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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1905년)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용주(金龍周, 일본식 이름: 金田龍周(가네다 류슈), 호(號)는 해촌(海村), 1905년 7월 29일 ~ 1985년 1월 27일)는 일제 강점기대한민국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하였고 경상북도 영일에서 성장하였다.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아버지다.

해촌 김용주
海村 金龍周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05년 7월 29일(1905-07-29)
대한제국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사망 1985년 1월 27일(1985-01-27) (79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본관 김해(金海)
학력 부산제이공립상업학교 졸업
직업 기업가
외교관
정치가
친일파
경력 대한해운공사 사장
전남방직 사장
민주당 원내총무
민주당 참의원
전남방직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
마산대학교 초빙교수
포항수산초급대학 특임강사
배우자 강정순(사별), 강신팔(사별), 방연숙(삼혼)
자녀 슬하 4남 1녀
종교 유교(성리학) → 불교천주교(세례명:바오로)
의원 선수 1
정당 무소속

목차

생애편집

일제강점기[1]편집

  • 1923년 조선식산은행[2] 본점 취직, 6개월 만에 포항지점으로 전출. 경북 영일군 포항읍 이주 정착.
  • 1924년‘영일청년회’ 지육부장, 독서회 조직 및 노동야학 개설. 이후 교사로 참여.
  • 1926년 삼일상회(三一商會, 철도화물운송업) 설립 “삼일 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뜻에서 붙인 것인데, 일찍이 민족의식에 눈떠 청년운동에 열중했던 나의 심혼을 표시한 그 상호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민족적인 인상을 풍기었다. ”[3]
  • 1926년 5월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5.28), 검사분국으로 송치(5.30)됐으나 같은 날 무사방면 출처 : 시대일보(時代日報) 1926년 6월 3일 2면
  • 1927년 7월 22일 신간회 영일지회 정치부 간사[4]
  • 1936년 3월 포항 영흥학교 인계 경영 및 교장 취임[5]
  • 1936년 9월 20일 경상북도 포항읍회 의원(민선) 당선[6]
  • 1937년 5월 10일 경상북도 도회의원(영일군, 민선), 1941년 5월 재선, 1945년 해방때까지 도회 의원 유지[7]
  • 1940년 2월 23일 “국체명징관[8] 내에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한다고 발언 – 12회 경북도회 회의[9]
  • 1940년 2월 24일“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으므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 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 줄 생각한다”고 발언 – 제12회 경북도회 회의
김용주씨 (포항) 반도인은 황도정신에서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으므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줄 생각한다.[10]

— 매일신보 1940년 2월 26일

  • 1940년 11월 10일 일본 기원 2600년 축전[11] 기념식전 및 봉축회 초대받고 축전기념장을 받음}}
  • 1941년 친일파 김갑순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신문사에서 발행한 “광영록”에 김용주 수록
  • 1941년 9월 일본동맹통신사에서 발행한 “흥아일본건국사”에 김용주 수록
  • 1941년 5월 17일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12] 이사 선임
水産團體도 結合, 翼贊體制를 整備, 慶北聯盟 結成式 擧行(수산단체도 결합, 익찬체제를 정비, 경북연맹 결성식 거행)[13]

— 매일신보 1941년 5월 20일 석간 3면

  • 1941년 7월 16일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12] 평의원, 도회의원 자격으로 임명
1) 總力慶北聯盟, 新道議 網羅 後 最初 常會, 中心論題는 生活新體制(총력경북연맹, 신도의 망라 후 최초 상회, 중심논제는 생활신체제)
2) 道會議員を評議員に加へ, 慶北, 聯盟役員の常會を開へ(도회의원을 평의원으로 가입, 경북, 연맹역원의 상회를 개최)[14]

— 1)매일신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3면 2)경성일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2면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참여 주요 인물[17]
지부장 : 장직상(중추원 참의)
이사장 : 신옥(신현구) 중추원 참의
상임이사 : 서병조(중추원 참의) 문명기(중추원 참의), 정해붕(중추원 참의), 김용주 등
  • 1941년 10월 8일 ~ 10일 친일파 문명기(중추원 참의)와 함께 영덕영천 지역에서 개로운동을 독려, 국민개로운동[18] 의 취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불노유한 무직자(不勞有閑無職者) 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전시체제와 개로체제를 확립하도록 되었다.[19]
  • 1941년 12월 7일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임명 및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
1) 臨戰報國團 慶北支部設立, 結成은 卄九日擧行(임전보국단 경북지부설립, 결성은 29일 거행)
2) 一死報國을 盟誓, 臨戰報國團 慶北支部 結成式, 七日, 盛大하게 擧行(일사보국을 맹서,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 7일, 성대하게 거행)[20]

— 1)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11월 24일 3면 2)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 석간 3면

  • 1942년 1월 10일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사업부장 임명
大邱府民號十機! -臨戰報國團 支部와 協力實現에 邁進(대구부민호 10기! -임전보국단 지부와 협력실현에 매진)[21]

— 매일신보 1942년 1월 12일 2면

  • 1942년 2월 27일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미국영국을 격멸할 군용기 5대 헌납
기사에는 임전보국단 경북지부의 단체명이 나오지만, 김용주 등 경북지부 간부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임보단서도 활동. 경북서 5기를 헌납 경북 영일군은 애국기 헌납에 압도적인 성과를 보인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2달 후인 1942년 2월 경북 영일군에서만 총 8대의 군용기가 헌납되었다. 경북지역에서 2월말까지 30대 가량 헌납된 것을 감안하면 일개 군 단위의 실적으로는 놀라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이후 8월말까지 전국에서 헌납된 비행기는 280여대에 달했다. 도청소재재지가 아닌 지방에서 헌납기 명명식이 거행된 곳은 5대 이상의 실적을 올린 함남의 원산과 경북의 영일 단 두 곳이었다.[22]

— 매일신보 1942년 2월 27일 석간 3면

  • 1942년 3월 11일 “북지방면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밤낮으로 악전고투를 계속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도민을 대표하여 감사전보를 발송하자”고 제안 – 제15회 경북도회 회의
尨大 豫算을 俎上에, 慶北道會 開幕(第15會), 劈頭 感謝電報 發送을 決議(방대 예산을 조상[도마 위]에, 경북도회 개막(제15회), 벽두 감사전보 발송을 결의)[23]

— 매일신보 1942년 3월 13일 경상판 석간 3면

  • 1943년 9월 8일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뜻을 결의하기 위한 광고를 기명으로 게재
광고 왼쪽 아홉 번째 줄 金田龍周(가네다 류슈) 게재

(廣告)待望의 徵兵制 實施,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半島의 靑少年들이여((광고)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난폭하기 짝이 없는 숙적 미영을 지금이야말로 물리쳐 멸망시키자. 징병제 실시에 대한 반도 동포의 간절한 요망을 드디어 구현했다. 반도 동포도 내지 장병으로 자리매김하여 당당히 대동아전쟁의 전열에 끼게 된 것이다. 우리 반도의 정예여. 일시동인의 천황의 위덕(大御稜威) 아래, 우리 반도의 인재가 빈틈없는 전우애로 미영 격멸의 전선에 서는 날이 온 것이다. 이 기쁨, 이 감사, 시정 30여년 역사에 전례가 없는 대전환이며 영광이다. 지금은 세계 대동란이 한창인데,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내걸고 대동아의 천지에 깊숙이 진군하여 황국의 흥폐를 양 어깨에 짊어진 황군이 숙적 미영 격멸에 혁혁한 전과를 거듭하는 가을. 2천 5백만 반도동포, 특히 젊은 반도청년에 거는 기대가 실로 크다. 일억의 환호와 축복속에 있는 반도의 젊은이들이여. 궐연히 일어나라! 결전이 자네들을 부른다.”[24]

—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남선판(南鮮版) 1943년 9월 8일 4면, 아사히신문 중선판(中鮮版) 1943년 9월 8일 4면

  • 1943년 10월 2일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 경북도회 의원 40명 가운데 조선인 참석은 2명. 친일파 서병조와 함께 김용주 참석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정신문화를 키워온 신사(神祠)를 건립해 감사의 뜻을 발휘해야 한다”고 발언.

銃後의 戰列에 總立, 第二日 公職者大會에 滅敵의 熱火漲溢, 各議員들의 熱論(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2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맹렬히 넘치다] 각 의원들의 열론[열띤토론])

가네다 류슈(경북도회 의원)씨가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정신문화의 양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 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귀축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25]

—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석간 2면

  • 1943년 10월 2일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해 징병독려, 천황께 귀일 등 발언,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5가지 구체적인 방안 발언, 특히 일본에 강제 징용 될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반도의 부모가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발언.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그 구체적 방책으로 다음 5가지 항목을 들고 싶습니다. 첫째, 각 면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신을 공경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면 일본정신의 진수에 철저히 젖어들게 할 수 있습니다…(중략)그러므로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 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여 현세의 신이신 천황께 귀일하는 것입니다.[26]

— 징병제시행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

  • 1944년 7월 9일 일제에 전투 비행기 헌납 선전 광고 기명 게재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라는 제목의 비행기 헌납 광고 기명 게재

왼쪽 두 번째에 金田龍周(가네다 류슈) 이름 나옴.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

시국은 확실히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의 한 가운데로 돌입하고, 더욱이 적은 공군으로써 승패를 결정지으려고 한다. 이때를 맞이하여 우리는 혁혁한 전과의 그늘에서 산화한 고귀한 영령 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적의 맹렬한 공습하에서 묵묵히 (조국)수호에 애쓰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우리 형, 우리 동생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그리고 “좀더 비행기를”이라고 외치는 필사의 요청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27]

— 아사히신문 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

광복 이후편집

김용주는 1950년 국회에서 재일교포에 대해 "추잡한 행동을 해서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주일공사(현 주일대사)였던 김 전 회장은 일본 교포사회에 대해 '밀주(密酒) 유통을 일삼는 암취인(闇取引·불법 상거래시장)', '공산주의자' 등으로 표현하며 일본 내 반한(反韓) 감정의 책임을 교포 탓으로 돌렸다. 반면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머리를 숙여야 할" 대상으로 지칭했다.[28] 1950년 5월 6·25 전쟁 직전 김 전 회장은 이승만 정부로부터 주일공사에 임명됐다.

김용주는 1961년 의회에서 일본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 '친일' 비판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재일교포 국적 박탈과 강제 퇴거 등에 대한 그의 '일본 옹호' 발언은 1961년 1월24일 참의원 회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재일교포의 '강제 퇴거'를 추진해 우리 정부와 갈등 중인 상황에서 한인들을 "생활을 못해서 가 있는 사람들"로 규정하는 등 상식과 동떨어진 발언을 해 강한 반발을 샀다.[29] 1960년 4·19 혁명 직후 국회는 양원제였고, 김용주는 상원(上院) 격인 참의원의 민주당(당시 여당·5.16군사 쿠데타로 해산) 소속 초선 의원이었다.

김무성 측은 2015년 11월 1일과 3일 두 차례에 걸쳐 노컷뉴스에서 보도된 “김무성 부친 1961년 의원시절 친일 발언 확인”, “김무성 부친 김용주 1950년엔 재일교포 추잡한 사람들”이라는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보도를 요청했고 2015년 12월 9일 기재됐다.[30]

논란편집

김용주의 가족들은 김용주의 일제강점기 행적에 대해 알려진 내용들은 모두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일절 부인하고 있다.[31]

주요 논란에 대한 반박편집

친일 행적에 대한 반박

192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치안유지범으로 일제에 검거되기도 했고 신간회 활동, 조선인을 위한 학교 인수, 도회의원으로 총독부에 맞선 발언 등이 수십 건 근거로 남아 있다.[31]

징병제 실시 찬양 및 전쟁 동원 선동에 대한 반박

1943년 10월 열린 전선공직자대회(매일신보 보도)에서 김용주는 “가장 급한 일은…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며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받들어 모시어질 영광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용주의 가족은 “1940년 경북도의회 재선 이후 ‘전국에 단군묘(檀君廟) 건립’ 주장을 내세우다 고초를 겪는 등 민족운동을 이어갔다”고 주장한다.[31]

일제 패망 당시 ‘살해 대상 1호’에 대한 반박

김용주의 가족은 그가 반일 행적으로 인해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포항 지역 총살 대상 1호였다고 주장한다. 조선 계엄령 발포 시 지역 내 주요 조선인 8명의 총살 지시가 일본국 사령부로부터 내려왔다는 것. 이런 내용은 지난 8월 출간된 김용주 평전 ‘강을 건너는 산’에도 등장한다.[31]

민족문제연구소의 재반박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가 전해 들은 얘기를 본인 회고록과 평전에 인용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일축한다.[31]
조선인을 위한 학교 인수 및 야학의 성과

평전에 따르면 김용주는 29세이던 1933년 존폐 위기에 처한 포항 영흥학교를 인수, 교장직을 겸하고 훈육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1936년 2월 8일자에는 ‘최경성 교장 등이 진력하였으나 (학교) 경영난은 최후 결정에 달하였다는데…’라고 나와 운영 시기가 엇갈린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이며, 일본어도 가르친 야학을 애국야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조선어 금지, 신문폐간 등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당시 상황을 전혀 무시한 초보적인 지적”이라고 반박한다.[31]

비행기 헌납운동

1944년 7월 아사히신문은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광고주 명단에 김용주 이름을 올렸다. 또 1942년 2월 매일신보에 따르면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에서 군용기 헌납에 27만원을 모금했다.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일제 말기인 1940년대는 본인 의사와 관계없는 동원 기사·광고가 많이 나왔으며, 놋수저 하나까지 징발됐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한다.[31]

'변절자'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김용주가 청년기엔 민족의식을 보였고 신간회·청년단체 독서회 활동 등은 인정되지만,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부터 완전히 돌아섰다. 이에 대해 김용주의 가족은 “1926년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삼일상회 설립, 1938년 강제 면화재배 정책에 대한 국가 보상 요구 등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구국활동을 했다”고 부인하고 있다. 1940년 1월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용주가 영흥 학교에 사재 2만원을 기부하는 등 민족운동을 유추할 만한 증거들도 나온다.[31]

당시 매일신보의 신빙성

민족문제연구소는 주요 증거로 활용한 매일신보에 대해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자매지였다고 해서 사료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친일인사 1006명의 명단을 발표했을 때도 매일신보를 주요 사료로 삼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김용주의 가족은 “당시 당사자 동의 없는 강제 기고, 허위사실 수록에 대한 증언이 많아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31]

친일인명사전 등재에 대한 논박

김무성은 “연구소가 10년 동안 300만여건을 검토했다던 사전에 여태껏 등재하지 않다가 김 대표가 여당 대표가 되고 나니 태도를 바꿨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재반박
“2009년 첫 출간 당시 자료 부족으로 해외·지방 친일반민족행위를 전면조사할 수 없었다”며 “김용주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보류했고 발간된 개정판에는 누락됐던 인사가 다수 등재될 것”이라고 답변했다.[31]
한겨레와의 소송

<한겨레>가 2015년 8월1일치 토요판에 ‘김용주 아들 김무성’(온라인 제목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32] [33]을 싣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부친의 친일 행적을 보도한 <한겨레>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과 반론보도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34] 서울중앙지법 민사25부(재판장 이흥권)는 2016년 10월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한겨레>를 상대로 낸 반론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김무성 전 의원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보도한 <한겨레>가 반론보도를 낼 필요가 없다고 법원이 판단했다.[35]

동명이인편집

애국활동 사례 22개 중 2개는 동명이인

김용주는 1931년 6월 동아일보에 ‘충무공 유적 보전을 위한 성금 일급 시전을 냈다’고 나와 있다. 또 같은 해 11월 재만피란동포 위호금품(만주 동포를 위한 성금모금)으로 일금 삼십전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기사에 충무공 성금을 낸 이는 ‘마산 거주 김용주’로 나온다. 포항에서 활동했던 김용주와 동명이인이라는 반론이다. 만주동포 성금 기부자도 ‘경성부 애우수소양소년회 김용주’로, 서울 소년단체에 김용주가 가입되었을 리 없어 서로 다른 이라는 주장이다.[31]

저서편집

  • 《풍설 70년》

가족 관계편집

각주편집

  1. 박중석 (2015년 9월 17일). “김무성父 김용주, ‘일제군용기 헌납, 징병독려’ 광고”. 뉴스타파. 2015년 11월 30일에 확인함. 
  2. 조선식산은행 : 1918년 설립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
  3. 김용주 회고록 “풍설시대80년” 중
  4. 조선일보(朝鮮日報) 1927년 7월 25일 2면, 중외일보(中外日報) 1927년 7월 27일 4면
  5. 동아일보(東亞日報) 1936년 3월 24일 4면
  6. 매일신보 1936년 9월 22일 조간 4면
  7.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7월 6일, 매일신보 1937년 5월 12일 석간 1면, 매일신보 1941년 5월 12일 석간 2면
  8.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 :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정신(皇道精神)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
  9. 동아일보 1940년 2월 27일 자 석간 7면
  10. 매일신보 1940년 2월 26일
  11. 일본 기원 2600년 축전(紀元二千六百年祝典) : 1940년 11월 일본 도쿄와 조선총독부 등에서 열린 {{인용문|일본기원 2600년 기념식전 및 봉축회, 일본은 전시체제를 맞아 일본의 위대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12.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산하 지방 조직
  13.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5월 20일 석간 3면
  14. 1)매일신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3면 2)경성일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2면
  15. 日本同盟通信社, 1941.9, 330~332쪽 (皇統[皇紀]二千六百年記念誌)興亞日本建國史 ; 朝鮮銃後奉公錄
  16.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 일제가 침략전쟁을 진행하면서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조선인 민간조직
  17. 朝鮮臨戰報國團發起人•役員 名簿, “朝鮮臨戰報國團槪要” 27쪽
  18. 국민개로운동 :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선인의 노동력동원을 목적으로 조선인의 근로보국을 주장하면서 실시한 운동
  19. 매일신보 1941년 10월 7일 경상판 조간 3면
  20. 1)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11월 24일 3면 2)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 석간 3면
  21. 매일신보 1942년 1월 12일 2면
  22. 매일신보 1942년 2월 27일 석간 3면
  23. 매일신보 1942년 3월 13일 경상판 석간 3면
  24.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남선판(南鮮版) 1943년 9월 8일 4면, 아사히신문 중선판(中鮮版) 1943년 9월 8일 4면
  25.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석간 2면
  26. 徵兵制施行感謝 敵米英擊滅 決意宣揚 全鮮公職者大會記錄(징병제시행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 全鮮公職 者大會事務局(전선공직자대회사무국) 1944년 1월(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27. 아사히신문 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
  28. “[단독] 김무성 부친 김용주 1950년엔 "재일교포 추잡한 사람들". 노컷뉴스. 2015.11.03. 
  29. “[단독] 김무성 부친 1961년 의원시절 '친일 발언' 확인”. 노컷뉴스. 2015.11.01. 
  30. “<반론 보도문>”. 노컷뉴스. 2015.12.09. 
  31. 이재연, 한재희 (2015년 11월 7일). “민족문제연구소측 “황국신민 되겠다던 기사 있다” 김무성 대표측 “단군묘 주장해 고초 겪었다””. 서울신문. 2015년 11월 30일에 확인함. 
  32.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한겨레. 2015.08.01. 
  33. “김무성의 집안…적산기업 불하 받아 전남방직 만들어”. 한겨레. 2015.08.01. 
  34. “아버지 김용주의 발언이 가장 길고 고약했더라”. 한겨레. 2015.11.29. 
  35. “법원 “한겨레, 김무성 부친 친일행적 반론보도 필요 없다””. 한겨레. 2016.10.27. 

외부 링크편집

  전 임
(신설)
제5대 참의원(경상남도 제1부)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무소속
안호상, 오위영, 설창수
후 임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