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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시조 서진(徐晉)은 고려시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면서 달성에 세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진(徐晋)의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된다. 부인은 초계 주씨이다. 조선 후기 간행된 《만성보(萬姓譜)》에 의하면 달성 서씨의 시조 서진은 대구 서씨의 시조 서한의 증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달성서씨 유허비는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인물편집

달성서씨는 시조인 서진이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오르고 달성군에 봉해진 이후 아들 서기준과 손자 서영까지 3대에 걸쳐 달성군에 봉해졌다. 이후 증손인 서균형(徐鈞衡)이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辛旽)을 탄핵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의 아들 서침(徐沈)은 정몽주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조선 개국 이후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서침이 달성에 살고 있을 때 조선 세종조에서 달성을 나라의 관방으로 쓰겠다며 거두어 들이고자 하며 그 보상책을 논하자 서침이 보상받기를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부민들이 관청에 바치는 적모의 이자를 한 석당 닷되씩을 감해 줄것을 주청하니 조정에서 특별히 허락하여 대구 부민들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받았다. 서침의 박시제중(博施濟衆)에 감복(感服)한 대구 사림(士林)들이 1665년에 대구에 구암서원을 건립하고 서침을 봉안하여 매년 제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달성은 달성공원으로 바뀌어 대구 시민들의 도심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서침은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 서문한(徐文翰)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현감을 지냈고, 차남인 서문간(徐文幹)도 중시에 올라 현감을 역임했으며, 3남 서문덕(徐文德)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또 대사간이었던 서충(徐衷)의 증손인 서한정(徐翰廷)은 세종 때 진사로 태학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 기슭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응시(徐應時)는 중봉 조헌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 서인충(徐仁忠)은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김상헌과 함께 화의를 반대했다. 또 서수천(徐壽千)은 이순신 막하에서 선봉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근현대 들어 구한말에는 시서화에 능해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서병오(徐丙五)가 있으며,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서상한(徐相漢) 형제가 유명하다. 또 사헌부 감찰 서목렬(徐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주 근방에서 활약하였다.[1]

과거 급제자편집

달성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하였다.[2]

고려 문과

서균형(徐均衡) 서좌(徐坐)

문과

서도(徐渡) 서변(徐忭)

무과

서건웅(徐健雄) 서길(徐) 서당백(徐當伯) 서덕규(徐德奎) 서만휘(徐萬輝) 서사륙(徐士陸) 서유(徐愉) 서윤장(徐潤章) 서윤중(徐允仲) 서응길(徐應吉) 서일성(徐日成) 서정화(徐庭和) 서종석(徐從碩) 서주대(徐州大) 서진욱(徐鎭郁) 서필완(徐必完) 서학룡(徐鶴龍) 서한유(徐漢儒) 서후백(徐後伯) 서후적(徐後積) 서흥일(徐興逸) 서흥주(徐興柱) 서흥춘(徐興春)

생원시

서만유(徐萬維) 서변(徐忭) 서사선(徐思選) 서식(徐湜) 서정구(徐鼎耉) 서주은(徐周殷) 서지달(徐志達) 서천일(徐千一)

진사시

서경(徐競) 서석범(徐錫範) 서식(徐湜) 서천일(徐千一) 서형(徐泂) 서홍복(徐弘復)

인구편집

  • 1985년 94,873가구, 398,363명
  • 2000년 132,270가구 429,353명
  • 2015년 407,431명

집성촌편집

항렬자편집

대구 서씨와의 관계편집

달성(達城)서씨와 대구(大丘)서씨는 족보상으로 시조가 다르다. 달성서씨는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고, 대구 서씨는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 서한(徐閈)을 시조로 하고 있다.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는 그 근원이 같다고 추측되지만 분파된 시기와 계대를 확실히 고증하기 어렵다. 달성 서씨는 향파(鄕派)로 대구 서씨는 경파(京派)로 부르기도 한다. 달성 서씨는 서한의 증손으로 추측되는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대구 서씨는 시조 서한(徐閈)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어서 고려 판전객시사를 지낸 7세 서익진을 중시조로 모시고 대동보(大同譜)를 서로 달리하고 있다. 달성서씨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파라 하고 대구서씨는 소윤공(少尹公)파라고 갈래 지운다. 두 파는 1702년(肅宗 28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1736년(영조(英祖) 12년)에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 서씨(大丘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조선조 방목 등 각종 문헌에 대구서씨 인물들의 관향이 달성으로 되어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