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조씨
김제 조씨(金堤 趙氏)는 대한민국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관향이다. 시조 조연벽(趙連璧)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나라 |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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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
시조 | 조연벽(趙連璧) |
집성촌 |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월촌면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이평면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화촌면 |
주요 인물 | 조간, 조의, 조필달, 궁인 조씨, 조동선, 조내헌, 조기담, 조상선, 조균, 조철권, 조상래, 조통달, 조은주, 조관우, 조휘, 조율 |
인구(2015년) | 19,249명 |
기원
편집조풍(趙風)의 후손 조세주(趙世胄)가 중국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다가 오계(五季)의 난을 피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역사
편집시조 조연벽(趙連璧)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김제조씨세보에 따르면 그는 1232년(고종 19년) 몽골 장수 살리타가 침략했을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소탕한 공으로 벽성군(碧城君, 김제)에 봉해졌고,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인물
편집- 조간(趙簡) : 1279년(충렬왕 5)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서적점녹사(書籍店錄事)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왕이 문신들에게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또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황패(黃牌)를 받고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88년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왕명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점차 올라 보궐(補闕)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자, 왕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기거주(起居注)로 특진시켰고, 다시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서 경상안렴사(慶尙按廉使)에 보임되었다. 1298년에는 좌사의(左司議)로 과거를 주관한 바 있고, 1300년 좌부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 부고시관)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그 뒤 좌간의·좌승지를 거쳐 우상시권수밀직부사(右常侍權授密直副使)에 올랐다. 충선왕 때 형조시랑우간의대부(刑曹侍郎右諫議大夫)를 거쳐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충숙왕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역임한 뒤 찬성사에 올라 별세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조선 영조 때 유광익(柳光翼)의『풍암집화(風巖輯話)』에도 수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양(文良)이다.
과거 급제자
편집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없고, 무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1]
- 고려 문과
조간(趙簡)
- 무과
조계방(趙繼方) 조관영(趙觀𨥭) 조숙(趙䃤) 조안효(趙安孝) 조여기(趙汝器)
- 생원시
조광언(趙光) 조극눌(趙克訥) 조기완(趙器完) 조기전(趙器全) 조기중(趙器重) 조대헌(趙大憲) 조덕홍(趙德弘) 조수곤(趙壽崑) 조홍진(趙弘震)
- 진사시
조극신(趙克信) 조기전(趙器全) 조길인(趙吉仁) 조덕희(趙德禧) 조몽간(趙夢簡) 조방순(趙方淳) 조상로(趙相老) 조성립(趙成立) 조완벽(趙完璧) 조응헌(趙應巚) 조중립(趙中立)
항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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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편집- 2000년 14,509명
- 2015년 19,249명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
편집- 광해군후궁 궁인 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