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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1967년 5월 3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6대 대통령 선거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변신하여 4년간 집권한 박정희와 그에 강력히 도전해 온 윤보선과의 재대결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1963 ←
1967년 5월 3일
→ 1971

투표율 83.6%(감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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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박정희 윤보선
정당 민주공화당 신민당
득표수 5,688,666 4,526,541
득표율 51.4% 40.9%

6대 대선.png

시군별 우세지역 (당시 행정구역은 아님)
박정희
윤보선

선거전 대통령

박정희
민주공화당

대통령 당선자

박정희
민주공화당

목차

배경편집

박정희 정부한일기본조약의 졸속처리와 월남파병으로 야권과 학생, 그리고 재야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반면에 신한당과 민중당으로 분열되었던 야당은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으로 통합하는 등 단결된 모습으로 출전하였다.

이같이 야당이 단일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는 서민호를 비롯하려 무려 5명의 군소 정당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이를 두고 신민당은 박정희가 야권을 분열시키기 위해 군소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출마시킨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장준하는 4월 22일 "박정희 씨가 모든 야당을 돈으로 매수하고 군소 정당을 만들어 어떤 군소 정당의 후보에게는 2,500만원의 정치 자금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

그러나 군소 후보들은 선거전 내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지방 조직 등이 미약하여 제대로된 선거 운동조차 벌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일하게 일정 부분 이상의 지지세를 보이던 서민호 대중당 후보는 막판에 사퇴를 선언하여, 제6대 대통령 선거는 사실상 양당 구도로 진행되었다.

선거편집

제6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의 1차 방어전이자 윤보선의 설욕전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4년간의 집권으로 유권자들에게 친숙해져있던 반면, 윤보선은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역사의 한편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윤보선은 대통령 권한 축소 개헌을 공약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지적하는 전략을 썼는데, 박정희는 "(야당이) 말로만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는데 민주주의만 먹고 사느냐, 배가 불러야 산다"며 이에 대응하였다.[2]

그러나 신민당과 민주공화당이 둘 다 보수 정당이라 제시하는 공약 및 정책에 큰 차이가 없었던데다, 뚜렷한 선거쟁점이 없어 선거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결국 제6대 대통령 선거는 83.6%라는 역대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하게 되었다.

후보편집

민주공화당편집

민주공화당은 1967년 2월 2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의 총재인 박정희 대통령을 제6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신민당편집

신한당과 민중당으로 분당돼있던 야당은 1967년 2월 7일 신민당으로 합당하고 신한당 총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6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기타편집

대중당편집

민주사회당 등 각기 군소 정당들은 1967년 3월 9일 대중당으로 통합하고 서민호민의원부의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서민호 후보는 4월 28일 야권 단일화를 위한 후보직을 사퇴를 선언하였다. 서민호 후보는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군소 정당 후보들 중 가장 강력한 지지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신민당은 서민호 후보가 완주할 경우 야권 지지표를 상당 부분 빼앗길 것으로 보고 수차례에 걸쳐 서민호 후보를 설득해 사퇴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통한당편집

추풍회는 제6대 총선에서 입후보자 전원이 낙선하는 등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 상태였으나, 1967년 3월 25일 당명을 통한당으로 개정하고 오재영 전 의원을 대선 후보로 추대, 대통령 선거전에 나설 태세를 갖췄다.

민중당편집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를 지원한 신민회는 1967년 2월 25일 김준연법무부 장관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으며, 3월 10일에는 당명을 민중당으로 개정하였다.

한국독립당편집

한국독립당은 1967년 3월 16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전진한사회부 장관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

정의당편집

정민회는 1967년 3월 30일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명을 정의당으로 개정하고 이세진을 대선 후보로 추대하였다.

선거결과편집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6 박정희 민주공화당 5,688,666    51.4%  
2 3 윤보선 신민당 4,526,541     40.9%
3 7 오재영 통한당 264,533    2.4%
4 5 김준연 민중당 248,369    2.2%
5 2 전진한 한국독립당 232,179    2.1%
6 1 이세진 정의당 98,433   0.9%
- 4 서민호 대중당 - - 기권
선거인 수 13,935,093
총투표수 11,645,215             
투표율 83.6%

지역별 득표수편집

이세진 전진한 윤보선 김준연 박정희 오재영 합 계
서울   7,635   14,242    675,716   13,142     595,513   11,447           1,317,695
경기   11,029    25,306    674,964    23,248     525,676    22,383              1,282,606
강원   7,310    15,400      349,807    17,757    429,589    18,211               838,074
충남   10,560   28,809       505,076   27,295     489,516    17,662               1,078,918
충북   7,114    20,345      252,469   14,526       269,830   15,058                579,342
전남   11,774    28,156       682,622   46,721     652,847   42,249               1,464,369
전북   8,325   28,943       451,611   23,945      392,037    21,527                926,388
부산   3,028   4,556    164,077   6,866      338,135    9,922             526,584
경남   9,895   16,065     281,545   30,740       838,426    45,325               1,221,996
경북   19,647   45,482      447,082    40,884      1,083,939   56,328               1,693,362
제주    2,116    4,875     41,572   3,245      73,158   4,421               129,387

평가편집

제6대 대통령 선거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후보와 제1야당인 신민당의 후보가 도합 전체 유효표의 92.4%를 차지해 양당제의 확립을 드러내었다. 그 중에서 박정희는 영남에서만 1,367,796표차로 윤보선을 누르며 재선에 성공하게 되었다.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추풍령을 기준으로 북쪽은 윤보선, 남쪽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남북 현상’을 보여줬다면,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은 윤보선, 동쪽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동서 현상'이 나타났다. 부산직할시, 경상북도, 경상남도영남 지방에서 박정희의 지지가 현저하였으며, 4년 전 윤보선이 승리했던 강원도충청북도가 여권으로 돌아섰다.

반면에 전라남도, 전라북도호남 지방에서는 근소하지만 야당이 우세를 보였다. 전통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강한 호남은 4년 전 뜻밖에도 박정희의 손을 들어준 바 있었으나, 제6대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다시 야당세로 돌아선 것이었다. 서울특별시경기도, 충청남도에서는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윤보선이 승리하였다.

  1. “야 대통령 후보 소환 - 검찰, 장준하 씨 발언 확인 위해”. 《경향신문》. 1967년 5월 12일. 
  2. “서 후보 사퇴에 여야 희비”. 《동아일보》. 1967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