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코타 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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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코타 준주(Dakota Territory)는 1861년 3월 2일부터 1889년 11월 2일까지 존재한 미국의 자치적인 영역, 즉 준주이다. 그 영역은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이 프랑스에서 구입한 200만km2 이상의 토지 중 가장 북쪽 부분에 해당한다.
역사편집
다코타 준주의 영역의 대부분은 원래는 미네소타 준주와 네브래스카 준주였다. 네브래스카 준주의 북쪽 절반 거의 전역과 미네소타 준주가 1858년에 주로 승격했을 때 자치화되지 않은(새로운 주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역(동쪽 레드 강, 서쪽 미주리 강에 둘러쌓인 부분)의 초기 개척자들은 그해 얀크톤 - 수족과의 조약이 체결되어 라코타 족 토지 대부분이 미국에 할양된 무렵, 비공식적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의 준주가 되려고 제의를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취임 직전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사촌 격인 존 블래어 스미스 토드가 스스로 청원을 하여 의회가 공식적으로 다코타 준주 설립을 승인하는데는 그 후 3년이 걸리지 않았다. 1861년 3월 2일에 의회 자치법에 의해 자치화되어 준주가 되었다. 이 때 다코타 준주는 현재 남북 다코타 외에 몬태나와 와이오밍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면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1868년경 이 두 지역도 준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다코타 준주는 거의 현재의 남북 다코타에 필적하는 영역으로 감소되었다.
준주의 주도는 1861년에서 1883년까지 얀크톤에 있다가 이후 비즈마크로 옮겨졌다. 다코타 준주는 1889년에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로 분할되었다. 하나의 준주에서 두 개의 주로 승격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두 준주의 인구 중심이 각각 준주의 북동쪽과 남동쪽에 치우쳐 있어, 수백 마일 떨어져 있었던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주가 되면, 주 수에 비례하여 상원의원 정수가 증가하므로, 이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던 공화당은 의원 수를 늘릴 수 있다는 속셈이 있었다.
준주 된 후에 얼마 동안 인구의 성장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이후 1870년부터 1880년에 걸쳐 "다코타 붐"이 일어나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처음 인구 증가가 완만하게 진행된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주요 이유는 수 족 인디언이 매우 적대적이어서, 초기 개척자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 세력은 점차 평정되어 위협 수준이 줄어들게 되었다. 인구 증가는 철도의 발전, 특히 노던 퍼시픽 철도에 힘 입은 바가 컸다. 다코타 준주에 온 개척자는 다른 서부 준주에서 온 사람도 있었지만, 유럽의 북부와 서부에서 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는 많은 노르웨이인, 독일인, 스웨덴 및 캐나다 사람이 있었다.
다코타에서의 생활은 농업과 비옥한 토양으로 영위되었다. 밀이 준주의 주요 환금 작물이 되었다. 1880년대에는 밀 가격이 하락하여, 심한 가뭄에 시달렸기 때문에 준주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기타 경제 활동은 광업과 가축 목장 사업이 있었다. 블랙 힐스에서 금맥이 발견되어 그 지역에 많은 개척자이 유입되었다. 이 인구 유입에 따른 육류 생산량의 증가는 다코타의 광활한 토지에서 목장을 운영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