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불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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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1895년 3월 30일 – 1975년 2월 24일) 은 국방장관과 총리를 역임한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인이다. 그는 군 경력은 없었으나 독소전쟁 기간 중 소련 정부의 행정을 책임져서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고, 소비에트 연방 원수의 계급을 받았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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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7월의 불가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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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37년 7월 22일 1938년 9월 17일 |
전임 | 다닐 술리모프 |
후임 | 바실리 바흐루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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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6년 3월 18일 – 1948년 2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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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6년 3월 18일 – 1952년 10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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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7년 3월 3일 – 1949년 3월 24일 |
전임 | 이오시프 스탈린 |
후임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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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8년 2월 18일 – 1958년 9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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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50년 4월 7일 – 1955년 2월 8일 |
전임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
후임 | 아나스타스 미코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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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53년 3월 15일 – 1955년 2월 9일 |
전임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전쟁장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해군장관) |
후임 | 게오르기 주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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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55년 2월 8일 – 1958년 3월 27일 |
전임 | 게오르기 말렌코프 |
후임 | 니키타 흐루쇼프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5년 6월 11일 |
출생지 | ![]() |
사망일 | 1975년 2월 24일 | (79세)
사망지 | ![]() |
소속 | 붉은 군대 |
정당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1917년–1918년)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1918년–1925년)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1925년–1952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1952년–1975년) |
종교 | 국가무신론 |
군사 경력 | |
복무 | ![]() |
복무기간 | 1941년–1949년 |
근무 | 정치장교 |
최종계급 | 대장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상훈 | ![]() ![]() |
이력편집
생애 초기편집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사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전기공학 견습공으로 있었고, 1917년 레알슐레를 졸업했다. 동년 볼세비키에 가담하고, 1918년 체카에 들어가서 1922년까지 근무했다. 러시아 내전이후, 불가닌은 전력 공급을 책임진 산업관리원이 되었고, 1927-1931년에는 모스크바 전력 공급부의 감독자가 되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불가닌은 모스크바 시(市)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관료 생활편집
1934년 소련 공산당의 제17차 당대회에서 불가닌은 당 중앙위원회의 후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불가닌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그리하여 대숙청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당시 숙청된 고위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숙청에서 재외된 당 관료들에 대한 대폭적인 승진이 실시되었는데, 불가닌도 이를 통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1937년 7월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이루는 공화국들 중 가장 큰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총리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중앙위원회의 정위원이 되었다. 또한 이 해에 소련 부총리(총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올랐고, 소련 국가 은행의 총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불가닌은 정부 행정을 책임졌다. 전선 지휘에는 직접 나가지 않았지만, 군인으로서 상급대장의 계급을 받았고, 국방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944년 국방장관 대리가 되었으며, 붉은 군대 최고사령부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리자로서 일했다. 이 공적으로 1946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원수 계급을 받았고, 당 정치국의 후보위원이 되었다. 1947-1950년에는 다시 소련 부총리를 역임하였다. 1948년 정치국의 정위원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편집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불가닌은 국방장관으로서 소련 지도부의 첫 번째 유력한 자리에 있었다. 그는 흐루쇼프와 연합하여 말렌코프와 권력투쟁을 벌였고, 1955년 2월에는 말렌코프를 실각하고 소련 총리에 올랐다. 불가닌은 대체로 흐루쇼프의 개혁정책과 스탈린 격하 운동에 동조하는 것처럼 비쳐졌으며, 흐루쇼프의 해외 순방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7년 몰로토프가 주도한 반당집단의 반흐루쇼프 운동에 참여하여 흐루쇼프를 권력에서 실각시키려 하였다. 불가닌은 일관되지 못하게 흐루쇼프와 반당그룹 사이를 오갔고, 결국 흐루쇼프는 반당그룹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불가닌은 당분간 총리 자리를 유지하지만, 1958년 바로 흐루쇼프의 강요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시 20년전에 맡았던 소비에트 국가 은행의 총재에 임명되었으나, 중앙 정치와는 멀어졌고, 정치국에서 밀려나고, 원수의 계급도 박탈되었다. 이후 세바스토폴의 경제위원회의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이 직위는 거의 실권이 없는 자리였다.
말년편집
1960년 2월 은퇴하였으며, 이후 사망할 때까지 연금생활자로 살았다. 이후 15년간 모스크바의 자택에서 살다가 사망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전임 이오시프 스탈린 |
제2대 소련의 군무성 장관 1947년 3월 3일 ~ 1949년 3월 24일 |
후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전쟁성 장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제1대 소련의 국방성 장관 1953년 3월 15일 ~ 1955년 2월 9일 |
후임 게오르기 주코프 |
전임 게오르기 말렌코프 |
제3대 각료평의회 의장 1955년–1958년 |
후임 니키타 흐루쇼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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