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전씨

담양 전씨(潭陽 田氏)는 전라남도 담양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의종 때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전득시(田得時)이다.

담양 전씨(潭陽 田氏)
관향전라남도 담양군
시조전득시 (田得時)
중시조전록생, 전귀생, 전조생
집성촌전라남도 고흥군, 장성군, 강진군
전라북도 부안군, 군산시, 정읍시
충청남도 홍성군, 논산시, 보령시
충청북도 음성군, 충주시, 제천시
경상남도 의령군
경상북도 울진군
자강도 강계시
주요 인물전균, 전록생, 전조생, 전운상, 전우, 전명운, 전영택, 전숙희, 전락원, 전상범, 전윤철, 전용원, 전용학, 전수안, 전소연, 전병헌, 전하진, 전여옥, 전재수, 전정국, 전희진, 전웅, 전미도,전수민
인구(2015년)155,018명
비고담양 전씨 대종회

역사편집

담양전씨(潭陽田氏)의 시조 전득시(田得時)는 고려전라도 담양(潭陽)에서 대대로 오랫동안 살아온 향리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중엽 때 전라도 담양에서 출생하고, 현량과(賢良科)로 천거되어 고려 의종 때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등을 역임하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담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분파편집

전희경(田希慶)의 아들 전녹생(田祿生)은 야은공파(野隱公派), 전귀생(田貴生)은 뇌은공파(牢隱公派), 전조생(田祖生)은 경은공파(耕隱公派)로 계파가 나뉘게 되었다.

전득시의 8세손인 전가식(田可植)을 시조로 하는 연안 전씨, 전조생의 7세손인 전균(田畇)을 시조로 하는 하음 전씨, 행주(고양)전씨[1], 전실(田實)을 시조로 하는 예산 전씨, 남원, 우봉, 평택, 개성 등은 담양 전씨에서 분파되었다. 담양 전씨 대동보에는 함께 등재하고 있다.

본관편집

담양(潭陽)은 전라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현재 담양은 조선시대의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와 창평현(昌平縣)을 1914년에 병합한 지역이다. 봉산면 · 무정면 이북지역은 대체로 옛 담양도호부 영역이고, 창평면 · 고서면 · 대덕면 · 남면 · 수북면 등 남부는 옛 창평현 지역에 해당한다.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고,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담주도단련사(潭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도단련사를 폐지하였고, 담양군으로 개편하여 나주(羅州)에 편입시켰다.

1172년(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원율현(原栗縣 : 담양군 금성면 원율리 일대)을 병합하였다. 1395년(태조 4) 군으로 승격하였고, 1399년(정종 1)에 부(府)로 다시 승격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담주에서 담양으로 개칭되어 도호부(都護府)가 되었으나, 1728년(영조 4)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담양군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1905년(광무 9)에 담양부를 담양군으로 고쳤고, 1908년(순종 2)에 폐지된 옥과군 일부가 담양군에 편입되었다.

인물편집

고려편집

  • 전순미 (田洵美) 고려】승려(僧侶), 본관은 담양(潭陽), 담양군 호장동정(戶長同正)으로 있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고려때는 사족(士族)․교속(敎俗) 양계(兩界)의 넘나듬이 자연스러워, 보통 3형제중에서 한사람은 승려(僧侶)가 되는 것이 사족화의 지름길이기도 하였으며 사족들의 의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담양(潭陽)에는 고려전기부터 담양전씨가 호장을 세습하면서 사족화를 꾀해왔겠는데, 문헌으로는 전순미가 가장 빠르다.   숙종3年(1098) 간기(刊記)가 있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 지본(智本), 李元基 所藏本〕에는 “潭陽郡戶長同正 田洵美, 亦 出母 利往願之成” 이라 적혀있다.※ 문헌 : 대방광불화엄경, 한국사연구휘보(-33, 1981. p57)
  • 전덕소 (田德素) 1107(예종2)-1174(명종4) 승려(僧侶), 원각국사(圓覺國師). 초명은 子美. 字는 혜약(慧約). 본관은 담양(潭陽), 예종2年(1107) 3月6日. 母 남원군부인(南原郡夫人) 량씨(梁氏)가 감몽(感夢)하여, 경락(京洛)에서 부군(夫君)의 임지〔任地: □□州守나 人名과 함께 판독불가〕로 함께 가는 도중, 그 주의 경계(境界)에 이르렀을 저녁에 아들을 낳으니 父母가 귀히여겨 ‘子美’라 칭하였다. 9세 때 대선사(大禪師) 교웅(敎雄)의 門下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어릴때부터 영특하여 仁宗이 보고 이 중이 장차 大法師가 될것이라고 감탄하더니, 仁宗6年(1128)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의종(毅宗)때 大禪師가 되었다가 明宗1年(1171) 國師에 올랐다. 그는 일찍이 여러 名山을 두루 유력(遊歷)하였는데, 울주(蔚州) 영취산(靈鷲山)에서 쉴때는 四方의 학자들이 모여들기도 하였으며, 의종5年에는 금경(金經)을 베껴썼다. 하루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맬 때 염불로 노도를 잠재워 배를 구한 기적을 보였으며, 의종18年 여름의 대한(大旱)때는 文明宮에서 설경회(說經會)를 열어 비가 오게하는등 영험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明宗4年 11月 천수사(天壽寺)에서 입적(入寂)하니 王의 命으로 王師의 유골을 양산(陽山) 관내 지륵산(智勒山) 영국사(寧國寺)에 안장하였다. 시호(諡號)는 圓覺이다. 碑가 지금까지 寧國寺에 남아있다. ※문헌 : 영국사, 원각국사비-소재;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 전숙몽 (田淑蒙) 1290年代 - ? 문신(文臣) 본관은 담양(潭陽), 부는 균 처부는 상호군 김백유〔金伯綏 : 彦陽金氏, 定山君〕 자는 길안 사위는 최영(崔永祉) 충혜왕 복위 5년(1344) 5월 좨주〔祭酒 : 正3品 이상의 학덕이 높은 사람으로서 충당하여 성균관에 교회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주로, 석존의 제행을 주관하였다.〕로서 왕의 사부가 되었다. 이어서 충목왕 1년(1345) 6월 좨주로서 왕의 사부가 되었으며 서연에서 갱일 시독하였다. 또, 좨주로서 국자감의 시관이 되어 안보린(安保麟) 등을 뽑았으며 이어 右代言이 되었으나 덕녕공주〔德寧公主 : 왕의 모후〕의 미움을 사 1345년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 풀려나서는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풀려나서는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 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씨족원류〔氏族源流 : 安陰縣監 趙從仁(1607-1683) 이 엮은 각 씨족들의 계보〕
  • 전록생(田祿生, 1318년~1375년) : 고려의 문신.자는 맹경(孟耕). 호는 야은(埜隱).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제주사록(濟州司錄)․전교교감(典校校勘)을 지냈다. 1350년(충정왕2)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했다. 1357년(공민왕6)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간의(諫議) 이색(李穡), 사간(司諫) 이보림(李寶林), 정추(鄭樞) 등과 함께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단을 극론(極論)했고, 이 해에 전라도 안렴사(安廉使)가 되었고, 11월에 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남순(南巡)하게 되자 시어사(侍御史)로 왕을 호종했다. 1362년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고, 벼슬을 여러 번 옮겨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듬해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에게 예물(禮物)을 드리고 돌아와 밀직지학(密直指學)이 되고 나중에 계림윤(鷄林尹)에 제수되었다. 그후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았다. 1371년에는 이색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그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선발하였다. 1373년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禑王)의 사부가 되었으며, 다음해는 개성부사(開城府事)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었고, 추화찬화보리공신(推化贊化輔理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1375년(우왕1) 간관(諫官)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원의 배척과 이인임(李仁任)의 목을 벨 것을 청하니 왕이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과 지윤을 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이들의 말이 박상충(朴尙衷)과 전녹생에게 관련되므로 최영이 이들을 국문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모두 가던 도중 죽었다.
  • 전귀생(田貴生) : 자(字)는 중경(仲耕), 호(號)는 뇌은(뇌隱), 시호(諡號)는 문혜(文惠). 고려 때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했다. 고려가 기울어지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이성계(李成桂)가 누차 벼슬할 것을 권유하자 굳이 사퇴하고 결국 절해고도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의 몰년(歿年)은 아무도 모른다. 두문동 72현으로 두문동서원에 배향됨
  • 전조생(田祖生) : 자는 계경(季耕). 호는 경은(耕隱). 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희경(希慶)이며, 어머니는 웅신서씨(熊神徐氏)로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성윤(成允)의 딸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에 급제하였고, 1346년(충목왕 복위 2) 이제현(李齊賢)·이곡(李穀) 등과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찬정(撰定)하였고, 우탁(禹倬)을 따라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강명(講明)하였다. 1349년(충정왕 1) 찬성첨의부사(贊成僉議府事)에 제수되었고, 1351년 다시 찬성첨의부사에 올랐을 때 왕이 강화에서 손위(遜位)하자, 이강(李岡)·박사신(朴思愼)·한수(韓修) 등과 호종(扈從)하였다가 그길로 운둔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계자시(誡子詩)」와 「경학문(警學文)」을 지어 후진을 계도하였다. 태암서원(泰巖書院)에 별향(別享)되었고, 구산서원(龜山書院)·소계서원(蘇溪書院) 개성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 전유년  田有年  1260年代 - ?군지사(郡知事). 본관은 행주(幸州) 림(霖)의 父, 벼슬은 지정성군사【知旌善郡事 : 정선군을 다스리는 지사 6品 벼슬】   확실한 年代는 알 수 없으나 강원도지(江原道誌)의 정선군 선생안【先生案 : 역대고을 수령의 취임순서를 적은 책】에 의하면, 田有年 후임(後任)이 25名까지 기록되었고 다음이 리조(李朝)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고려가 망하기 前 7․80年 쯤 즉, 1310~20年代의 군지사(郡知事)일 것이다. ※ 문헌 : 강원도지-정선군지
  • 전  림 田  霖   1290年代 - ? 文臣. 본관은 행주(幸州) 지정선군사(知旌善郡事) 유년(有年)의 아들. 벼슬은 우윤(右尹) 공민王5年(1356) 5月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기철이 공민王의 배원정책(排元政策)에 대항하다가 반란혐의로 주살(誅殺)되자, 그의 추종세력을 숙청하였다 유배된 당시 田霖의 신분을 전우윤(前右尹)이라 기록하였다. 이로써 田霖의 당시 나이를 치사(致仕)한 上老人은 아님을 짐작케한다. 왜냐면, 前 무엇은 치사한 전직같지만, 上老人을 유배하는 사례가 없었고 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헌 : 고려사(奇轍列傳)
  • 전자수(田子壽) : 자는 백인(伯仁), 호는 회정(晦亭)이다. 찬성사(贊成事)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의 장손이며, 전순(田順)의 장남이다. 고려 말 품계가 종이품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첨의평리(僉議評理) 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다. 사간(司諫)으로 강원도안렴사(江原道按廉使)가 되어 평해(平海:지금의 울진 지역)를 순시하던 중 뛰어난 산수에 반하여 벼슬을 버리고 양진재(養眞齋)에 은거하며 만년을 보냈다. 의령 태암서원(泰巖書院)과 울진 경문사(景文祠)에 봉안되어 있다.

-이설: 담양전씨 대동보에는 전조생의 장손으로 되어 있으나 1) 전자수의 급제 연도가 1353년,문과방목이 아닌 족보에 기재된 전조생의 급제연도 1336년 2)족보상 백조부인 전녹생(1318~1375)의 생몰년도를 감안해도 조손관계 성립은 어렵다. 전조생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전민변정도감의 사라는 직책으로 등장한다. 전자수와 비슷한 연령대임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조 방목에서 전자수의 후손들이 본관을 '행주'라고 적는 것에 또 다른 추론이 가능하다.

조선편집

대동보의 내용 중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문무과 방목에서 확인되는 인물

  • 전가식(田可植) : 호는 성암(省菴). 증조부는 문혜공(文惠公) 전귀생(田貴生), 할아버지는 전한(田漢), 아버지는 전무(田畝)이다. 1399년(정종 1)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태종의 세자 시절에 세자와 유일지사(遺逸之士)를 논하게 되었을 때 전가식은 “길재(吉再)가 강직하고 집에서는 효행이 돋보였다”고 말하였다. 1401년(태종 1)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검소한 풍토를 솔선할 것이며, 안일과 탐욕을 경계할 것이며, 간언(諫言)을 받아들일 것이며, 희노를 함부로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서장관(書狀官)과 정사(正使)로서 중국에 다녀왔다. 1449년(세종 31) 84세로 세상을 뜨자 세종이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상하게 하였다.[2]
  • 전균(田畇, 1409년 ~ 1470년) : 어릴 때 내시부(內侍府) 소속으로 승진을 거듭하여 동첨내시부사(同僉內侍府事)가 되고, 1447년(세종 29)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를 거쳐 1452년(문종 2) 동지내시부사(同知內侍府事)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제거한 계유정난 당시에 수양대군을 적극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이 되고 강천군(江川君)에 봉하여졌으며,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에 승진되고, 1466년 하음군(河陰君)으로 개봉(改封)되고, 1468년 품계가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환관으로 공신이 되고 품계가 1품에 이른 것은 전윤이 처음이다. 죽은 뒤에 봉상시에서 양경(襄敬)이라는 시호를 의정(議定)하였으나, 사헌부의 반대로 내려지지 않았다.
  • 전복(田馥): 전빈(田嬪)의 아우로 호는 형봉(衡峰)이다. 인조 때에 진사로 임인에 문과에 올라 예 조좌랑(禮曹佐郞), 공조정랑(工曹正郞)의 내직에서 만경현령(萬頃縣令), 신천(信川)군수, 강 진현감, 보성(寶城)군수, 풍기(豊基)군수, 안동(安東)부사를 역임하였는데 문명이 높았고 치 민(治民)을 잘 하여 도처에서 명망이 있었다. 상서 이지태(尙書 李砥台), 교리 이낙보(校理 李樂甫) 대간 남이성(大諫 南二星) 등과 의기가 상합하였다고 한다.
  • 전실(田實) : 자는 약허(若虛)이고, 호는 구재(龜齋). 고려조의 경은 전조생의 증손이다. 당세에 문장이 높았는데 그의 백숙의 두 아들도 문명이 높아 당세에 삼소라고 하였다. 벼슬은 참사내첨시상의주부(參事內瞻侍尙衣主簿), 사축사별제, 은률(殷栗), 금천(衿川), 고령 (高靈), 현감에 있었다. 유고와 일록(日錄)이 전하고 있다.
  • 전좌명(田佐命, 1424년 ∼ 1521년) :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성암(性庵). 중종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의 외할아버지,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윤호(尹壕)의 장인이며, 중종 때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지낸 김계우(金季愚)의 외조부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온 몸을 쓰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지 7년이나 되었는데, 늘 자기가 약을 달이고 몸소 오줌 그릇을 받들었으며, 어머니가 죽으매 무덤을 지켰다. 이후에 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와 합장(合葬)하고 4년 동안 여막에 살았으며, 상기(喪期)를 마쳤는데도 떠나지 않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법을 들어서 개유(開諭)했으나, 또 3월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전한다. 1432년(세종 14)에 예조에서 효행 있는 자에게 정문(旌門)을 세우고 서용(敍用)토록 아뢴 바 있다. 경북 구미에는 전좌명 효자 정려각(田佐命孝子旌閭閣)과 무이재(武夷齋)가 있다. 무이재는 그를 추모하는 곳으로, 1809년(순조 9)에 후손이 건조하여 의소(議所)로 삼았는데, 명종(明宗)의 어제시(御製詩)인 ‘백조함향합 남산 대전민(白鳥啣香盒 南山代田民)’가 본판에 양각하여 달려 있다.
  • 전윤평(田允平, 1455년 ∼ 1505년) :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의 6세손이며, 전수명(田守明)의 아들로 태어났다.전라북도 옥구(沃溝)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 전윤(田潤, 1554 ∼1637) : 자는 경윤(景潤), 호는 야곡, 담양인 경은 전조생의 후예이다. 그 아버지 녕 부 직장 응진은 명종 갑인 7월 26일에 출생하여 별시 무과에 합격하고 내금부 선감주부(內禁府 繕監主簿), 훈첨사복장(訓僉司僕裝), 동중추북청진영(同中樞北靑鎭營), 울진, 해남현감, 울산, 영광, 고부군수, 인동부사를 거쳐 선조조에는 호성원종공신일동(扈聖原從功臣一等) 에 기록되었다. 임진년에 서경을 향해 파천(播遷)할 때 호위장(扈衛將)이 되어 왕과 궁인 백관들이 무사하 게 임진강을 건너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장단까지 가는 도중에 왕이 수라를 들지 못하게 되자 전윤이 마을에 나가 밥과 국을 얻어 왕에게 올렸다. 왕이 음식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사람들이 먹지를 못하고 나만 들면 어찌하느냐”고 하며 수라를 들지 못하니 영의정 유 성룡이 조밥에 나물국이지만 충성스런 백성이 올리는 것이니 드시라고 아뢰였다. 전윤은 이항복 등과 의논하여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그 후 다시 서울까지 환도하였다. 그때 명나라 군사가 방패 삼천 개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이 모두 유리하고 물자 가 없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그때인지라 조정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도다. 그러나 전윤 은 그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하고 며칠 안으로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서울 근처에 있는 무덤을 파서 널등을 꺼낸 뒤 방패 삼천개를 무난히 만들어 명나라 진중에 보냈 다. 조정은 물론이요, 명나라 진중에서도 모두 경탄하였다고 한다. 인조 정축년에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은하면 조곡에 있다. 그 후 5세손 운상이 가장 (家狀)을 짓고 전재 임헌회가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전한다.
  • 전언룡(田彦龍, 1555년 ∼ 1622년) :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담양(潭陽)이며, 지금의 전라남도 군산시(群山市) 나운동(羅雲洞)에서 태어났다.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의 10세손이며, 전필규(田畢奎)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며 공을 세워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1894년(고종 31)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하였다.
  • 전영방(田永芳, 1568년 ∼ 1597년) : 조선 후기 무신. 전라남도 옥구읍(沃溝邑) 다기(多岐)에서 태어났다. 야은(野隱) 전녹생(田祿生)의 10세손으로 부친은 전두규(田斗奎)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하였으며, 1594년(선조 27) 형 전영년(田永年)과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이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錄勳)되어 철권(鐵券)이 내려졌고, 전라남도 옥구 옥산사(玉山祠)에 배향되었다.
  • 전득우(田得雨, 1574년 ∼ 1638년) :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시재(時哉), 호는 송애(松崖). 아버지는 총관 윤(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평양 대동문장(大同門將)으로 있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기교위가 되어 관군을 증모하고 병기를 정비, 전투준비를 하던 중 임금이 도성을 떠나 파천(播遷)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으로 달려가서, 한강을 건너 수강장(守江將) 김명원(金命元)의 별장인 부장 이응기(李應棋)의 진으로 달려갔다. 그는 ‘송애(松崖)’라는 군기를 높이 세워 적을 공격하니 적이 그 깃발을 보고 모두 피하였다. 뒤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왜병은 ‘송(松)’자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송애의 깃발을 피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 뒤 영남순검사가 되어 군정을 살폈고,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완도의 뱃길을 여는 방략(方略)을 세우기도 하였다. 벼슬이 좌승지에 이르렀다.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 전벽(田闢, 1586년 ∼ 165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자서(滋墅), 호는 서정(西亭). 대복(大福)의 아들로, 대록(大祿)에게 입양되었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계속 독서에만 전심하다가 1612년(광해군 4) 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때 전 박사 김직재(金直哉)의 아들 백함(百緘)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속에 문과출신 전벽도 있다는 황해병사의 비밀보고와, 양서(兩西: 평안도·황해도)에서 걸객행세를 하던 김제세(金濟世)의 자복(自服)에서도 그가 모역에 끼어 있다는 무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보령현감이 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주병(州兵) 1,000명으로 인조를 공주에 호종(扈從)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전향종사관(轉餉從事官)으로 참전하였다. 1638년에 예조정랑으로 명나라를 공격하는 청나라 원병장 이시영(李時英)의 종사관으로 출정하다가 의주에 이르러 출병을 반대하고 돌아왔으며,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이르러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평양 송호사(松湖祠)에 제향되었다.[3]
  • 전내적(田乃績, 1599년 ∼ 1655년) : 조선 후기의 문신·효자.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공복(公復), 호는 석포(石浦). 부사 전득시(田得時)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스승을 따라 외지에서 생장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어버이가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소학》과 《심경 心經》 등을 애독하였다. 평시에 항상 조용히 정숙하게 앉아서 글을 읽었으며 함부로 웃지 않았다. 어버이가 중병에 걸리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기도 하였으며, 밤마다 향을 사르며 어버이의 죽음을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효행으로 1652년(효종 3)에 서빙고별검(西氷庫別檢)으로 천거되었다. 그 뒤 종부시주부가 되었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다.
  • 전세록(田世祿) : 조선 중기 의병.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선천부사 기협(奇協)의 별장으로 의병을 모집, 인산(釰山)의 월봉(月峯)에서 내침한 적에게 투석전으로 맞서 이를 물리쳤고, 적이 재차 공격을 가해오자 수명의 장정과 함께 복병전으로 이를 기습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때 의주 사람 이성득(李成得)이 적에게 항복하고 그 심복이 되어 의주·용천 사이를 내왕하며 적의 군량을 보급하자 계략을 써서 그를 잡아 죽였다. 그 용맹에 탄복한 명나라 도독 모문룡(毛文龍)의 보고로 판관이 되고,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 전만춘(田萬春,1659 - 1738) : 字는 유안(幼安). 본관은 담양(潭陽). 주부(主簿) 기령(起寧)의 넷째아들. 母는 의인(宜人) 순흥안씨(順興安氏) 外祖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여태(汝泰).   숙종17年(1691) 무과에 급제하여, 24年 윤3月 소근포(所斤浦 : 충청도진관) 수군만호(水軍萬戶 : 종4品)로서, 새 배를 만드는데 다른 배에다가 겉모양만 바꾸었으므로 파직되고 추국되었다. 숙종29年(1703) 12月. 훈련원 판관(判官 : 종5品)에 임명되어 내직에 있다가 숙종39年 9月 10日. 경상도 함안군수(咸安郡守 : 종4品)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숙종41年(1715) 2月 함안군수가 고향친구를 데려다가 관아에서 먹여주고, 옥송(獄訟)을 말만 듣고 처결하며 뇌물을 좋아하니 팍직하라는 청이 있었으나 임금이 불윤하여 임기를 채웠다.숙종44年(1718) 8月 2日. 평안도 상원군수(祥原郡守 : 종4品)에 신수(新授)되었고, 영조1年(1725) 2月에는 평안도 벽동군수(碧潼郡守 : 종4品)에 부임하였다. 이때 성을 높히 쌓고 객관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었는데 뒷날 평안감사 송진명(宋眞明)이 이를 보고 감격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후임 벽동군수더러 잘 보존토록 당부하였다한다.영조7年(1731) 4月 경상도 진주진영장(晋州鎭營將 : 병마우후→虞侯 종3品)에 임명되었으나, 田萬春의 호노(戶奴)가 정장(呈狀)하기를 “상전께서는 나이도 많고, 지금 신병중이므로 천리밖 먼 진주진에 부임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니 전하기를 쉬도록 허락하였다.영조14年(1738) 11月 26日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종2品)에서 나이도 많고 노병이 위독하여 출근할 수 없으니 개차(改差)하도록 윤허하다.3代를 추증(追贈)하니, 父 기령(起寧)은 가선대부 호조증참판(嘉善大夫 戶曹贈參判 : 종2品)이고, 祖 득우(得雨)는 통정대부 승정원증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贈左承旨 : 正3品 堂上官)이고, 祖 협(浹)은 통훈대부 병조증참의(通訓大夫 兵曹贈參議 : 正3品 堂上官)이다.※ 문헌 : 승정원일기
  • 전만최(田萬最,1653- 1730) : 전시원의 생부, 현감(縣監). 字는 여선(汝善). 본관은 담양(潭陽). 주부(主簿) 기령(起寧)의 둘째아들 중부(仲父) 기직(起稷)의 系子, 母는 죽산박씨(竹山朴氏) 外祖는 주부 박무(朴茂) 숙종2年(1676) 무과에 급제하여 내직에 있다가 숙종31年(1705) 4月 1日 경상도 칠원현감(漆原縣監 : 종6品)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김해진관(金海鎭管)의 칠원병마절제도위(漆原兵馬節制都尉 : 종6品)를 겸하여 숙종33年 8月까지 선치(善治)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섰다. ※ 문헌 : 승정원일기   ※ 문헌 : 승정원일기, 경상도 칠원읍지
  • 전시원(田始元,1677 - 1731) : 군수(郡守). 字는 대숙(大叔) . 본관은 담양(潭陽), 生父는 현감(縣監) 만최(萬最). 백부(伯父) 만석(萬石)의 系子. 母는 남원윤씨(南原尹氏) 外祖는 진사(進士) 윤이진(尹以進).숙종28年(170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숙종32年 8月. 함경도 갑산진관(甲山鎭管) 운룡 병마만호(雲龍, 兵馬萬戶 : 종4品)에 임명되어 부임하직하였다. 숙종43年(1717) 5月. 황해도 금천군수(金川郡守 : 종4品)때, 사헌부(司憲府)에서 다시 탄핵(彈劾)하기를, ‘본래 보통 무변(武弁)으로서 이력없이 다만 금영(禁營 : 內禁衛와 五衛營의 선망기관)의 인연으로 분에 넘친 관직에 제수되었으므로 개차(改差)하소서.’하였으나 임금이 듣지않았다. 同年 7月.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 : 종4品 정원4人)에 영전되어 내직에 들었다.경종3年(1723) 8月 10日. 전라도 보성군수(寶城郡守 : 종4品)에 임명되었다. 보성읍지에는 군수 田始元의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가 세워졌다고 기록하였다.아들 운상(雲祥)이 2品官이어서 3代를 추증(追贈)하는 법에 의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 參判)이 증직(贈職)되었다.배(配)는 영인(令人 : 外命婦 4品)에서 정부인(貞夫人 : 外命婦 2品)에 추증된 한산리씨(韓山李氏), 1676 - 1754 妻父는 병조정랑(兵曹正郞) 리정래(李禎來), 4兄弟를 두었는데, 운상(雲祥)․일상(日祥)․우상(雨祥)․천상(天祥) 모두 무신으로 유명하다. ※ 문헌 :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 전시혁(田始赫,1697 - 1742) : 부호군(副護軍). 字는 대경(大卿). 본관은 담양(潭陽). 동지(同知) 만춘(萬春)의 둘째아들. 모는 정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 外祖는 참봉 수(수). 경종2年(1722) 무과에 급제하였다. 영조4年(1728) 7月 11日. 의금부(義禁府) 가도사(仮都事 : 종5品)로서, 잉읹ㅈ麟佐 : 반란자 1728年 참형)란의 죄인 송(宋) 모를 잡아왔다. 영조6年(1730) 11月.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 : 종5品, 정원4人)에 임명되었다. 영조13年(1737) 윤9月. 경상도 장기현감(長鬐縣監 : 종6品)에 부임하여 다음해 시작하였다. 17年 6月. 부사직(副司直 : 종5品)에 임명되고, 또 부호군(副護軍 : 종4品)에 승진하였다. ※ 문헌 : 승정원일기, 각사등록(77 영조무신 역옥추안), 장기읍지 무신 3월에 이인좌, 박필진 등이 모반하 였다. 적장중 나승대는 용력이 과인한 자로 나주에서 준동하고 있었다. 이때에 전시혁의 질 일상(日詳)이 나주진영장(羅州鎭營將)으로 토포(討捕)토록 하였었다. 조정에서는 전시혁을 금부도사로 임명하여 나숭대를 나포하고 이에 분무원종일등훈(奮武原從一等勳)으로 공을 치하하였다. 또한 장기현감으로 있을 때에 흉년을 당하자 양곡 260여석을 내놓아 백성들을 구제한 공으로 감사(監司) 유척기(兪拓基)가 계문함으로써 유지(諭旨)와 마필(馬匹)을 하받 았다. 임술 5월에 4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남당 한원진이 조만에서 「功各奉爲親」이라 한 것은 평일에 그의 효행을 말한 것이다.
  • 전운상(田雲祥, 1694(숙종 20)∼1760(영조 36) : 무신(武臣). 字는 룡백(龍伯). 호는 자천(紫泉). 본관은 담양(潭陽). 군수 시원(始元)의 맏아들. 母는 정부인 한산리씨(韓山李氏). 外祖는 병조정랑 리정래(李禎來). 숙종43年(1717) 무과에 급제하여, 44年 선전관(宣傳官)으로 입사(入仕)하였다. 45年 12月 22日 부사맹(副司猛 : 종8品)에 임명되었다. 경종3年(1723) 1月 1日.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 : 종5品)으로 비변사(備邊司) 무랑청(武郞廳)에 근무하기 시작하여, 5年 9月까지 도총부(都摠府)의 도사(都事 : 종5品)․경력(經歷 : 종4品)을 역임하면서 계속 근무하였는데, 이는 글씨를 잘쓰고 남달리 매사에 영민하였기때문이었다. 영조즉위년(1724) 9月 28日. 함경도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 : 종3品)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외직에 나갔다. 비변사 무랑청에서 의문이 있을때는 오랫동안 근무했던 田雲祥을 불러 자문하였다. 영조1年(1725) 11月. 어떤일로 문책이 있었으나 定平에서 선치(善治)하였기로 유임되었다. 영조3年 2月 4日 정평부사로서 천거단자(薦擧單子)를 써올렸는데, ‘臣’字가 빠져 추고되었으나 곧 내금위장(內禁衛將 : 正3品, 정원3人, 궁성의 경비장수)에 발탁되어 내직에 들었다. 영조6年(1730) 11月 17日 내금위장 田雲祥이 스스로 정장(呈狀)하기를 “거대(擧對 : 임금의 질문에 대답)를 파한 뒤 밤에 귀가하다가 낙상(落傷)이 심합니다. 달포안에는 기동할 수 없으니 아룁니다.”하니, 숙위지장(宿衛之將)의 자리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다고 개차(改差)토록 윤허(允許)하였다. 영조7年 2月 21日. 강원도 삼척포진(三陟浦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 종3品) 로서, 도둑을 다스릴 때 형살(刑殺)이 지나쳤다고 파직을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영조11年 12月 4日 충청도 해미현감(海美縣監 : 종6品)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영조12年(1736) 7月 16日. 평안도 선천도호부사(宣川都護府使 : 종3品)에 임명되고, 14年 9月 16日 공홍도(公洪道-1735年 5月 충청도를 개칭)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正3品, 정원2人인데, 1人은 관찰사가 겸직)에 승진되어 무신으로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였다. 그러나 한달 뒤 의금부(義禁府)에서 전의 해미현감때 흉년의 굶줄임에 대처하지 못한 죄를 들어 아뢰기를, “지금 田雲祥은 공홍수사(公洪水使)에 재임중이므로 예에 의하여 부(府)의 도사(都事)를 파견하여 교대(交待)한 뒤에 잡아오겠습니다.”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영조15年 2月 15日. 경기도 안성군의 양성현(陽城縣) 정배(定配)에서 풀려났다. 5日 뒤 아우 日祥과 함게 호군(護軍 : 正4品, 정원12人)에 단부(單付) 되고, 同年 3月 16日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12月 17日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正3品)에 임명되었다. 영조16年(1740) 6月 18日 실록(實錄)과 문헌비고(文獻備考)의 병고주수(兵考,舟帥)에 의하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서 해골선(海鶻船)을 만들었는데, 요약하면 “몸체는 작지만, 가볍고 빨라서 바람을 두려워할 걱정이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해골선의 발명을 중요시하여 통영(統營)과 여수수영(麗水水營)으로 하여금 그 제도(制度)에 따라 만들게 하였다. 윤6月에는 각 도의 수영(水營)에서도 해골선을 만들게 하였다. 영조17年 6月 2日. 우후(虞侯 : 각 도에 배치된 병마절도사 밑의 종3品 무관직)에 임명되었고, 18年 8月 16日 경기도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 : 종3品)로서 진장(進狀)하기를 “일찍심은 벼는 먹을 것이 있으나 늦게심은 만생종은 잠초같아서 흉년입니다.”하였다. 이해말에 박문수(朴文秀)가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갔는데, 부사의 진장한바가 옳았다는 것과 흉년에 잘 대처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영조19年 10月 병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의 혐의에 연루되어 잠시 말썽이 있었으나,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변명하기를, “田雲祥은 중용(重用)되고 아니되고는 원래부터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였으므로 무사하였다. 영조22年(1746) 1月.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종2品)에임명되었다. 이듬해 1月 경기도 죽산부사(竹山府使 : 종3品)에 부임하여 8月 9日 대가(大駕)가 竹山을 지날 때 차사원(差使員)이 되었으며, 입시(入侍)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영조26年(1750) 4月. 강원도 춘천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 : 종3品)에 임명되어 부임하직을 드렸다. 28年 6月 춘천지방의 풍헌(風憲 : 鄕所職, 面이나 里의 일을 맡음)이 호소하여, 지평 리계창(李啓昌)이 청하기를, “부사 田雲祥은 농번기에도 공사를 가리지 아니하고 백성을 많이 동원시켜 민폐를 끼쳤으니 좌천시키소서.”하였으나, 물사(勿辭)하라고 답하였다. 영조29年(1753) 5月. 어영청(御營廳) 별장(別將)으로 내직에 들어 대가(大駕)를 호종하다가, 8月 경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正3品, 정원2人, 1人은 관찰사가 겸함)에 임명되고, 곧 교동수사(喬桐-강화 水使)와 겸하였다. 영조33年(1757) 1月 부호군(副護軍)으로 무보직이었으나 7月에는 용호위장(龍虎衛將 : 正3品, 내금위장을 개칭)에 제수(除授)되었다. 곧 황해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종2品, 정원2人, 1人은 관찰사가 겸함)로 나갔으나, 영조37年 5月 각처에서 천주교가 퍼지자 이것을 막지못한 책임을 물어 관찰사 심발(沈발)과 함께 병사에서 파직되었다. 영조35年 5月 금군별장(禁軍別將)으로 내직에 들어 숙위(宿衛)를 맡았고, 8月 1日에는 무과 시험관을 리윤성(李潤成)을 데리고 맡았다. 9月에는 용호대장때 즉 용호위장때의 공으로 숙마(熟馬)가 하사되었다. 10月에는 평안병사․통제사등에 추천되기도 하였으며, 영조36年 2月에는 북병사에 두 번이나 추천되었으나, 결국은 함경도 회령부사(會寧府使 : 종3品, 동반외직)에 그쳤다. 영조36年(1760年) 4月 10日. 회령부사 재직중 졸서(卒逝)하니 2品직에 추서하고, 운구(運柩)하는 예산(禮山)까지의 연도에는 각 고을의 담군(擔軍)을 동원하도록 각 도에 분부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고성리씨(固城李氏) 1693-177 . 妻父는 리가(李榎). 3男 1女를 길렀는데 3兄弟 광집(光集)․광국(光國)․광훈(光勳)은 모두 무신으로 유명하다. 사위는 김상옥(金相玉 : 海豊人. 捕將) 묘는 충청도 예산군(禮山郡) 사천면(斜川面) 수덕산(修德山) 주봉(冑峯)밑부의 묘 왼쪽 간좌(艮坐)에 합폄(合窆)이다. 비갈(碑碣)이 서있다. 순직(殉職) 뒤 2品으로 환원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 종2品)이 되고 위 3대를 추증(追贈)하였다. ※ 문헌 :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문헌비고
  • 전광옥(田光玉, 1694년 ~ 1761년) : 조선 영조 때 문관. 初名(초명) 始大(시대). 자 德種(덕종). 호 澗松堂(간송당). 본관은 행주(幸州). 父 嘉善大夫 龍驤衛副護軍 一成(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 일성). 일찍 학문에 전념하여 영조 1년(1725)에 司馬試(사마시)에 급제하고, 동왕 23년(1747) 文科 甲科(문과 갑과)의 제3인 곧 探花郞(탐화랑)으로 급제, 靖陵直長(정릉 직장)에 除授(제수)되었다. 이듬해에 司憲府監察(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이후 朝奉大夫 成均館直講, 通訓大夫 幽谷道察訪(조봉대부성 균관직강, 통훈대부 유곡도찰방) 등을 역임했다. 기개와 도량이 활달하고 마음이 공명정대하여, 흉년에는 祿俸(녹봉)을 나누어 궁한 백성들을 구제했고, 고향 경상북도 영덕군 寧海(영해)로 낙향할 때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찢어진 우산 하나와 해어진 獤皮(돈피) 갑옷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諸賢(제현)들이 ‘山南宿儒(산남숙유, 영남의 명망 높은 선비)’라 칭송했으며 문집에 ‘澗松堂集(간송당집 3권)’이 있다.
  • 전일상(田日祥, 1700 ~ 1753) : 자는 희중(羲中), 호는 석천(石泉)이다.전운상의 동생 1661년(숙종 1)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관직은 내직으로 선전관(宣傳官), 어영수어천총도감(御營守禦千摠都監), 우림위장(羽林衛將),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고용첨사, 삼척영장, 단천·구성·거창·경원·칠곡·무산·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왕의 밀지(密旨)를 받고 나주 지방에서 토적 나숭대를 체포하였다. 묘소는 충청남도 홍성군 은하면 대율리에 있다.
  • 전천상(田天祥, 1705 ~ 1751) : 통어사 전운상의 넷째 아우. 자는 경문(景文), 호는 죽암(竹菴). 어려서 부터 천재라는 평을 받은 그는 경사, 병법, 술수 등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글씨에도 일가견 을 가지고 있었다. 계묘년에 음관(陰官)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병오년에는 무과에 합격하 여 비랑훈련첨정(備郞訓鍊僉正)을 거쳐 무신년에는 희천군수(熙川郡守)에서 수안군수(遂安郡守)로, 기미년에는 여주목사, 계해년에는 춘천부사(春川府使), 병인년에는 하동부사(河東府使)로 있었다. 무진년에는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나주영장(羅州營將)으로 있었는데, 천품 이 인자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왕의 새서도 받았다. 신 미년 5월에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전은상(田殷祥,1704 ~ 1784) : 전운상의 재종이며 전시대의 아들이다. 자는 자현(子玄)이며, 숙종 갑신년(1704) 정월에 출생하다. 영조 병오년에 무과에 올라 임자년에 선전관으로 훈련주부가 되었고, 을 묘년에는 도총도사(都摠都事)가 되었다. 병진년에는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었으니 경력이 부족하여 도감파총 겸 향랑(都監把摠 兼 餉郞)에 이직되었다. 의주군관(義州軍官), 개성유수군관(開城留守軍官), 어영파총벽동군수(御營把摠碧潼郡守), 도감파총(都監把摠), 고령첨사(高嶺僉使), 금군장(禁軍將), 단천부사(端川府使)를 거쳐 임신년에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여 공주중군(公主中軍)이 되었다. 그때 성첩(城堞)과 군기, 공해(公廨)등을 일신하게 수리하여 그 공을 감사 김시찬이 크게 표창하였다. 계유년에는 도감병방(都監兵房)이 되었 으나 병조판서 이창의가 공을 아뢰어 가선대부 동중추로 승진하였다. 다시 오위장이 되고 을해년에 금위기사장(禁衛騎士將)에 제수되었다가 흥해군수(興海郡守)가 되었는데 고을을 잘 다스린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오르고 군민들은 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영조 계사년 10월에 70세로 세상을 떠났고, 묘는 서부면 궁리에 있다.
  • 전한상(田漢祥,1711~ 1767): 字는 운오(雲五) 시대(始大)의 셋째아들.영조5년(1729) 무과에 급제하였다. 영조23년(1747) 5월 훈련원 주부(종6품)에 임명되고 25년 3월 전라도 낙안군수(종4품)에 임명되어, 순천진관의 낙안 병마동첨절제사(종4품)을 겸하였다.※ 문헌 : 승정원일기
  • 전광집(田光集,1713 ~ 1756): 字는 성지(成之) 병사(兵使) 운상(雲祥)의 맏아들. 영조19년(1743)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정(종7품), 비변사의 무랑청(종6품)에 근무하였으니 이는 부전자전으로 부친을 닮아 글씨도 잘쓰고 남달리 영민하였기 때문이다. 영조24년(1748) 오위도총부 경력(종4품)에 임명되어 무관으로서 승승장구하다가 영조32년에는 내금위장(정3품)에 임명되었다. 영조32(1756) 전라도 순천진영장(종3품) 재직중 사망하니 나이 불과 43세였다. 아들 익현(翊顯)은 무신으로 저명(著名)하다. ※ 문헌 : 비변사등록, 승전원일기
  • 전광국(田光國,1715 ~ 1767): 字는 성빈(聖賓) 호는 성재(省齋) 병사(兵使) 운상(雲祥)의 둘째아들. 영조17년(1741) 무과에 급제하였다. 영조19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23년 군관(軍官)으로서 석강(夕講)에 소입(召入)되었으며, 26년 사헌부(司憲府) 감찰에 임명되었다. 27년 도총부 도사(종5품)로서 무랑청(武郞廳 : 비변사의 낭청)에 근무하고, 28년 선전관으로서 왕이 내린 비상교(非常敎)를 거둬주십사하고 상소하였다. 영조29년 훈련원 부정(종3품)에 임명되고, 32년 중추부(中樞府) 동지사(종2품)에 임명되었다. 곧 강원도 삼척도호부사(종3품)로 나가 1년 근무하고, 내금위장(정3품,금군청․용호영의 장수)으로 들었다가 영조34년 경상도 부산포진 수군첨절제사(종3품, 京職과 겸함)에 임명되었다.영조 38년 어영청 천총(정3품)에 차하(差下)되어 내직에 있다가 영조40년 충청도 수군절도사(정3품, 정원2人인데 1人은 관찰사가 겸함)로 재직중 추고경책(推考警責)을 들었고, 영조43년(1767) 5日 경기도 좌영장(左營將) 통진부사(通津府使 : 종3품)로서 첩정(牒呈)하였으나, 같은해 재임중 순직하였다.비변사(備邊司)에서, 충청도 예산으로 반구(返柩)함에 그 연도에서 담군(擔軍)하도록 각도에 분부하였다. 일찍이 공은 군관으로서 일본통신사(日本通信使)의 수행원(隨行員)에 뽑혀, 영조24년(1748) 2월 일본 갔다가 윤 7월 환국하였다. 또, 같은해 12월 동지사(冬至使) 정석오【鄭錫五 : 1691-1748, 동래인, 동평위(효종의 사위) 재륜(載崙)의 손자, 少論, 좌의정, 시호는 정간(貞簡)】의 수행군관으로 청나라에 가다가 동지사가 십리보(十里堡)에서 병사(病死)하는 바람에 고생하였다. 영조25년 환국하였는데 일본과 청을 오가며 격은 이역기행을 능숙한 문사로 “유해등록(遊海等錄)”을 썼다. 문무를 겸한 공이 선고(先考)와 같은 운명으로 순직(殉職)하니, 門中은 물론이고 비변사에서도 애석히여겼다. 2品에 환원되고 3代가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문현(文顯). 의현(義顯) 형제 모두가 무신으로 저명(著名)하다. 사위는 이복원(李福遠 : 전주인 부사)이다. ※ 문헌 :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 등록, 삼척․칠원읍지)
  • 전광훈(田光勳, 1722 ~ 1776): 자는 양경(楊卿)이다. 1722년(경종 3)에 자천(紫泉) 전운상(田雲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50년(영조 2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53년(영조 29)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선전관을 시작으로 내금장(內禁將), 이천부사(伊川府使), 창원부사(昌原府使), 수어중군(守禦中軍) 부총관(副摠管),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 등을 역임하였다. 창원부사 재임 시 흉년이 들자 사재를 털어 고을 사람들을 구휼하였으며, 이같은 선행이 조정에 알려져 왕이 새서(璽書)를 내려 표창하고 마필을 하사하였다. 저서로는 《도요록(島擾錄)》이 있다. 묘소는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형산리에 있다.
  • 전광렴(田光濂) : 훈련주부(訓鍊主簿), 청송부사(靑松府使) 법성첨사(法聖僉使)
  • 전광우(田光羽) : 전일상의 맏아들, 법성첨사(法聖僉使), 부총관(副護軍)
  • 전광윤(田光尹) : 전천상의 맏아들, 낙안군수
  • 전광수(田光洙) : 전은상의 맏아들, 도총경력(都摠經歷)
  • 전의현(田義顯) : 전광훈의 계자 생부
  • 전광국 : 통정대부(通政大夫) 선전관, 훈련주부(訓鍊主簿), 횡성현감(行橫城縣監), 양덕현감(陽德縣監), 함경도 삼수부사(三水府使), 평안도 위원군수(渭原郡守)
  • 전문현(田文顯) : 선전관 정조 1년 1777 창성 부사, 정조 , 4년1780 전문현(田文顯)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병마절도사
  • 전덕현(田德顯) : 전은상의 손자, 선전관(宣傳官), 병마우후 (虞候),
  • 전익현(田翊顯) : 부수찬(副修撰), 부호군(副護軍), 곡산현감(谷山縣監), 오위장(五衛將), 황해병사(黃海水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전세진(田世鎭) : 선전관(宣傳官), 남해현령(南海縣令)
  • 전우성(田遇聖) : 어면만호(魚面萬戶), 경주영장(慶州營將), 훈련판관(訓鍊判官)
  • 전우룡(田遇龍) : 밀양현감(陽德縣監)
  • 전시우 (田時雨, 1563-1612) 현감(縣監) 字는 이화(而化) 호는 북헌(北軒) 경상도 의령(宜寧) 사람 本貫은 고양(高陽) 부정(副正) 대기(大起)의 맏아들 아우는 進士 호우(好雨). 母는 풍덕장씨(豊德張氏) 세침(世琛)의 딸.   선조16年(1583) 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 正3品에서 종9品까지 선전관청에 소속된 여러 계층의 武官. 임금곁에서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등의 출납을 관할하므로 출세가 빨라 누구나 선망하는 벼슬)이 되고, 8年뒤에는 出六(어려운 고비인 6品에 승진)하여 무겸(武兼 : 무신겸 선전관)이 되었다.   선조25年(1592) 4月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서행(西幸 : 서쪽으로 피란행차)할 때 선전관으로서 호종(扈從) 하기 시작하여 7年 전쟁동안 여러 행궁(行宮)을 전전하면서 수문장(守門將)을 주로 맡았었다.   선조38年(1605) 4月 16日 수문장으로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어 녹권(錄券)이 하사되었다. 곧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의 평산포영(平山浦營) 수군만호(水軍萬戶 : 종4品)에 임명되었는데, 선조39年(1606) 11月 8日 실록에 의하면 평산포만호로서 경상도관찰사 겸우도 水使 류영순(柳永詢)을 수행하였다. 당시 능침을 범한 왜놈을 잡았는데 그 포로를 釜山에서 日本에게 인도함에 있어 군대의 위엄을 보이라는 지시대로 관찰사가 관할 첨사(僉使)․만호들을 데리고 배와 군대를 많이 동원하였다.   광해2年(1610) 경상도 영산현감(靈山縣監 : 종6品, 1631年엔 창녕현이 들어온 큰 고을)에 임명되어 도임하였으나 2년후인 광해4年(1612) 재파(災罷 : 순직으로 간주)되었다. 萬戶때는 종4品 서반(西班)의 정략장군(定略將軍) 품계였으나 현감때는 공신특전으로 동반(東班) 3品堂下의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승서(陞叙)되었다. 고로 公의 품관(品官 : 품계와 관직) 명칭은 ‘통훈대부 영산行현감’이다. 관직이 품계보다 낮으므로 行․守법에 따라 ‘行’자가 앞에 붙었다.   ※ 문헌 : 어사 선무원종공신 녹권, 선조실록 영산읍지

대한민국편집

  • 전윤철(田允喆) : 전 재정경제부 장관, 경제부총리, 19,20대 감사원장 (경은)
  • 전수안(田秀安) : 전 대법원 대법관 (경은)
  • 전용원(田瑢源) : 제13·14·16대 국회의원 (경은)
  • 전병헌(田炳憲) : 제17·18·19대 국회의원 (경은)
  • 전여옥(田麗玉) : 제17·18대 국회의원 (경은)
  • 전하진(田夏鎭) : 제19대 국회의원이다.
  • 전락원(田樂園) : 파라다이스 그룹 창업주 (야은)
  • 전필립(田必立) : 파라다이스 회장 (야은)
  • 전재수(田載秀) : 제20대 국회의원 (경은)
  • 전봉민  : 제20대 국회의원 (경은)
  • 전용기  : 제20대 국회의원 (경은)
  • 전정국( 田柾國) : 방탄소년단 (경은)
  • 전숙희(田淑禧) : 수필가,전락원의 누이 (야은)
  • 전혜린(田惠麟)  : 수필가 봉덕의 녀 (경은)
  • 전봉덕(田鳳德)  : 친일파, 일제강점기 경찰간부,대한민국육군대령,헌병사령관,대한변호사협회회장, (경은)

항렬자편집

  • 야은파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일(鎰) 口기(淇) 계(桂) 口희(熙) 준(埈) 口수(銖) 호(浩) 口식(植) 병(炳) 口곤(坤) 호(鎬) 口구(求) 상(相) 口열(烈) 기(基) 口종(鍾) 근(根) 口형(炯)
  • 뇌은파, 정선파, 선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