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에코타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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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에코타 조약(Treaty of New Echota)은 미국 조지아주의 뉴에타코에서 미국의 정부 관리와 체로키족 소수의 정치 지도자 간에 맺어진 협약이다. 이 조약은 1836년 개정되어 비준되었다. 이 조약은 전 체로키 국가가 인디언 준주가 있는 서부로 이주한다는 내용이 담긴 조약이다. 이 조약이 체로키 국가 위원회에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었고, 법적인 효력을 갖는 “눈물의 길”이라는 강제 이주를 집행하게 된다.

배경 편집

1820년대 말, 체로키 국가의 영토는 테네시주, 앨라배마주,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조금씩 걸친 조지아주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약 16,000명의 체로키 부족민들이 이 영토에서 살고 있었고, 일부는 현재의 텍사스주아칸소주로 이주를 했다. 1826년 조지아 주의 입법부가 존 퀸시 애덤스 정부에게 이주 조약을 협의하라고 요구하였다. 인디언 주권을 옹호하고 있었던 애덤스는 처음에는 거부를 했지만, 조지아 주가 당시의 조약을 무효화하려고 위협하자, 그는 체로키에서 협상을 위해 접근하였다. 이주 협상이 진전 없는 진행되던 일 년 후, 1828년 이주를 옹호하는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 직후 조지아 주는 무효화 위협을 행사했다.

협상 편집

앤드루 잭슨18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됨에 따라, 체로키 족에서 가장 집요하게 이주 반대를 주장하던 사람도 그 입장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체로키 족의 메이저 릿지가 이끄는 그 아들 존 릿지와 조카의 일라이어스 부디놋, 그리고 스탠드 와티는 "릿지당" 혹은 "조약당"이라는 당파를 만들었다. 릿지당은 백인 불법 거주자 또는 주 정부와 폭력 투쟁으로 사태의 악화되기 전에 미국에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 내는 것이 체로키 족에게 더 이익이 된다고 믿었다. 존 릿지는 1820년대 후반에 잭슨의 관료들과 비공식 대화를 시작했다. 한편, 체로키 족의 이주를 예측하고, 조지아주 체로키 땅을 시민에게 분할 분배하기 위해 개최하는 추첨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체로키 족이 선택한 존 로스 수장과 기타 다수의 인디언들은 이주를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로스 수장은 1832년 부족 선거를 취소하고, 릿지당을 규탄하면서 그 당원 한 사람을 죽였다. 릿지당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체로키 족의 일부만을 대표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사건으로 체로키 족을 두 개로 분열되었고, 서부 체로키 족은 메이저 릿지가 이끌었고, 동부 체로키족은 존 로스 수장을 체로키 족의 수장으로 인정하였다.

1835년 잭슨은 존 F. 셔머혼 목사를 조약 교섭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의 이주를 대가로 450만 달러를 지불한다는 제안을 했다. 이 조건은 1835년 10월 체로키 위원회에 의해 거절되었다. 로스 수장은 자신이 관리하는 부족과 릿지당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존 릿지와 함께 새로운 협상을 위해 워싱턴 DC에 갔다가 셔머혼과 협상하도록 외면당했다.

비준 편집

그동안 셔머혼은 조지아 주의 뉴에코타에서 이주찬성파와 위원회를 구성했다. 수천 명의 체로키 부족 중 불과 500명이 소집에 참석하였고, 1835년 12월 30일, 메이저 릿지와 일라이어스 부디놋을 포함하여, 체로키 족의 이주를 찬성하는 21명이 《뉴에코타 조약》에 서명하거나 서명의 대용을 의미하는 "X" 표시를 남겼다. 존 릿지와 스탠드 와티는 조약문이 워싱턴에 돌아왔을 때 서명했다. 로스 수장은 예상대로 서명을 거부했다. 서명한 사람은 1829년 존 릿지가 기초를 하여 제정한 체로키 족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 규칙에 따르면, 체로키 족의 토지를 매도하는데 동의한 범법자는 사형이었다.

체로키 위원회는 아무도 서면으로 서명하지 않았다. 이 조약은 미시시피 강 동쪽의 체로키 족 토지를 매도하는 것에 동의하는 조약이었다. 체로키 위원회와 로스 수장은 이 문서가 사기라는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1836년 5월 23일, 미국 의회는 단 한 번의 투표로 조약을 비준했다.

집행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