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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문(金梵文, ?~825년)은 신라의 왕족이다.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주원(周元), 아버지는 김헌창(憲昌)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다.[1]

헌덕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 825년 고달산(高達山)에서 초적의 괴수 수신(壽神) 등 100여 인과 더불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평양(平壤)[주 1]에 정하려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였으나, 북한산주도독 총명(聰明)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고 죽었다.[1]

김범문 반란의 의미편집

신라 중대에서 하대[주 2]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 신라 하대는 귀족연립적 경향을 걷게 된다. 이에 대한 반동이 822년 일어난, 김헌창의 난이다. 이 난은 무진주, 완산주, 청주(菁州), 사벌주 등의 넓은 지역에서 호응을 받았으나,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김범문이 또다시 귀족연립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서[2] 한산(漢山)에 도읍을 정하고 반란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2][3]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을 왕권을 잃어버린 무열왕계 후손의 저항으로 묶어 보기도 한다.[3]

김헌창의 난이 진압되고 그의 종족과 도당이 처형당했는데, 어떻게 김범문이 그 화를 면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다만, 별다른 지역 연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옛 고구려 지역으로 달아나 여주 지역으로 추측되는 고달산의 도적 수신에게 의탁한 것이 사실이다. 거기서 3년을 지내면서 신라 정부에 대한 옛 고구려 지역 주민의 불만을 확인하고 이를 이용해 반란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4]

삼국사기의 김범문 관련 기사 중 ‘수도를 세우고자’ 한 부분을 주목하면, 새로운 국가 건설 기도라는 점에서 반란의 성격이 김헌창의 난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5] 결국, 김범문의 난은 김헌창의 난과 더불어 호족의 지방할거적 경향을 촉진시켰으며,[6] 왕위계승전을 가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5]

같이 보기편집

주해편집

  1. 여기서의 평양은 이른바 남평양(南平壤)으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이다. 참고 문헌의 주 229
  2. 선덕왕나물왕의 12대손이라고 했다. 그 뒤 왕계는 모두 원성왕의 계통에서 나온다. 이렇게 중대에 왕위를 이어 오던 태종무열왕계가 끊어지고, 원성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는, 원성왕 이후를 보통 신라 하대라 부른다.[2]

각주편집

  1. 김범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이기백 (2012년 2월 15일). 《한국사신론》 1판. 일조각. 111-112쪽. ISBN 9788933703458. 
  3. 한영우 (2013년 4월 1일). 《다시 찾는 우리역사》 전면개정판. 경세원. 184쪽. ISBN 8983410574. 
  4. 황선영 (1988년 12월). “신라 하대 김헌창 난의 성격”. 《역사와경계》 35: 12-13쪽. 
  5. 이명식 (1984). “신라 하대 김주원계의 정치적 입장”. 《대구사학》 26: 73-74. 2017년 12월 29일에 확인함. 
  6. 이기백 (1974).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57쪽. ISBN 9788933701041.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