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덕

김만덕은 조선의 상인이다.

김만덕(金萬德, 1739년 ~ 1812년)은 조선상인이다.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사온 을 모두 진휼미로 기부하여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의녀(義女) 김만덕으로 불린다.

김만덕
金萬德
본명김만덕
다른이름없음
출생1739년 (영조 15)
조선 조선 전라도 제주목
(대한민국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사망1812년 (순조 12)
제주도
사인미제
성별여성
본관김해
별칭거상(巨商), 의녀(義女)
직업상인 · 기업인
부모아버지 : 김응렬(金應悅)
어머니 : 고씨
가족오빠 : 김만석(金萬碩)
동생 : 김만재(金萬才)

인생편집

가계편집

김만덕은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15세손이다. 제주 입도조 김만희(金萬希)가 조선 개국에 협력하지 않아 제주로 유배를 와 스스로 "고려유민" 칭하며 제주 삼절신(三節臣) 불리며 이곳 제주 곽지리에 정착했다. 그의 6세손 절충장군을 지낸 김후찬(金厚瓚)은 김만덕의 선조이다.

유년시절과 상업 활동편집

김만덕은 김응렬의 딸로 제주 성내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를 잃고 12세에 고작 되었다.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만덕은 나이든 기녀의 집에 의탁하였다. 어른이 된 후, 만덕은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임을 알게 되어,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良人)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 미역, 말총, 양태(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을 많이 벌었다. 이앙법(모내기)의 등장으로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도 같이 발전한 18세기 조선의 시대 변화를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편집

1793년 제주도에서는 세 고을에서만 6백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흉년이 들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었다.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이 없으면 장차 제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받자, 2만 섬의 구호식량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1795년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을 사왔는데, 이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했다.

전 재산을 풀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의녀(義女) 만덕의 알현을 받은 정조가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천백여 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하다.”라고 칭찬한 것을 보면 당시 만덕의 선행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듬해인 1796년 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는데, 만덕은 한양에서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대답을 들은 정조는 “관의 허락없이 제주도민은 섬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또한 내의원 차비대령행수(內醫院 差備待令行首)로 삼아 정조를 알현할 자격을 주고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1]

1812년(순조 12) 10월 사망한 후 한 달 뒤에 ‘구묘비문(舊墓碑文)’이 세워졌다. 김만덕이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난 1840년(헌종 6)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김정희는 김만덕의 양자 김종주(金鍾周)에게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졌다.’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주었다.

사후편집

1812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만덕의 묘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조성되었으며,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모충사로 이묘되었다. 김만덕 묘비(金萬德 墓碑)는 2007년 1월 24일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김만덕 사망한 1812년(순조 12)에 세워져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문에는 김해 김씨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수로왕 후손뿐만 아니라 경순왕 후손의 일부도 본관을 김해로 썼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1846년(헌종12)에 국왕의 윤허를 받아 후김은 경주 김씨로 썼다.

상훈과 추모편집

1812년(순조 12) 10월 사망한 후 한 달 뒤에 ‘구묘비문(舊墓碑文)’이 세워졌다. 김만덕이 사망한 지 30여 년이 지난 1840년(헌종 6)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김정희는 김만덕의 양손 김종주(金鍾周)에게 ‘은혜의 빛이 길이 빛나리’는 뜻의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주었다.[2]

김만덕이 등장한 작품편집

현재 제주도에서는 만덕상을 제정, 한라문화제 때마다 모범여인에게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선행을 기념하고 있다.

드라마편집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 김성순(金性淳)
  • 조부 : 김영세(金永世)
    • 백부 : 김응선(金應先)
    • 중부 : 김응남(金應南)
    • 숙부 : 김응신(金應信)
    • 아버지 : 김응렬(金應悅) (1721년 ~ 1758년)
    • 어머니 : 제주 고씨(濟州 髙氏)
      • 오빠 : 김만석(金萬碩) (1728년 ~ 1748년)
        • 조카 : 김성집(金聲集)
        • 종손 : 김시채(金時采) - 김만덕이 양손으로 삼다.
      • 동생 : 김만재(金萬才)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일성록 정조 20년 11월 25일 세번째 기사.[1]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