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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담양전씨(潭陽田氏)의 시조 전득시(田得時)는 고려전라도 담양(潭陽)에서 대대로 오랫동안 살아온 향리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중엽 때 전라도 담양에서 출생하고, 현량과(賢良科)로 천거되어 고려 의종 때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등을 역임하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담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분파편집

전희경(田希慶)의 아들 전록생(田祿生)은 야은공파(野隱公派), 전귀생(田貴生)은 뇌은공파(牢隱公派), 전조생(田祖生)은 경은공파(耕隱公派)로 계파가 나뉘게 되었다.

전득시의 8세손인 전가식(田可植)을 시조로 하는 연안 전씨, 전조생의 7세손인 전균(田畇)을 시조로 하는 하음 전씨, 행주(고양)전씨][1], 전실(田實)을 시조로 하는 예산 전씨 ,남원, 우봉, 평택, 개성 등은 담양 전씨에서 분파되었다. 담양 전씨 대동보에는 함께 등재하고 있다.

본관편집

담양(潭陽)은 전라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현재 담양은 조선시대의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와 창평현(昌平縣)을 1914년에 병합한 지역이다. 봉산면 · 무정면 이북지역은 대체로 옛 담양도호부 영역이고, 창평면 · 고서면 · 대덕면 · 남면 · 수북면 등 남부는 옛 창평현 지역에 해당한다.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고,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도단련사를 폐지하였고, 담양군으로 개편하여 나주(羅州)에 편입시켰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원율현(原栗縣 : 담양군 금성면 원율리 일대)을 병합하였다. 1395년(태조 4) 군으로 승격하였고, 1399년(정종 1)에 부(府)로 다시 승격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담주에서 담양으로 개칭되어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나, 1728년(영조 4)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담양군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1905년(광무 9)에 담양부를 담양군으로 고쳤고, 1908년(순종 2)에 폐지된 옥과군 일부가 담양군에 편입되었다.

인물편집

고려편집

  • 전록생(田祿生, 1318년~1375년) : 고려의 문신.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埜隱).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사록(濟州司錄)․전교교감(典校校勘)을 지냈다. 1350년(충정왕2)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했다. 1357년(공민왕6)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간의(諫議) 이색(李穡), 사간(司諫) 이보림(李寶林), 정추(鄭樞) 등과 함께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단을 극론(極論)했고, 이 해에 전라도 안렴사(安廉使)가 되었고, 11월에 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남순(南巡)하게 되자 시어사(侍御史)로 왕을 호종했다. 1362년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고, 벼슬을 여러 번 옮겨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듬해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에게 예물(禮物)을 드리고 돌아와 밀직지학(密直指學)이 되고 나중에 계림윤(鷄林尹)에 제수되었다. 그후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았다. 1371년에는 이색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그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선발하였다. 1373년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禑王)의 사부가 되었으며, 다음해는 개성부사(開城府事)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고, 추화찬화보리공신(推化贊化輔理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1375년(우왕1) 간관(諫官)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원의 배척과 이인임(李仁任)의 목을 벨 것을 청하니 왕이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이들의 말이 박상충(朴尙衷)과 전녹생에게 관련되므로 최영이 이들을 국문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모두 가던 도중 죽었다.
  • 전귀생(田貴生) : 자(字)는 중경(仲耕), 호(號)는 뇌은(뇌隱), 시호(諡號)는 문혜(文惠). 고려 때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했다. 고려가 기울어지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이성계(李成桂)가 누차 벼슬할 것을 권유하자 굳이 사퇴하고 결국 절해고도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의 몰년(歿年)은 아무도 모른다. 두문동 72현으로 두문동서원에 배향됨
  • 전조생(田祖生) : 자는 계경(季耕). 호는 경은(耕隱).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희경(希慶)이며, 어머니는 웅신서씨(熊神徐氏)로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성윤(成允)의 딸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에 급제하였고,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왕이 그를 불러 두 왕자를 한(漢)나라 곽광(霍光)과 제갈량(諸葛亮)같이 보필하여줄 것을 부탁하였다. 1346년(충목왕 복위 2) 이제현(李齊賢)·이곡(李穀) 등과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찬정(撰定)하였고, 우탁(禹倬)을 따라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講明)하였다. 1349년(충정왕 1) 찬성첨의부사(贊成僉議府事)에 제수되었고, 1351년 다시 찬성첨의부사에 올랐을 때 왕이 강화에서 손위(遜位)하자, 이강(李岡)·박사신(朴思愼)·한수(韓修) 등과 호종(扈從)하였다가 그길로 운둔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계자시(誡子詩)」와 「경학문(警學文)」을 지어 후진을 계도하였다. 태암서원(泰巖書院)에 별향(別享)되었고, 구산서원(龜山書院)·소계서원(蘇溪書院) 개성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 전자수(田子壽) : 자는 백인(伯仁), 호는 회정(晦亭)이다. 찬성사(贊成事)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의 장손이며, 전순(田順)의 장남이다. 고려 말 품계가 종이품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첨의평리(僉議評理) 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다. 사간(司諫)으로 강원도안렴사(江原道按廉使)가 되어 평해(平海:지금의 울진 지역)를 순시하던 중 뛰어난 산수에 반하여 벼슬을 버리고 양진재(養眞齋)에 은거하며 만년을 보냈다. 의령 태암서원(泰巖書院)과 울진 경문사(景文祠)에 봉안되어 있다.

조선편집

대동보의 내용 중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문무과 방목에서 확인되는 인물

  • 전가식(田可植) : 호는 성암(省菴). 증조부는 문혜공(文惠公) 전귀생(田貴生), 할아버지는 전한(田漢), 아버지는 전무(田畝)이다. 1399년(정종 1)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태종의 세자 시절에 세자와 유일지사(遺逸之士)를 논하게 되었을 때 전가식은 “길재(吉再)가 강직하고 집에서는 효행이 돋보였다”고 말하였다. 1401년(태종 1)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검소한 풍토를 솔선할 것이며, 안일과 탐욕을 경계할 것이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일 것이며, 희노를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서장관(書狀官)과 정사(正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449년(세종 31) 84세로 세상을 뜨자 세종이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상하게 하였다.[2]
  • 전균(田畇, 1409년 ~ 1470년) : 어릴 때 내시부(內侍府) 소속으로 승진을 거듭하여 동첨내시부사(同僉內侍府事)가 되고, 1447년(세종 29)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를 거쳐 1452년(문종 2) 동지내시부사(同知內侍府事)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제거한 계유정난 당시에 수양대군을 적극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이 되고 강천군(江川君)에 봉하여졌으며,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에 승진되고, 1466년 하음군(河陰君)으로 개봉(改封)되고, 1468년 품계가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환관으로 공신이 되고 품계가 1품에 이른 것은 전윤이 처음이다. 죽은 뒤에 봉상시에서 양경(襄敬)이라는 시호를 의정(議定)하였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내려지지 않았다.
  • 전복(田馥): 전빈(田嬪)의 아우로 호는 형봉(衡峰)이다. 인조 때에 진사로 임인에 문과에 올라 예 조좌랑(禮曹佐郞), 공조정랑(工曹正郞)의 내직에서 만경현령(萬頃縣令), 신천(信川)군수, 강 진현감, 보성(寶城)군수, 풍기(豊基)군수, 안동(安東)부사를 역임하였는데 문명이 높았고 치 민(治民)을 잘 하여 도처에서 명망이 있었다. 상서 이지태(尙書 李砥台), 교리 이낙보(校理 李樂甫) 대간 남이성(大諫 南二星) 등과 의기가 상합하였다고 한다.
  • 전실(田實) : 자는 약허(若虛)이고, 호는 구재(龜齋). 고려조의 경은 전조생의 증손이다. 당세에 문장이 높았는데 그의 백숙의 두 아들도 문명이 높아 당세에 삼소라고 하였다. 벼슬은 참사내첨시상의주부(參事內瞻侍尙衣主簿), 사축사별제, 은률(殷栗), 금천(衿川), 고령 (高靈), 현감에 있었다. 유고와 일록(日錄)이 전하고 있다.
  • 전좌명(田佐命, 1424년 ∼ 1521년) :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성암(性庵). 중종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의 외할아버지,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윤호(尹壕)의 장인이며, 중종 때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김계우(金季愚)의 외조부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온 몸을 쓰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지 7년이나 되었는데, 늘 자기가 약을 달이고 몸소 오줌 그릇을 받들었으며, 어머니가 죽으매 무덤을 지켰다. 이후에 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합장(合葬)하고 4년 동안 여막에 살았으며, 상기(喪期)를 마쳤는데도 떠나지 않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법을 들어서 개유(開諭)했으나, 또 3월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전한다. 1432년(세종 14)에 예조에서 효행 있는 자에게 정문(旌門)을 세우고 서용(敍用)토록 아뢴 바 있다. 경북 구미에는 전좌명 효자 정려각(田佐命孝子旌閭閣)과 무이재(武夷齋)가 있다. 무이재는 그를 추모하는 곳으로, 1809년(순조 9)에 후손이 건조하여 의소(議所)로 삼았는데, 명종(明宗)의 어제시(御製詩)인 ‘백조함향합 남산 대전민(白鳥啣香盒 南山代田民)’가 본판에 양각하여 달려 있다.
  • 전윤평(田允平, 1455년 ∼ 1505년) :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의 6세손이며, 부총관(副摠管) 전수명(田守明)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외척으로 화를 당하여 군산진만호(群山鎭萬戶)로 좌천되면서 전라북도 옥구(沃溝)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주) 족보에는 문과 급제란 말이 없으며 성종대 등용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음,문과,소과,무과 모든 방목에서도 이름을 찾아 볼수 없으며 병마절도사등의 벼슬도 했다고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도 단한줄 없음.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는 뇌은파 (연안전씨) 전좌명의 외손녀로서 전윤평과는 200년을 거슬러가야 선조가 형제가 되는 사이로 외척은 어불성설이며 전혀관계 없는 사이임 위 내용은 옥구지역의 후손들이 보잘 것 없는 입향 선조를 미화한 사례로 급제,벼슬은 물론 감히 일게 평민 집안이 감히 왕실친인척 언급하는 불경한 내용으로 여겨지며 20세기에 이르러 첨부된 거짓으로 사료됨. 참고로 옥구지역은 스스로 참판공파 참의공파등으로 칭하는데... 그런 고위직 벼슬과는 전혀 인연이 없으며 아주 평범한 전형적 평민집안


  • 전윤(田潤, 1554 ∼1637) : 자는 경윤(景潤), 호는 야곡, 담양인 경은 전조생의 후예이다. 그 아버지 녕 부 직장 응진은 명종 갑인 7월 26일에 출생하여 별시 무과에 합격하고 내금부 선감주부(內禁府 繕監主簿), 훈첨사복장(訓僉司僕裝), 동중추북청진영(同中樞北靑鎭營), 울진, 해남현감, 울산, 영광, 고부군수, 인동부사를 거쳐 선조조에는 호성원종공신일동(扈聖原從功臣一等) 에 기록되었다. 임진년에 서경을 향해 파천(播遷)할 때 호위장(扈衛將)이 되어 왕과 궁인 백관들이 무사하 게 임진강을 건너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장단까지 가는 도중에 왕이 수라를 들지 못하게 되자 전윤이 마을에 나가 밥과 국을 얻어 왕에게 올렸다. 왕이 음식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사람들이 먹지를 못하고 나만 들면 어찌하느냐”고 하며 수라를 들지 못하니 영의정 유 성룡이 조밥에 나물국이지만 충성스런 백성이 올리는 것이니 드시라고 아뢰였다. 전윤은 이항복 등과 의논하여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그 후 다시 서울까지 환도하였다. 그때 명나라 군사가 방패 삼천 개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이 모두 유리하고 물자 가 없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그때인지라 조정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도다. 그러나 전윤 은 그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하고 며칠 안으로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서울 근처에 있는 무덤을 파서 널등을 꺼낸 뒤 방패 삼천개를 무난히 만들어 명나라 진중에 보냈 다. 조정은 물론이요, 명나라 진중에서도 모두 경탄하였다고 한다. 인조 정축년에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은하면 조곡에 있다. 그 후 5세손 운상이 가장 (家狀)을 짓고 전재 임헌회가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전한다.
  • 전언룡(田彦龍, 1555년 ∼ 1622년) :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지금의 전라남도 군산시(群山市) 나운동(羅雲洞)에서 태어났다.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의 10세손이며, 전필규(田畢奎)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며 공을 세워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1894년(고종 31)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하였다.
  • 전영방(田永芳, 1568년 ∼ 1597년) : 조선 후기 무신. 전라남도 옥구읍(沃溝邑) 다기(多岐)에서 태어났다.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의 10세손으로 부친은 전두규(田斗奎)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였으며, 1594년(선조 27) 형 전영년(田永年)과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錄勳)되어 철권(鐵券)이 내려졌고, 전라남도 옥구 옥산사(玉山祠)에 배향되었다.
  • 전득우(田得雨, 1574년 ∼ 1638년) :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시재(時哉), 호는 송애(松崖). 아버지는 총관 윤(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평양 대동문장(大同門將)으로 있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기교위가 되어 관군을 증모하고 병기를 정비, 전투준비를 하던 중 임금이 도성을 떠나 파천(播遷)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으로 달려가서, 한강을 건너 수강장(守江將) 김명원(金命元)의 별장인 부장 이응기(李應棋)의 진으로 달려갔다. 그는 ‘송애(松崖)’라는 군기를 높이 세워 적을 공격하니 적이 그 깃발을 보고 모두 피하였다. 뒤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왜병은 ‘송(松)’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송애의 깃발을 피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 뒤 영남순검사가 되어 군정을 살폈고,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완도의 뱃길을 여는 방략(方略)을 세우기도 하였다. 벼슬이 좌승지에 이르렀다.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 전벽(田闢, 1586년 ∼ 165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서(滋墅), 호는 서정(西亭). 대복(大福)의 아들로, 대록(大祿)에게 입양되었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계속 독서에만 전심하다가 1612년(광해군 4) 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때 전 박사 김직재(金直哉)의 아들 백함(百緘)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속에 문과출신 전벽도 있다는 황해병사의 비밀보고와, 양서(兩西: 평안도·황해도)에서 걸객행세를 하던 김제세(金濟世)의 자복(自服)에서도 그가 모역에 끼어 있다는 무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보령현감이 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주병(州兵) 1,000명으로 인조를 공주에 호종(扈從)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전향종사관(轉餉從事官)으로 참전하였다. 1638년에 예조정랑으로 명나라를 공격하는 청나라 원병장 이시영(李時英)의 종사관으로 출정하다가 의주에 이르러 출병을 반대하고 돌아왔으며,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러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평양 송호사(松湖祠)에 제향되었다.[3]
  • 전내적(田乃績, 1599년 ∼ 1655년) : 조선 후기의 문신·효자.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복(公復), 호는 석포(石浦). 부사 전득시(田得時)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스승을 따라 외지에서 생장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어버이가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소학》과 《심경 心經》 등을 애독하였다. 평시에 항상 조용히 정숙하게 앉아서 글을 읽었으며 함부로 웃지 않았다. 어버이가 중병에 걸리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기도 하였으며, 밤마다 향을 사르며 어버이의 죽음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효행으로 1652년(효종 3)에 서빙고별검(西氷庫別檢)으로 천거되었다. 그 뒤 종부시주부가 되었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다.
  • 전세록(田世祿) : 조선 중기 의병.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선천부사 기협(奇協)의 별장으로 의병을 모집, 인산(釰山)의 월봉(月峯)에서 내침한 적에게 투석전으로 맞서 이를 물리쳤고, 적이 재차 공격을 가해오자 수명의 장정과 함께 복병전으로 이를 기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의주 사람 이성득(李成得)이 적에게 항복하고 그 심복이 되어 의주·용천 사이를 내왕하며 적의 군량을 보급하자 계략을 써서 그를 잡아 죽였다. 그 용맹에 탄복한 명나라 도독 모문룡(毛文龍)의 보고로 판관이 되고,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 전만춘(田萬春) : 부호군(副護軍), 훈련첨정(訓鍊僉正), 전라우수우후(全羅右水虞候) 첨사(僉使), 벽동군수(碧潼郡守)
  • 전만최(田萬最) : 전시원의 생부 , 칠원현감(柒原縣監)
  • 전시원(田始元) : 1702년 무과 급제하여 선전관, 홍주 영장(營將), 금천군수, 보성군수 등을 역임
  • 전시혁(田始赫) : 동중추증판돈녕(同中樞贈判敦寧) 전만춘의 차자로, 은하면 대율리에서 숙종 정축 년에서 출생하였다. 경종 임인에 무과에 등용되었고 무신 3월에 이인좌, 박필진 등이 모반하 였다. 적장중 나승대는 용력이 과인한 자로 나주에서 준동하고 있었다. 이때에 전시혁의 질 일상(日詳)이 나주진영장(羅州鎭營將)으로 토포(討捕)토록 하였었다. 조정에서는 전시혁을 금부도사로 임명하여 나숭대를 나포하고 이에 분무원종일등훈(奮武原從一等勳)으로 공을 치하하였다. 또한 장기현감으로 있을 때에 흉년을 당하자 양곡 260여석을 내놓아 백성들을 구제한 공으로 감사(監司) 유척기(兪拓基)가 계문함으로써 유지(諭旨)와 마필(馬匹)을 하받 았다. 임술 5월에 4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남당 한원진이 조만에서 「功各奉爲親」이라 한 것은 평일에 그의 효행을 말한 것이다.
  • 전운상(田雲祥, 1694(숙종 20)∼1760(영조 36) : 조선 후기의 무신.시원(始元)의 맏아들이다1717년(숙종 43) 24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함경도의 정평부사로 있을 때 농업을 권장하고 흉년을 당하여 이재민과 질병을 앓는 사람을 잘 보호하여 왕의 특별한 포상을 받았고, 또 강원도 춘천에 재임중에는 삼공(蔘貢)의 민폐를 통감하고 관비의 절약보조로 보삼고(補蔘庫)를 설치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고, 해이된 무비(武備)를 정비하고 연무청(鍊武廳)을 신축하여 장병을 훈련하여 유사시에 만전을 기하기도 하였다.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이원익(李元翼)의 ≪거관승묵 居官繩墨≫ 1편을 손수 써서 책상머리에 두고 항상 읽고 외우며 공무에 전심하였기 때문에 처결에 잘못이 없고 관찰과 판단이 공정하였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1740년(영조 16)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에 수군의 특수함정인 해골선(海鶻船)을 건조한 것이다. ≪영조실록≫에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해골선을 지었는데, 몸체가 작고, 가볍고 빨라서 바람을 두려워할 염려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해골선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주목할만한 군선이었다. 1746년 경상병사로 있으면서 독륜전차(獨輪戰車)라는 독특한 육전(陸戰)의 전구(戰具)도 제작하여 유사시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 전광옥(田光玉, 1694년 ~ 1761년) : 조선 영조 때 문관. 初名(초명) 始大(시대). 자 德種(덕종). 호 澗松堂(간송당). 본관은 행주(幸州). 父 嘉善大夫 龍驤衛副護軍 一成(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 일성). 일찍 학문에 전념하여 영조 1년(1725)에 司馬試(사마시)에 급제하고, 동왕 23년(1747) 文科 甲科(문과 갑과)의 제3인 곧 探花郞(탐화랑)으로 급제, 靖陵直長(정릉 직장)에 除授(제수)되었다. 이듬해에 司憲府監察(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이후 朝奉大夫 成均館直講, 通訓大夫 幽谷道察訪(조봉대부성 균관직강, 통훈대부 유곡도찰방) 등을 역임했다. 기개와 도량이 활달하고 마음이 공명정대하여, 흉년에는 祿俸(녹봉)을 나누어 궁한 백성들을 구제했고, 고향 경상북도 영덕군 寧海(영해)로 낙향할 때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찢어진 우산 하나와 해어진 獤皮(돈피) 갑옷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諸賢(제현)들이 ‘山南宿儒(산남숙유, 영남의 명망 높은 선비)’라 칭송했으며 문집에 ‘澗松堂集(간송당집 3권)’이 있다.
  • 전일상(田日祥, 1700 ~ 1753) : 자는 희중(羲中), 호는 석천(石泉)이다.전운상의 동생 1661년(숙종 1)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관직은 내직으로 선전관(宣傳官), 어영수어천총도감(御營守禦千摠都監), 우림위장(羽林衛將),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고용첨사, 삼척영장, 단천·구성·거창·경원·칠곡·무산·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왕의 밀지(密旨)를 받고 나주 지방에서 토적 나숭대를 체포하였다. 묘소는 충청남도 홍성군 은하면 대율리에 있다.
  • 전천상(田天祥, 1705 ~ 1751) : 통어사 전운상의 넷째 아우. 자는 경문(景文), 호는 죽암(竹菴). 어려서 부터 천재라는 평을 받은 그는 경사, 병법, 술수 등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글씨에도 일가견 을 가지고 있었다. 계묘년에 음관(陰官)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병오년에는 무과에 합격하 여 비랑훈련첨정(備郞訓鍊僉正)을 거쳐 무신년에는 희천군수(熙川郡守)에서 수안군수(遂安郡守)로, 기미년에는 여주목사, 계해년에는 춘천부사(春川府使), 병인년에는 하동부사(河東府使)로 있었다. 무진년에는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나주영장(羅州營將)으로 있었는데, 천품 이 인자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왕의 새서도 받았다. 신 미년 5월에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전은상(田殷祥) : 전운상의 재종이며 전시대의 아들이다. 자는 자현(子玄)이며, 숙종 갑신년(1704) 정월에 출생하다. 영조 병오년에 무과에 올라 임자년에 선전관으로 훈련주부가 되었고, 을 묘년에는 도총도사(都摠都事)가 되었다. 병진년에는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었으니 경력이 부족하여 도감파총 겸 향랑(都監把摠 兼 餉郞)에 이직되었다. 의주군관(義州軍官), 개성유수군관(開城留守軍官), 어영파총벽동군수(御營把摠碧潼郡守), 도감파총(都監把摠), 고령첨사(高嶺僉使), 금군장(禁軍將), 단천부사(端川府使)를 거쳐 임신년에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여 공주중군(公主中軍)이 되었다. 그때 성첩(城堞)과 군기, 공해(公廨)등을 일신하게 수리하여 그 공을 감사 김시찬이 크게 표창하였다. 계유년에는 도감병방(都監兵房)이 되었 으나 병조판서 이창의가 공을 아뢰어 가선대부 동중추로 승진하였다. 다시 오위장이 되고 을해년에 금위기사장(禁衛騎士將)에 제수되었다가 흥해군수(興海郡守)가 되었는데 고을을 잘 다스린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오르고 군민들은 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영조 계사년 10월에 70세로 세상을 떠났고, 묘는 서부면 궁리에 있다.
  • 전한상(田漢祥) : 전은상의 제. 청안현감(淸安縣監)
  • 전광집(田光集) : 전운상의 맏아들 영장(營將)
  • 전광국(田光勳) : 전운상의 둘째아들 칠원 현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전광훈(田光勳, 1722 ~ 1776) : 자는 양경(楊卿)이다. 1722년(경종 3)에 자천(紫泉) 전운상(田雲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50년(영조 2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53년(영조 29)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선전관을 시작으로 내금장(內禁將), 이천부사(伊川府使), 창원부사(昌原府使), 수어중군(守禦中軍) 부총관(副摠管),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 등을 역임하였다. 창원부사 재임 시 흉년이 들자 사재를 털어 고을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이같은 선행이 조정에 알려져 왕이 새서(璽書)를 내려 표창하고 마필을 하사하였다. 저서로는 《도요록(島擾錄)》이 있다. 묘소는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형산리에 있다.
  • 전광렴(田光濂) : 훈련주부(訓鍊主簿), 청송부사(靑松府使) 법성첨사(法聖僉使)
  • 전광우(田光羽) : 전일상의 맏아들, 법성첨사(法聖僉使), 부총관(副護軍)
  • 전광윤(田光尹) : 전천상의 맏아들, 낙안군수
  • 전광수(田光洙) : 전은상의 맏아들, 도총경력(都摠經歷)
  • 전의현(田義顯) : 전광훈의 계자 생부
  • 전광국 : 통정대부(通政大夫) 선전관, 훈련주부(訓鍊主簿), 횡성현감(行橫城縣監), 양덕현감(陽德縣監), 함경도 삼수부사(三水府使), 평안도 위원군수(渭原郡守)
  • 전문현(田文顯) : 선전관 정조 1년 1777 창성 부사, 정조 , 4년1780 전문현(田文顯)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병마절도사
  • 전덕현(田德顯) : 전은상의 손자, 선전관(宣傳官), 병마우후 (虞候),
  • 전익현(田翊顯) : 부수찬(副修撰), 부호군(副護軍), 곡산현감(谷山縣監), 오위장(五衛將), 황해병사(黃海水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전세진(田世鎭) : 선전관(宣傳官), 남해현령(南海縣令)
  • 전우성(田遇聖) : 어면만호(魚面萬戶), 경주영장(慶州營將), 훈련판관(訓鍊判官)
  • 전우룡(田遇龍) : 밀양현감(陽德縣監)

대한민국편집

  • 전윤철(田允喆) : 전 재정경제부 장관, 경제부총리, 19,20대 감사원장 (경은)
  • 전수안(田秀安) : 전 대법원 대법관 (경은)
  • 전용원(田瑢源) : 제13·14·16대 국회의원 (경은)
  • 전병헌(田炳憲) : 제17·18·19대 국회의원 (경은)
  • 전여옥(田麗玉) : 제17·18대 국회의원
  • 전하진(田夏鎭) : 제19대 국회의원이다.
  • 전락원(田樂園) : 파라다이스 그룹 창업주 (야은)
  • 전필립(田必立) : 파라다이스 회장 (야은)
  • 전재수(田載秀) : 제20대 국회의원 (경은)
  • 전정국(田柾國) : 방탄소년단 (경은)
  • 전숙희(田淑禧) : 수필가
  • 전혜린(田惠麟) ; 수필가

항렬자편집

  • 야은파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일(鎰) 口기(淇) 계(桂) 口희(熙) 준(埈) 口수(銖) 호(浩) 口식(植) 병(炳) 口곤(坤) 호(鎬) 口구(求) 상(相) 口열(烈) 기(基) 口종(鍾) 근(根) 口형(炯)
  • 뇌은파, 정선파, 선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