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테아 폰 에르트만
도로테아 폰 에르트만(Dorothea von Ertmann, 1781년 5월 3일 – 1849년 3월 16일)은 독일의 피아니스트였다.
생애
편집도로테아 그라우만(Dorothea Graumann)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1798년에 오스트리아의 보병 장교인 스테판 폰 에르트만과 결혼했다. 에르트만 부부는 곧 빈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도로테아 에르트만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수업을 받았다. 베토벤은 그녀를 "도로테아-체칠리아"(Dorothea-Cecilia)라고 불렀다. 그는 《피아노 소나타 28번》을 그녀에게 헌정했으며, 그녀는 또한 그의 불멸의 연인 편지들의 의도된 수신자였을 수 있다.[1] 그녀의 외동인 프란츠 카를은 1804년 3월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 그녀가 애도하는 동안 베토벤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이제 우리는 서로 음색 안에서 이야기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한 시간 동안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에르트만은 1809년 3월 5일에 니콜라우스 크래프트와 함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3번》을 초연했다.[3][4] 그녀는 남편과 함께 1820년에 밀라노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펠릭스 멘델스존의 방문을 받았지만, 1835년에 남편이 사망한 후 그녀는 빈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사망했다.[5]
에르트만은 다수의 공개 연주회를 열었고, 베토벤 작품의 연주로 가장 유명했다. 알렉산더 세이어는 "(그녀는) 이 작품들의 가장 위대한 연주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성별 중 가장 위대한 연주자였다는 데 동의한다"라고 말했다.[6] 안톤 쉰들러는 "그녀는 베토벤 작품의 가장 숨겨진 미묘함까지도 마치 눈앞에서 쓰여진 것처럼 직관적으로 파악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에르트만 부인이 없었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레퍼토리에서 아주 일찍 사라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 새롭고 "유행적인" 작곡가들의 등장에 맞서 자신의 스타일을 보존하기 위해 헌신하는 뮤지컬 살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7]
독일 오페라 가수이자 교사인 마틸데 마르케지는 그녀의 조카딸이었다.[8]
각주
편집- ↑ 워랙, 존. 〈에르트만, 도로테아 폰〉. 《Grove Music Online》.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
- ↑ 솔로몬, 메이너드 (2003). 《후기 베토벤: 음악, 사상, 상상력》. 캘리포니아 대학교 출판부. 298쪽. ISBN 9780520237469.
- ↑ 세이어, 알렉산더 (1991). 포버, 엘리엇; 크레비엘, 헨리, 편집. 《테이어의 베토벤의 삶》.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467쪽. ISBN 9780691027173.
- ↑ 왓슨, 앵거스, (2012). 《베토벤 실내악의 맥락》. Boydell. 162쪽. ISBN 9781843837169.
- ↑ 워랙, 존. 〈에르트만, 도로테아 폰〉. 《Grove Music Online》.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
- ↑ 세이어, 알렉산더 (1991). 포브스, 엘리엇; 크레비엘, 헨리, 편집. 《세이어의 베토벤 생애》.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412쪽. ISBN 9780691027173.
- ↑ 파라킬라스, 존; 봄버거, E. 더글라스 (2001). 《피아노 역할: 피아노의 새로운 역사》 2판. 예일대학교 출판부. 109쪽. ISBN 9780300093063.
- ↑ 다그마르 바이제 (1959), “에르트만, 카타리나 도로테아 프레이프라우 폰, 옛 성은 그라우만”, Neue Deutsche Biographie (NDB) (독일어) 4, Berlin: Duncker & Humblot, 635–636쪽; (full text 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