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연(盧演, ?~?)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교하(交河)이다. 노책(盧頙)의 증조이다.
1229년(고종 16) 2월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로 재직 중 동진국(東眞國) 사람이 함주(咸州)에 도착해 화친을 요청하자 왕명으로 그 조건을 듣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5월에 돌아온 후 동계부방장군(東界赴防將軍) 김중온(金仲溫)이 노연이 겁을 먹어서 동진국과 화친을 맺지 못했다고 상소했으므로, 노한 최우(崔瑀)에 의해 가구소(街衢所)에 수감되었다.
1239년(고종 26)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서 첨사부주부(詹事府注薄) 김겸(金謙)과 함께 표문을 받들고 몽골에 사신으로 갔으며[1], 이듬해 몽골 사신 7명과 함께 귀국했다.
1248년(고종 35)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서 북계에 있는 여러 성의 백성들을 모두 이주시킨 다음 바닷섬으로 입보(入保)하게 했다.[2]
이후 관직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지제고(知制誥)에 이르렀다.[3]
- 조부 - 노충악(盧冲鶚)[4] : 상장군(上將軍)
- 아버지 - 노중모(盧仲眸)[4] :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
- 아들 - 노경륜(盧景倫)[4] : 판도총랑(版圖摠郎)[5], 노책(盧頙, ? ~ 1356년)의 조부
- 사위 - 권단(權㫜, 1228년 ~ 1311년) : 도첨의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판판도사사(判版啚司事), 문청공(文淸公)
- ↑ 『원사』에는 노연의 관직이 예빈경(禮賓卿), 김겸의 관직이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기록되어 있다.
- ↑ 『고려사』 「고종세가」
- ↑ 『권단 묘지명』
- ↑ 가 나 다 『씨족원류』
- ↑ 『씨족원류』의 원문에는 '민부총랑(民部總郞)'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인 듯하다. 판도사(版圖司)는 1298년(충렬왕 24) 민조(民曹), 1308년(충선왕 즉위년) 민부(民部)로 명칭이 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