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국민회

국민회(國民會)는 1909년 2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공립협회하와이합성협회(1907. 9.)가 통합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조직된 미국 내 독립운동단체이다. 1910년 2월 10일 샌프란시스코대동보국회(1907. 3.)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 개편되었다.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고 이끌었다.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

역사편집

창립 (1910)편집

1909년 2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공립협회하와이합성협회(1907. 9.)가 통합하여 샌프란시스코국민회가 조직되었다.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였다.[1]

1910년 2월 10일 샌프란시스코대동보국회(1907. 3.)와 국민회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 개편되었다.[2]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멕시코에는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3]

1911년 3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분과와 임원을 완비한 완전한 조직구성을 완료하지는 못했다.[2][3]

1911년 시베리아지방총회(서백리아)를 설치하고 치타·이르쿠츠크·수청(水靑) 등 16개 지방에 지방회를 구성하여 회원이 1,150여명에 달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만주지방총회(만주리아)를 설립하고 8개처에 지방회를 구성하였다.[3]

1912년 다시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임원을 선임하여 11월 제1회 대표원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재외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3]

1915년 이대위 목사가 인터탑입한글 식자기를 발명하였다. 이를 이용해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승만의 하와이지방총회 장악 (1914)편집

1914년~1918년은 대한인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던 시기였다. 1915년 중순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 부회장은 박용만이었는데, 동아시아정세의 변화화와 더불어 연해주와 만주의 대한인국민회가 쇠약해졌으며 하와이에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갔으며 안창호의 영도역량에도 문제가 있어 3·1 운동 이전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실질적인 기반은 미국 서해안과 멕시코에 지나지 않았다.

1914년 6월 10일 박용만하와이 오아후섬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한인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은 무고한 백성의 피만 흘릴 뿐 실질적 소득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인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리게 됐고 교회까지 분열하게 되었다.[4]

1915년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재정 비리 의혹이 터졌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지방총회를 혁신하겠다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에 임시의회 소집을 건의했고, 와히아와지방회 의원 3인이 이에 응답해 임시의회소집청원서를 총회장에게 보냈다.[5]

1915년 5월 1일부터 수 차례의 임시의회가 열리고 회계장부도 조사되었다. 그 결과 김규섭, 이동근, 안영칠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재무 홍인표가 1544원 67전을 횡령하고, 양흥엽, 홍진표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와이지방총회장 김종학이 1345원 64전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김종학과 지도부 일동이 파면되었다.

1915년 6월 10일경 신규 하와이지방총회장 선거에 홍한식과 고석주가 후보로 출마하여 홍한식이 당선됐다. 이날 이홍기, 김규섭, 김윤배, 이정건은 대의원과 참의원 등에 당선됐다.[5]

1915년 6월 17일경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온 공소장을 본 즉시 의회에서 김종학을 사회법률로 처단하기로 작정하고서 의회 의원들을 한인중앙학원에 불러다 놓고 "어찌하여 죄인 김종학을 징역시키지 않고 공회재판으로 처치한다 하는가? 그와 같이들 하려면 다 본디 방식으로 돌아가라"라고 호통쳤다.[5] 1915년 6월 25일경 김종학 등은 홍한식 등에게 선거무효 소송을 걸었다가 3개월만인 9월 29일 소송을 취하하였다.[6]

1918년 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제10차 대의회에서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 지도부에 재정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다. 2년반 전에 박용만파가 받았던 혐의를 이번에는 이승만파가 받았다. 박용만파 대의원들이 이승만에게 따지자, 이승만은 2월 6일과 2월 13일 《국민보》에 두 차례에 걸쳐 “소약국동맹회의와 재정”, “선동”이라는 표제로 박용만파가 제기한 사안에 대해 해명하는 글을 기고했다.[7] 해명을 했음에도 2월 11일 재정문제를 토의하던 중 난투가 벌어졌다. 안현경은 호놀룰루 경무청에 신고해서 박용만파 유동면, 김성렬, 이찬숙, 김한경 4명을 지목, 체포케 했다. 1918년 2월 15일 폭동(riot) 혐의로 유동면 등 4명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8] 2월 27일 고등재판소에서 배심재판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당시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고발인 신분으로만 재판정에 출석하였다.[9] 3월 8일 재판결과 박용만파의 무죄가 판결되었다.[10]

그 직후에도 다툼은 계속 됐다. 1918년 3월 11일 이승만파 안현경은 박용만파 유동면 등을 경찰에 체포시켰고, 3월 15일 안현경은 유동면 등을 고발하였다. 같은 날 안현경은 김순기를 경찰에 체포시켰다.[11] 이에 3월 23일 김순기는 자신이 안현경에게 누명을 쓰고 체포를 당해서 5000달러의 손해를 봤다며 안현경을 고소했는데, 안현경은 "I am going to kill you"라는 살해협박을 받아서 경찰에 신고한 거라고 반박했다.[12] 1919년 2월 28일 재판결과 원고측 김순기가 오히려 협박(threatneing language) 혐의로 체포 영장(warrant of arrest)을 발부 받았고 피고측 안현경에게 재판비용까지 물어줬다.[13]

이후 박용만파는 1918년 7월 1일 하와이지방총회에 대항하기 위해 '임시중앙연합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를 흔히 '갈리히연합회'로 불렀다.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로 양분되어 중앙총회의 위상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중앙총회장 안창호까지 나서서 갈리히연합회의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갈리히연합회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이승만의 《태평양잡지》와 여론전을 펼쳤다. 1920년 초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승만파 이종관 등과 박용만파손창희 등의 선거 불복에 관한 법정다툼도 이승만파가 승리하였다.[14]

이후로도 박용만파와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승만파는 언론을 통해 비폭력 저항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는 태도로 한인사회의 평판을 얻기 시작했고, 점차 한인사회를 장악하였다. 한인사회로부터 YMCA 한인지부를 위한 대규모의 기부금을 성공적으로 모금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의 갈등도 해소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 보낼 특사로서 이승만을 신뢰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하와이로 귀환했을 땐 한인사회의 광범위한 축복을 받았다. 중립적인 인사들은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반이승만파 중 일부조차 이승만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대한인국민회는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15]

쇠퇴의 위기 (1924)편집

1924년 이승만을 위시한 외교독립론자들이 대한인국민회를 탈퇴하여 대한인동지회를 설립하였고,[16] 1928년 박용만이 중국에서 피살당했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직후 안창호가 피신하지 못하고 체포되면서 대한인국민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창호는 뒤에 출소했으나 1938년 병세가 악화돼 사망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이 다시 장악하였다.

대조선독립단과의 갈등 (1934)편집

대조선독립단은 이승만 세력과 대립·갈등하던 박용만을 중심으로 하는 하와이 한인들에 의해 1919년 3월 결성되었다. 대조선독립단은 3·1 운동 이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를 양분시켰다. 1928년 박용만이 중국에서 피살당한 뒤 활동이 침체되어, 1934년 10월 대조선독립단은 하와이지방총회와 공식적으로 합동하였다. 그러나 대조선독립단이 국민회와 합동한 후에도 대조선독립단의 일부는 통합에 반대하여 그 활동과 조직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대조선독립단이라는 단체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대조선독립단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17]

1935년대한인국민회대조선독립단 간의 부동산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1935년 12월 초 대조선독립단 단장 김영배가 대한인국민회에 부동산을 양도한다는 증서를 썼는데, 대조선독립단 측이 이를 번복하려 하자 1936년 2월 19일 대한민국민회가 대조선독립단을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이었다. 1936년 10월 29일 쟁점이 된 부동산은 김영배의 소유, 즉 대조선독립단의 소유로 되돌리되 기타 은행 잔고는 대한인국민회대조선독립단이 분할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18]

끝까지 통합에 반대하던 대조선독립단 세력들은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재미 한족 9개 단체의 하나로 참여하였다. 이때 대조선독립단의 대표는 강상호였다.[17]

광복 이후 (1945)편집

1945년 광복이승만이 귀국한 뒤에는 임병직, 이원순 등을 통해 대한인국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한 뒤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 없이 순수 교민 단체로 변모하였다.

역대 중앙총회장편집

  1. 제1대 회장 : 최정익
  2. 제2대 회장 : 윤병구
  3. 제3대 회장 : 안창호
  4. 제4대 회장 : 윤병구 ← 중앙총회장을 두 번한 최초의 인물.

기타편집

대한인국민회관편집

1935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하였던 대한인국민회 주변지역에 Bay Bridge 건설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관은 철거되었다.

1938년 대한인국민회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대한인국민회관이 준공되었다.

1974년 대한인국민회관은 LA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매각되었다.

2003년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으로 대한인국민회관을 복원하였고 개관한 것이 현재에 이른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일반인도 방문이 가능하다.

대한인국민회의 상징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1. “賀國民會成立(국민회 성립을 하례함)”. 신한민보. 
  2. “(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한인 교회 앞장서 광복운동 후원”. 국민일보. 
  5. “중앙총회에 온 하와이 대의원의 공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한민보. 
  6. “김종학 대 홍한식 소송사건(소송취하) (Discontinuance)”. 한국사데이터베이스. 
  7. “깡통진보, [백년전쟁] 이렇게 조작! 역사의 진실 공개”. 뉴데일리. 
  8. “김성렬 등에 대한 하와이 주 기소사건(사건설명서) (instructions requested by defendants)”.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 “통곡할 하와이 한인의 재판사건”. 신한민보. 
  10. “김성렬에 대한 하와이 주 기소사건(평결) (verdict)”.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1. “하와이 연합회 공서”. 신한민보. 
  12. “김순기 대 안현경의 소송(피고측 답변 및 원고측 사건설명 요청서) (answer and demand for trial by jury)”.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3. “김순기 대 안현경의 소송(피고측 변호인 철회안 및 평결) (verdict and judgement)”.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4. “이종관 대 손창희 소송사건(판결문) (judgement)”.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5.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이이화 저. 김영사. p33~p34
  16. “대한인동지회”. 세계한민족문화대전. 
  17. “대조선독립단”. 세계한민족문화대전. 
  18. “대한인국민회 대 대조선독립단 소송사건(결정서 및 평결) (decision and decree)”.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