종수(한학자), 안종화(한학자), 안종덕(한학자), 안병훈(의학박사, 전세계정형외과학회회장), 안재원(의학박사), 안창수(의학박사), 안복훈(치과의사), 안재원(의학박사), 안진환(의학박사, 경희의료원), 안영수(중앙일보 부국장), 안종원(의학박사), 안경수(의학박사), 안병달(의학박사, 재일교포), 안굉수(삼성반도체상무), 안유수(에이스침대회장), 안응수(고등학교교장), 안종권(중학교교장), 안봉수(제일제당전무), 안종설(산호전자회장), 안윤수(동방건설기술공사대표), 안병현(농협대), 안은환(농협),안재승(교사), 안재민(현대자동차 연구원), 안재준(약사), 안세연(고등학교학생), 안현준(정부연구소 연구원), 안성은(한국자산관리공사 과장), 안태욱(행정주사보)씨 등이다.

과거 급제자 편집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안종록(安宗祿, 1566 丙寅生) : 문과(文科) 선조29년(1596)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욱(安旭, 1564 甲子生) : 문과(文科) 선조35년(1602)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안주(安宙, 1495 乙卯生) : 문과(文科) 중종23년(1528) 식년시 을과(乙科), 안대진(安大進, 1561 辛酉生) : 문과(文科) 선조19년(1586) 중시 병과(丙科), 안헌징(安獻徵, 1600 庚子生) : 문과(文科) 광해군13년(1621) 정시 을과(乙科), 안후석(安后奭, 1683 癸亥生) : 문과(文科) 영조2년(1726) 식년시 병과(丙科), 안효철(安孝轍, 1855 乙卯生) : 문과(文科) 고종24년(1887) 별시 병과(丙科), 안구(1855 乙卯生) : 문과(文科) 성종25년(1494) 별시 병과(丙科), 안한영(安漢英, 1855 乙卯生) : 문과(文科) 중종2년(1507) 증광시 병과(丙科), 안우(安宇, 1855 乙卯生) : 문과(文科) 중종19년(1524)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165명이 있다. 문과 45명, 무과 11명, 사마시 109명이다.

항렬자 편집

세(世) 32 33 34 35 36
항렬자(行列字) 경(景) 중(重) 효(孝) 원(遠) 종(鐘)

언(彦)

세(世) 37 38 39 40 41
항렬자(行列字) 수(洙)

하(河)

진(鎭)

병(秉)

석(碩)

영(榮)

○환(煥)

○문(文)

○엽(燁)

재(在)○

기(基)○

국(國)○

현(鉉)

호(鎬)

용(鎔)

세(世) 42 43 44 45 47
항렬자(行列字) 영(永)

태(泰)

한(漢)

근(根)

식(植)

표(杓)

연(然)

광(光)

사(思)

규(奎)

균(均)

식(埴)

석(錫)

진(鎭)

련(鍊)

세(世) 48 49 50 51 52
항렬자(行列字) 상(相)

동(東)

정(禎)

욱(煜)

변(變)

형(炯)

- - -

항렬자는 41世 현(鉉), 42世 영(永), 43世 근(根), 44世 광(光), 45世 균(均), 46世 진(鎭), 47世 준(濬) 영(永), 48世 동(東), 49世 섭(燮), 50世 규(奎), 51世 석(錫), 52世 순(淳), 53世 영(榮), 54世 훈(勳) 현(顯), 55世 찬(瓚) 규(圭), 56世 용(鎔), 57世 한(漢), 58世 상(相), 59世 우(愚) 열(烈), 60世 치(致), 61世 용(鏞) 찬(瓚) 규(圭), 62世 용(鎔), 63世 한(漢), 64世 상(相), 65世 우(愚) 열(烈), 66世 치(致), 67世 용(鏞)이다.

본관 편집

광주(廣州)는 서울 남부(南部) 일대(一帶)와 경기도(京畿道) 중부(中部)를 통칭(通稱)하는 옛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 13년(백제 온조왕 13)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불리어졌으며, 371년(근초고왕 25)까지 이곳을 한성(漢城)이라 하여 376년간 백제(百濟)의 도읍(都邑)이었다. 553년(성왕 31) 신라(新羅)에게 땅을 빼앗겨 신라(新羅)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756년(신라 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개칭(改稱)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주(廣州)로 고치고, 983년(성종 2) 광주목(廣州牧)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12절도사를 둘 때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에 예속(隸屬)시켰다.

1012년(현종 3)에는 안무사(按撫使)로 고쳤으며 1018년 목사(牧使)를 두었다. 1395년(태조 4) 광주목(廣州牧)으로 경기좌도(京畿左道)에 편입(編入)되었다. 1505년(연산군 15) 주를 폐하였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광주부(廣州府)로 승격(昇格)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광주군(廣州郡)이 되었다. 1979년 광주면(廣州面)이 읍(邑)으로 승격(昇格)한 이후(以後) 1989년 동부읍과 서부면이 하남시로 통합(統合), 독립(獨立)하는 등(等) 규모(規模)는 축소(縮小)되었다. 2001년 광주군(廣州郡)이 광주시(廣州市)로 승격(昇格)하였다.

대종회 편집

광주안씨 대종회 소재지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선왕동의 봉산재(逢山齋)이다

광주안씨는 시조로부터 14세인 전중시어사 휘 유(綏)공이 경상남도 함안(咸安)으로 이거(移居)하였고, 이후 모든 광주안씨 후손들은 함안에서 전국으로 확산하였으며,경기도 광주의 갈마치(시조의 무덤이 있다는 산)아래 텃골(德谷)과 인근에도 세거지(世居地=집성촌)가 있으며, 매년 춘향제(春享祭)는 경남 함안군 선왕동의 봉산재에서 모신다.

인구 편집

  • 2000년 43,609명
  • 2015년 48,033명

집성촌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