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노 데 메디치 디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Giuliano di Lorenzo de' Medici, 1479년 3월 12일 ~ 1516년 3월 17일)는 이탈리아의 귀족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의 셋째아들이다. 착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151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 의해 느무르 공작이 되었다. 1513년부터 피렌체을 통치하였다. 그의 둘째 형인 조반니는 217대 교황 레오 10세이다. 미대 입시생들이 데생용 모델로 애용하는 줄리앙 석고상의 실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동명이인에 숙부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1453-1478)를 주인공으로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줄리아노 데 메디치
Raffaello, giuliano de' medici.jpg
작위
피렌체의 군주
재위 1513년 3월 9일 – 1516년 3월 17일
전임자 조반니 데 메디치
후임자 로렌초 2세 데 메디치
신상정보
출생일 1479년 3월 12일
출생지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일 1516년 3월 17일(1516-03-17) (37세)
사망지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가문 메디치 가문
부친 로렌초 데 메디치
모친 클라리체 오르시니
배우자 필리베르타 디 사보이아

생애편집

초기생애편집

줄리아노의 집안인 메디치 가문은 대대로 피렌체를 통치해 왔는데 뛰어난 통치자였던 부친 로렌초와는 달리 그 뒤를 이은 큰형 피에로 2세 데 메디치는 무능하였다.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가 피렌체를 침공하자 피렌체의 통치자(그란 마에스트로)였던 피에르 2세(1471-1503)가 제대로 싸우보지도 않고 비굴하게 항복하였다. 굴욕적인 항복에 성난 피란체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서 추방하였다. 줄리아노는 우선 가족들과 함께 베네치아로 도주한 후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망명 생활을 하였다. 형 피에로는 1503년 전사하고 말았다.

메디치 가문의 복귀편집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216대 1503~13)의 주도하에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고 베네치아를 상대로 전쟁이 벌였다.(캉브레 동맹 전쟁 참조) 동맹국은 베네치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과정 중에 동맹국 프랑스의 이탈리아 반도내에 영향력이 커지자 이를 경계하게 되었다. 교황은 베네치아와 역동맹을 맺은후 프랑스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프랑스가 거세게 반발하며 교황폐위를 위해 피렌체가 다스리고 있던 피사에서 공의회 개최를 천명하였다. 피사 공의회 개최를 거부하라는 교황의 명을 친 프랑스 정책을 펴던 피렌체 공화정이 거부하며 교황과 피렌체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1512년 9월, 프랑스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 교황은 피렌체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스페인군과 교황령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파병하여 피렌체 공화국의 도시 프라토(Prato)를 점령하고 초토화 시켜버렸다. 프라토는 수도 피렌체에서 16km 떨어진 가까운 도시로, 스페인군은 이곳을 정복한후 잔인하게 약탈을 자행하며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그런 후에 수도 피렌체 시민들에게 항복할 것을 겁박했고 이에 공화정 수뇌부가 사퇴 후 망명을 떠나고 말았다.

교황 율리오 2세(216대 1503~13)의 명을 받은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교황령군 1,500명을 이끌고 수도 피렌체에 입성한후 피렌체의 통치권을 접수하였다. 이로써 메디치 가문은 추방된 지 18년만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을 받아 피렌체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때 줄리아노도 피렌체로 귀국하였다. 이듬해 1513년에 율리오 2세 교황이 사망하자 줄리아노의 형인 조반니 추기경이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되어 로마로 떠나자 형의 뒤를 이어 줄리아노가 피렌체을 통치하였다.

결혼과 사망편집

1515년 2월 22일,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의 딸 필리베르타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프랑스 궁전에서 치러졌다. 필리베르타의 언니 사보이의 루이사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였는데, 프랑수아 1세는 이모부 줄리아노에게 느무르 공작의 작위를 주었다. 줄리아노는 라파엘로,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을 후원하였다. 1516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고,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다. 줄리아노가 사망한 후 피렌체의 통치권은 조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에게 승계되었다. 조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가 1519년에 사망한 후에는 줄리아노의 사촌형인 줄리오 추기경이 피렌체를 통치하였다.

가계도편집

 

자녀편집

본 부인과 사이에는 자녀가 없고 정부 파치피카 브란다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이폴리토 데 메디치(1511 ~ 1535)가 있다. 이폴리토가 5살일 때 (1516년) 줄리아노가 사망하자 그의 삼촌인 교황 레오 10세와 줄리오(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를 양육하였다. 1523년에 5촌 백부인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스 7세로서 선출되면서, 이폴리토는 그를 대신해 피렌체를 통치했다. 그러나 12살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교황이 파견한 특사(추기경)들이 통치를 하였다. 피렌체 공성전(1529–1530) 이후, 클레멘스 7세는 그의 재종손자(再從孫子) 알레산드로[1][출처 필요]를 세습 공작으로 만들어 피렌체를 통치하게 하였다. 그 대신 이폴리토는 초대 아비뇽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석고상 줄리앙편집

피렌체 산 로렌초 교회의 메디치 예배당과 연결되어 있는 신 성구실에는 줄리아노의 무덤이 있다. 신 성구실은 미켈란젤로가 만들었으며 줄리아노 석관은 줄리아노의 조각상과 함께 밤과 낮이라고 명명된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신 성구실에는 동명이인의 삼촌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2](생몰 1453~1478)의 무덤도 함께 있는데, 이 때문에 그의 무덤은 종종 삼촌의 무덤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석고상 줄리앙과 실제 주인공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의 초상화 속의 얼굴은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작업을 할때 의도적으로 역사속 여러 유명인들의 얼굴이나 특징을 뒤섞어 놓았기 때문이다. 무덤의 주인을 쉽게 알 수 없게 하여 메디치 가문의 정적들에게 무덤이 파헤쳐지고 도굴되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참고편집


각주편집

  1. 알렉산드로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다.
  2. 숙부 줄리아노(1453-1478)는 1478년에 발생한 '파치 음모 사건'때 암살당하였다. 파치 음모 사건(Congiura dei Pazzi)은 파치 가문이 주도하여 피렌체의 통치자로 있던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반란사건이다.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일요일 미사를 드리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형제 2명에 대해 기습적으로 살해를 감행하였다. 아버지 로렌초는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남았으나 숙부 줄리아노(1453-1478)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정권탈취를 위한 파치가문의 쿠테타는 실패로 끝났고 공모자들의 대부분은 곧 체포되어 성난 군중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파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였다. 메디치 가문과 원수관계에 있던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84)는 이번 반란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전임
가스통 드 푸아
느무르 공작
1515년 ~ 1516년
후임
필리프 드 사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