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영어: Ruth Bader Ginsburg, 결혼 전 조안 루스 베이더;, 1933년 3월 15일 ~ 2020년 9월 18일)는 미국의 법조인으로 연방 대법관으로 지냈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할 당시 합의를 이끌어내는 중도파로 평가받았다. 보수화돼가는 연방대법원의 진보적인 축에 속했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에 이은 사상 두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이며 첫번째 유대인 여성 연방대법관이다. 미국 대 버지니아주, 옴스테드 대 L.C.(영어판), 미국지구의벗 대 레이드로환경서비스(영어판), 뉴욕주 셰릴시 대 뉴욕주 오나이다 원주민(영어판)와 같은 유명한 판결문(다수의견)을 작성하였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Ruth Bader Gins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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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연방 대법관
임기 1993년 8월 10일 ~ 2020년 9월 18일
대통령 빌 클린턴
전임 바이론 화이트
미국의 연방 컬럼비아 항소구 항소법원 판사
임기 1980년 6월 30일 ~ 1993년 8월 9일
대통령 지미 카터
전임 해롤드 레벤탈
후임 데이비드 타텔
신상정보
출생일 1933년 3월 15일(1933-03-15)
출생지 미국 뉴욕주 뉴욕
사망일 2020년 9월 18일(2020-09-18) (87세)
사망지 미국 워싱턴 D.C.
학력 코넬 대학교 B.A.
하버드 법학대학원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J.D.
소속기관 미국 연방 대법원
배우자 마틴 긴즈버그
(1954년 결혼; 2010년 사망)
자녀 2

긴즈버그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언니는 그가 영유아일때 사망했으며, 어머니는 그의 고등학교 졸업 직전 사망하였다. 코넬 대학교 학사과정을 마치고 결혼과 출산을 하였고 하버드 로스쿨의 몇 안되는 여학생이 되었다. 편입한 컬럼비아 로스쿨에서 공동 수석으로 졸업 후 그는 학계에서 일했다. 럿거스 로스쿨컬럼비아 로스쿨 교수로서 재직할동안 그는 학계에서 민사소송을 가르치는 몇 안되는 여성이었다.

법조인 경력의 상당한 부분을 성평등여성의 권리증진에 힘쓰었으며,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변호사로서 이와 관련한 여러 연방 대법원 판결을 승소로 이끌어냈다. 1970년대 그는 ACLU의 자원봉사변호인, 이사, 법문자문위원 등으로 일했다. 1980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 연방 컬럼비아 항소구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였다. 2006년 오코너 연방 대법관의 퇴임과 2009년 소토마요르 연방 대법관 임명 사이의 기간 동안 그는 유일한 여성 연방 대법관이었다. 이 기간 동안 작성한 단호한 소수의견은 법조인들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으며, 2007년 레드베터 대 굿이어 사건의 소수의견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이 사건의 소수의견은 노동자가 임금차별소송에 승소하기 쉽도록한 2009년 릴리 레드베터 임금평등법 제정에 기여한것으로 평가받고있다.

그의 강렬하고 진보적인 소수의견(dissents)과 퇴임거부의사로 미국 대중문화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같은 브루클린 출신의 래퍼 노토리어스 B.I.G.에서 따온 "노토리어스 R.B.G."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2020년 9월 18일 87세의 나이에 전이성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애 초기편집

1933년 3월 15일 주안 루스 베이더(Joan Ruth Bader)는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셀리아 엠스터(Celia Amster)와 네이선 베이더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뉴욕으로 이민을 왔으며,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남부 (당시 러시아 제국) 오데사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였다. 그가 태어난지 14개월만에 언니 마릴린은 수막염으로 인해 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베이더를 마릴린이 그의 발차기를 보고 준 별명 "키키(Kiki)"로 불렀다. 그가 학교에 들어가고나서 그의 어머니는 반에 "조안(Joan)"이란 이름을 가진 학생이 여러 명인 것을 발견하고 혼란을 막기 위해 선생님께 그를 "루스(Ruth)"라고 부를 것을 권했다. 독실하진 않았지만, 그의 가족은 보수적인 유대교 회당인 미드우드 동부 유대인 센터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유대교 교리와 히브리어를 배웠다. 뉴욕주 체-나-와 캠프에서 열린 유대교 여름학교에 13살일 때는 "캠프 랍비"로, 18살때는 캠프 선생님으로 참여했다.

베이더의 어머니 셀리아는 그를 자주 도서관으로 데려가는 등 그의 교육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셀리아는 15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부모님이 셀리아 대신 오빠를 대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셀리아는 그가 더 많은 교육을 받아 고등학교 역사선생님이 되길 바랬다. 그는 제임스 매디슨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후에 본교의 법 프로그램은 그의 이름을 단 법정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재학 동안 셀리아는 암과 싸워왔으나 그의 졸업식 하루 전에 세상을 떠났다.

베이더는 알파엡실론파이클럽의 멤버로서 뉴욕주 이사카시코넬 대학교를 다녔다. 17살 때 같은 대학교 학생 마틴 긴즈버그를 만났다. 1954년 6월 23일 정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미국 엘리트 대학생 학회인 파이베타카파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졸업한 해엔 학회의 최상위 여성 멤버였다. 코넬대 졸업 한달후 마틴과 결혼하였다. 마틴이 실요새(Fort Sill) 육군예비대의 학군사관(ROTC)으로 소집명령을 받자 오클라호마주로 함께 이사하였다. 긴즈버그는 사회보장국 오클라호마지부에서 일했으나, 21살때 임신의 이유로 강등되었다. 1955년 첫아이을 출산하였다.

1956년 가을 하버드 로스쿨에 대략 500명중 9명의 여학생의 한명으로 입학하였다. 그를 포함한 모든 여학생들은 학과장이 초대한 식사자리로 불려나갔으며, 그 자리에서 "왜 하버드 로스쿨에 와서 남자의 자리를 차지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배우자가 뉴욕시에 직장을 구하자, 그는 뉴욕시에 위치한 컬럼비아 로스쿨으로 편입하였다. 그는 두개의 주요 로스쿨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컬럼비아 로 리뷰에 오른 첫번째 여성이 되었다. 1959년에 컬럼비아 법학대학원을 공동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경력 초기편집

법조계 경력시작부터, 긴즈버그는 직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 연방 대법관 펠릭스 프랭크푸르터는 그가 여자라는 이유로 재판연구원으로 채용하지 않았다. 법학교수이자 후에 하버드로스쿨 학과장으로 재직한 알버트 마틴 삭스의 강력한 추천서에 불구하고 거부당한 것이다. 컬럼비아로스쿨 교수 제랄드 건터미국 연방 지방법원 중 가장 영향력있다고 여겨지는 뉴욕 남부 지구 지방법원의 판사 에드문드 팔미에리에게 긴즈버그를 재판연구원으로 채용하지 않으면 앞으로 팔미에리 판사에게 컬럼비아대 학생을 추천하지 않을 거라 협박함과 동시에 그가 성공적으로 연구원직을 수행하지 못할시 다른 본교학생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해 말부터 2년동안 팔미에리 판사의 재판연구원으로 일하였다.

법학교수편집

1961년부터 1963년까지 긴즈버그는 컬럼비아 법학대학원의 국제소송법프로젝트(Project on International Procedure)의 연구원, 부국장 등으로 일했다; 스웨덴어를 배워 안더스 프루젤리우스(Anders Bruzelius)와 같이 스웨덴의 민사소송법에 관한 책을 공동지필하였다. 스웨덴의 룬드 대학교에서 지필을 위한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다. 스웨덴에서의 시간은 성평등에 관한 그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20에서 25퍼센트의 법학생이 여성인 것과 지필을 위해 연구한 판사 중 한명이 임신 8개월임에도 일하고 있는것과 같은 스웨덴 사회의 변화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

1963년 럿거스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남자 동료보다 임금을 적게 받을 것이라 통보받았다. 학계에 입문할 당시 그는 미국에 20명도 안되는 여성 법학자 중 한명이었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럿거스 대학교에서 주로 민사소송을 가르쳤으며, 1969년부터는 종신교수로 재직하였다.

1970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권리를 독점적으로 다룬 법학술지 여성 권리 법 리포터를 공동 창간하였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본교의 첫 여성 종신교수로 재직하면서 성 차별에 관한 사상 첫 법학대학원 판례집을 공동지필하였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스탠퍼드 대학교 행동과학연구센터(Center for Advanced Study in the Behavioral Sciences)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였다.

변호사편집

 
1977년 긴즈버그 (사진: Lynn Gilbert)

1972년 긴즈버그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여성권익프로젝트(Women's Rights Project)를 공동창립하였고, 다음해부턴 프로젝트의 법무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창립부터 1974년까지 여성권익프로젝트나 ACLU의 다른 관련프로젝트는 300건이 넘는 성차별관련 소송에 참여하였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본 프로젝트의 국장으로 재임하면서 연방대법원까지간 6개의 성차별관련 소송을 이끌었으며, 그중 5개에서 승소하였다. 모든 성차별을 한꺼번에 끝내달라고 사법부에 요구하는 방법이아닌, 성차별적인 법을 특정한 후 각각의 소송에서 승소하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긴즈버그는 소송인을 신중하게 골랐는데, 가끔은 성차별이 남녀 모두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자 소송인을 골랐다. 그가 겨냥한 법들은 겉으로는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여자가 남자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 그는 단어사용에도 전략적이었는데, 비서가 "성(sex)"이라는 단어가 판사들의 집중을 방해할 수 있다 조언한 뒤론 "생물학적인 성(sex, 남성, 여성)"대신 "사회적 성(gender)"사용을 선호하였다. 실력있는 변사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법의 많은 형태의 성차별을 끝내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1971년 리드 대 리드사건의 상고이유서를 작성하였고, 연방 대법원이 수정 헌법 제14조평등보호조항의 범위를 여성에까지 확대하도록 이끌어냈다. 1972년 모리츠 대 국세청장에서 남자란 이유로 어머니의 간병인 비용을 세금공제받지 못한 모리츠를 대변하였고, 본 조항을 근거로 연방 항소법원에서 승소하였다. 1973년 프론티에로 대 국방장관 사건은 여자 군인이 남편의 주택수당을 신청하는 것이 남자 군인이 아내의 주택수당을 신청하는 것보다 어려게한 법령을 다루고있었는데, 소송인의 법정조언자로서 긴즈버그는 본 법령이 여성을 하급자로 취급한다고 주장하였다. 연방 대법원은 8대 1로 소송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1975년 보건교육복지장관 대 위센펠드 사건에서 홀어미에게는 주는 자녀돌봄특별수당을 홀아비라고 수령하지 못한 위센필드를 대변하였다. 그는 법령이 여자 생존자에게 주어지는 보호를 남자 생존자에게는 똑같이 주지 않음으로써 차별한다고 주장했고 연방 대법관 만장일치로 승소하였다.

1976년 크레그 대 오클라호마주지사사건에서 남자와 여자의 음주연령을 다르게 한 오클라호마주 법령에 이의를 제기한 소송인의 법정조언자 소견서를 작성하였고 변호인편의 구두 변론을 하였다. 연밥 대법원은 심도 있는 위험심사기준격인 중간심사기준(intermediate scrutiny)를 사상 처음으로 성차별적 법에 적용하였고 본 주법이 위헌이라 판결하였다. 변호인으로서 맡은 마지막 연방 대법원 사건인 1979년 듀렌 대 미주리주에서 그는 배심원의 의무수행은 시민의 중요한 정부활동이기 때문에 여성에게만 선택적이어선 안되며, 여성에게만 배심원단 수행을 강제하지 않은 미주리주의 법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의 구두 변론 후미에 연방 대법관 윌리엄 렌퀴스트가 "그러면, 수전 B. 앤서니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새 지폐에 새기는 걸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냐?"라고 질문하였는데, "동전에 새기는것으로도 합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하는 것을 고려하였으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법학자들과 법조계는 긴즈버그의 업적이 헌법의 평등보호조항을 통해 상당한 여성의 법적증진에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승소들은 입법부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는 법 제정을 어렵게 하였다. 1980년 연방 사법부에 입문하기 전까지 ACLU 여성권익프로젝트에서 계속 일하였다. 타임지 100인에 선정된 그의 소개글에서 동료 연방대법관이였던 앤터닌 스캘리아는 그를 "여성권익을 대변하는 선구적이며 매우 성공한 변호인이며, 여성권익증진의 서굿 마셜(인종차별에 힘쓴 전 연방대법관)이다"라고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칭찬했다. 긴즈버그의 하버드로스쿨재학시절 교수이자 학과장였고 후에 법무차관으로 재직한 얼윈 그리스윌드가 1985년 연설에서 긴즈버그를 처음으로 서굿 마셜에 비교하였다.

미국 연방 항소법원편집

 
1980년 지미카터 대통령과 긴즈버그

1978년 연방사법부의 밀린업무가 증가하자 의회는 종합 법관자격법을 제정하여 연방지방법원과 연방항소법원 법관의 수를 117명, 35명만큼 늘렸다. 본 법은 2년전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미카터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여성과 소수자의 법관진출에 중점을 두었으며, 인사청문회에서 법관후보자의 인품과 경력을 심사하도록 강제하였다. 카터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긴즈버그는 커리어변화를 고려하였다. 가장원했던 법무차관직 후보자로 법무부와 인터뷰하였으나, 같은날 인터뷰한 흑인 후보자와 그가 그리핀 벨법무장관한테 임명받을리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펠로우로 재직하면서, 변호사로서 평등한 권리를 위해 일했던 업무를 되돌아보는 글을 쓰고있었다. 긴즈버그의 배우자 마틴는 동대 로스쿨에 초빙교수로 재직하면서 유명로펌 웨일 고샬 앤 멘지스에서 근무하고있었는데 그를 위해 로펌을 그만두고 종신교수로 근무할 마음을 먹고있었다. 당시 마틴은 긴즈버그의 법관진출에 많을 노력을 기울였다. 1979년 1월 긴즈버그는 제2 연방항소법원과 콜럼비아 항소구 법원의 법관후보자로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1980년 4월 14일 지미 카터 대통령은 그를 해롤드 레벤탈 판사의 사망으로 공석이된 연방 컬럼비아 항소구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하였다. 1980년 6월 18일 상원이 그의 임명 인준을 확정하고 청문보고서를 송부하였다.

항소법원 판사시절 자주 로버트 볼크앤터닌 스캘리아를 포함한 보수적인 동료 항소법원판사와 같은 입장의 판결을 하였다. 항소법원재직시절 그는 "신중한 법조인"과 중도파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가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되자 데이비드 타텔이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미국 연방 대법원편집

지명과 임명편집

 
1993년 6월 14일 빌 클린턴의 긴즈버그 연방 대법관 지명 발표

1993년 6월 14일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바이론 화이트 연방 대법관의 퇴임으로 공석이된 자리에 그를 지명하였다. 공화당 유타주 연방 상원의원 오린 해치로부터 긴즈버그를 추천을 받은 법무부장관 자넷레노가 클린턴에게 그를 연방대법관직에 추천하였다. 지명당시 긴즈버그는 중도파로 평가받았다. 보도에 의하면 클린턴은 연방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 강화를 고려하고 있었고, 긴즈버그는 1969년 연방대법관 아베 포르타스의 사임이후 처음으로 임명되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사상 두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이자 첫번째 여성 유대인 연방 대법관이다. 그는 또한 최장기간 재임한 유대인 대법관이다. 미국 변호사협회 연방사법부 상임위원회(Standing Committee on the Federal Judiciary)는 그를 연방대법관 후보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등급인 "매우 자격있는(well qualified)"로 평가하였다.

미국 상원 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 증언에서 그는 연방 대법원에 관련사건이 회부되어 자신이 판결해야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사형제도와 같은 사안의 합헌성에 관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배우자 마틴 긴즈버그와 대통령 클린턴이 보는 앞에서 당시 연방 대법원장 윌리엄 렌퀴스트이 진행한 긴즈버그의 연방 대법관 취임식

그러나 청문회에서 그는 잠재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관한 질문에 답하였다. 예를 들면, 사생활 보호가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이며, 성평등에 관한 자신의 법적 철학을 길게 설명하였다. 법조인으로서 이미 의견을 표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솔직 담백하게 답변하였다. 1993년 8월 3일 96대 3으로 미국 상원이 임명 인준을 확정하였고, 이틀 뒤 청문보고서를 송부하였다. 1993년 8월 10일 연방 대법원 대법관으로서 선서를 하였다.

긴즈버그의 이름은 존 로버츠 현 연방 대법원장의 인사청문회에서도 등장하였다. 긴즈버그가 미국 국회의원의 특정 질문에 대답을 회피한 첫 후보자가 아니였으며, 로버츠 당시 후보자도 1981년 젊은 변호사로서 연방 대법관 후보자가 특정된 답을 주지 않을 것을 권고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평론가와 상원의원들은 로버츠 당시 후보자의 답변거부(방소항변)를 변호하고자 "긴즈버그 선례(Ginsburg precedent)"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2005년 9월 28일 웨이크포레스트 대학교 연설에서 긴즈버그는 로버츠가 인사청문회에서 몇몇 사건들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것을 "논의의 여지없이 옳았다(unquestionably right)"고 말하였다.

 
2010년 10월 1일 전 연방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 현 연방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 긴즈버그, 엘레나 케이건

연방 대법관으로서 판결편집

긴즈버그는 판결에 조심스러운 접근하며 연방 대법관으로서의 활동을 꾸려나갔다. 연방 대법관 지명 직전에 한 연설에서 그는 "개인적으로는 헌법과 판례에 관련된 판결에는 신중한 법정신청(motion)이 대체적으로 옳아 보인다. 경험상 급하게 만들어진 법의 해석들(doctrinal limbs)은 불안정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라고 말하였다. 법학자 캐스 선스테인은 자신의 비전에 헌법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 판례들을 조심스럽게 쌓아올리고자 하는 법관이라는 의미에서 그를 "합리적인 미니멀리스트(rational minimalist)"이라고 묘사하였다.

2006년 샌드라 데이 오코너 연방 대법관의 퇴임으로 인해 긴즈버그는 유일한 여성 연방대법관이 되었다. 뉴욕 타임스에서 거의 30년 동안 연방 대법원을 담당해온 린다 그린하우스 기자는 2006년-2007년 기간을 "긴즈버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이용한 때"이라고 불렀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법관임명후 처음으로 법정에서 자신의 소수의견들을 낭독함으로써 다수의견에 대한 자신의 강한 반대를 시사하였다.

2010년 존 폴 스티븐스 연방 대법관의 퇴임으로 연방 대법원의 "진보 성향계(liberal wing)"의 최고참이 되었다. 연방 대법관들이 보수 5대 진보 4로 갈라질 때, 긴즈버그가 진보계의 최고참으로서 소수의견을 누가 적을 것인지를 정하였다. 그는 판결문(다수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연방 대법관들이 "한 목소리"로 그리고 가능하면 단일화된 접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보적인 소수의견을 표현하는데 앞장섰다.

1993년 부터 2020년까지 연방 대법관으로 재직한동안 그는 흑인을 재판연구원으로 한명밖에 고용하지 않았다. 그전에 13년동안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재직시에는 흑인을 재판연구원, 인턴, 비서직으로 채용한적이 없다. 이런 다양성 결여는 1993년 인사청문회에서도 거론되는데, 그는 "(연방 대법관 자리에) 임명된다면, 흑인후보자사이에 자신의 매력은 향상될 것이다 "라고 발언하였다. 긴즈버그의 재판연구원으로 일한적이있는 백명이 넘는 사람이 운구자로 그의 장례식에 모이면서 이 이슈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긴즈버그 초상화 (2000)

성차별편집

1996년 미국 대 버지니아 사건의 판결문을 작성한 긴즈버그는 버지니아 종합군사학교(VMI)가 남학생만 모집하는 것이 수정 헌법 제14조의 평등조항을 위반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VMI와 같은 공적 주체(state actor)가 성별을 이유로 본교가 제공하는 독특한 교육을 누릴 기회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정부가 성별에 근거한 분류를 할시 "매우 설득력있는 정당성(exceedingly persuasive justification)"을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007년 레드베터 대 굿이어 사건에서 성별에 따른 임금차별을 금지한 민권법 제7장을 근거로 릴리 레드베터씨가 그의 고용주를 소송하였는데, 긴즈버그는 이 사건의 소수의견을 작성하였다. 5대 4로 다수(연방 대법원)는 여성이 남성동료보다 임금을 적게 받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하더라도 매 급여 주기마다 각각의 시효가 발생한다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긴즈버그는 본 판결이 불합리하다고 평가했으며, 여성이 임금차별을 받고있다는 사실을 대체로 인지하고 있지 못기에 매 급여주기마다 여성이 (남성동료의 임금을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긴즈버그는 남성주류업계의 여성이 (매 급여주기마다) 작은 급여차이로 소송하는 대신에 급여차이가 쌓이고 나서 소송하는것을 선호할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 그가 작성한 소수의견에서 의회가 민권법 제7장을 수정하여 이 사건의 판결문(다수의견)을 무효화하도록 촉구하였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당선 후 처음으로 서명하는 법안한 릴리 레드베터 임금평등법은 노동자가 임금차별소송에 승소하기 쉽도록 하였고, 긴즈버그는 이 법의 제정필요를 알리는데 기여했다고 평가받았다.

낙태편집

2009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긴즈버그는 낙태와 성평등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였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정부는 여성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지속적으로 임신중단권(abortion right)을 지지해왔으며, 2000년 네브래스카주 법무부장관 대 카하트사건에서 자궁 경부 개대 및 흡입술(Intact dilation and extraction)을 일절 불법화한 네브래스카주 주법을 위헌으로 판단하고 폐기한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도 동참하였다. 2013년 로 대 웨이드사건 판결 40주년 기념일에 그는 이 판결로 인해 임신중단권에 호의적인 사회적 합의을 이끌어낼수도있던 시민운동이 초기에 중단되었다고 비판하였다. 2007년 2007년 미국 법무부장관 대 카하트 사건에서 연방 대법원은 5대 4로 2003년 제정된 부분출산낙태금지법을 옹호하였는데, 긴즈버그는 이 사건의 소수의견을 작성하였다. 그는 부분출산낙태술이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의회의 판단을 그대로 따른 다수의견(판결문)을 반대하였다. 또한 의회가 그런 판단을 내린 방법과 진실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그의 반대입장을 서술하였다. 2016년 홀 워먼스 헬스 대 텍사스주 보건부장관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낙태시술 제공을 규제한 2013년 텍사스주 주법이 임시중절을 원하는 여성에게 과도한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본 주법의 일부분을 위헌으로 판결, 폐기 하였다. 5대 3으로 갈린 본 판결에 긴즈버그는 다수의견에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판결문보다 본 주법에 더 비판적인 보충의견(concurring opinion)도 작성하였다. 보충의견에서 본 주법이 텍사스주가 주장한 여성의 건강이 아니라 그들이 낙태시술을 받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압수와 수색편집

2009년 사포드 통합 교육구 대 레딩사건의 판결문을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동료 연방 대법관들에게 영향을 준 공로를 인정받았다. 연방 대법원은 학교가 여자교직원들이 마약을 찾을 수 있도록 13살인 여학생에게 속옷을 벗도록 한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전에 출판된 인터뷰에서 긴즈버그는 "그들은 13살 소녀가 돼본 적이 없다"면서, 몇몇 동료 연방 대법관들은 13살 소녀를 알몸수색하는 것의 파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8대 1로 연방 대법원은 학교의 수색이 도를 넘어섰으며 수정 헌법 제4조를 위반했다고 판결하였고, 학생이 학교를 소송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긴즈버그와 스티븐스 연방 대법관만 학교 교직원 개인들한테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견해를 밝혔다.

경찰관이 컴퓨터 시스템을 업데이트하지 않아 발생한 증거를 배제하지 않도록 판결한 2009년 헤링 대 미국사건에서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을 작성하였다. 증거 배제가 경찰의 위법행위를 막는 방법임을 강조한 다수의견의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의 의견과는 정반대로, 그는 증거 배제가 피고인의 수정 헌법 제4조 침해의 구제방안으로서 이에 대해 더 강경한 견해를 취했다. 그는 정부가 실수로서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과, 따라서 사법의 투명성(judicial integrity)와 민권(civil rights) 존중을 지키기 위한 구제방안으로서 증거 배제를 간주하였다. 그는 또한 실수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 경찰이 더 많은 신경을 쓰게 장려할 것이라 주장하며,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의 증거배제가 실수를 막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하였다.

국제법편집

긴즈버그는 또한 사법부의 판결에서 외국의 법령과 규범을 이용해 미국 국내법을 형성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몇몇 보수적인 연방 대법관들은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법원이 따라야만 되는 판례가 아닌 설득력있는 가치와 적당한 지혜를 위해 외국의 법령해석을 이용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그는 저명한 법학자인 존 헨리 위그모어존 애덤스 미국 2대 대통령을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라 칭하면서 국제법을 논의하는 것은 미국법의 오래된 관습이라 주장하였다. 그가 변호사일 때부터 국제법을 인용하였다; 연방 대법원에서의 첫 사건인 1971년 리드 대 리드에서 그는 두개의 독일 사건을 인용하였다. 2003년 그러터 대 볼링거사건에서 그는 미시간 법학대학원의 소수자 우대 입학 정책을 옹호한 다수의견 판결에 동참하였다. 보충의견에서 그는 이러한 우대 정책이 언젠가는 끝이 날것이며 이는 인종과 성차별해소를 위해 제정된 국제조약들과 일치한다고 언급하였다.

작성한 유명한 연방 대법원 사건의 판결문과 소수의견편집

연방 대법관 재직 중 다른 활동편집

 
긴즈버그 사진 (2006)

앨 고어의 요청으로, 1997년 1월 20일 빌 클린턴의 재선 취임식에서 긴즈버그는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의 재선 취임 선서를 진행하였다. 그는 취임선서를 진행한 세번째 여성이다. 2013년 8월 31일에 존 F. 케네디 센터 관장 마이클 카이저와 정부 경제학자 존 로버츠의 결혼의 주례를 보았고, 이로 인해 그는 동성혼 주례를 본 첫 연방 대법관으로 여겨진다. 그해 여름에 연방 대법원을 두개의 사건을 통해 동성혼 결혼권을 증진시켰다. 그는 동성 커플들이 이 사안에 대해 판결의 변화가 없을 것이고 끝을 맺음으로 인해 자신에게 주례를 봐달라고 요청한다고 믿었다.

연방 대법원 변호사(The Supreme Court bar) 인증서에는 연도를 표시할 때 서기를 "우리 주의 해에(in the year of our Lord)"라고 명시했었으나 몇몇 전통 유대인들(Orthodox Jews)이 반대하여 긴즈버그에게 이의를 제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긴즈버그의 이의 제기 후 변호사가 자신의 연방 대법원 변호사 인증서에 연도를 표기할 방법을 고를 수 있도록 바뀌었다.

이념적 차이에 불구하고 긴즈버그는 연방 대법관들 사이에서 앤터닌 스캘리아 전 연방 대법관을 가장 친한 동료로 여겼다. 이 둘은 자주 밥을 같이 먹었으며, 오페라도 같이 관람하였다. 그는 몇 오페라에 참여하였는데, 2003년 박쥐, 1994년에는 스캘리아와 함께 그리고 2009년에는 단독으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대사 없는 단역으로 참여하였고 2016년 연대의 딸에서는 단역으로서 그가 작성한 대사를 읊었다.

2012년 1월에 4일 동안 이집트에서 판사, 법학대학원 교직원과 학생, 법조인들을 만났다. 알 하야트 티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새 (이집트) 헌법의 첫번째 조건은 "미국의 수정 헌법 제1조와 같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다른 나라의 헌법에서 본따 이집트 새 헌법을 만들어야 되는 질문에 그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작성된 모든 헌법들"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라고 답하였다. 자신이 이집트 새 헌법을 작성한다면, 미국의 헌법남아공의 헌법을 참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1780년대 미국은 "매우 현명한" 남자들에 의해 헌법이 작성되어 운이 좋았으나, 당시에는 여성은 이러한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으며 노예제도가 남아있었다고 말했다.

2016년 7월 세번의 각각 다른 인터뷰에서 긴즈버그는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였는데, 뉴욕타임즈와 AP와의 인터뷰에서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는 뉴질랜드로 이사갈 수 있다고 농담까지 하였다. 그는 후에 자신의 발언이 "경솔"했다며 공화당 후보에 대해 코멘트를 남긴 것을 사과하였다.

 
2018년 미국 국가기록원에서 열린 귀하식에 참석한 긴즈버그

그의 첫 저서인 My Own Words는 2016년 10월 4일 사이먼 & 슈스터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출판된 그주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논픽션 하드커버 부분 12위에 등재되었다. 2016년 10월 케이티 커릭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책을 홍보하던 중 미식 축구선수 콜린 캐퍼닉이 경기전 국가제창 때 기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에 그런 시위는 "멍청한(ill advised)"짓이라고 답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판이 "부적절하게 무시하고 가혹(inappropriately dismissive and harsh)"했다며 이에 대해 사과하였으며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았고 그 질문 답변을 거부했었어야 했다고 언급하였다.

2018년에 그는 여성이 자신의 성희롱 경험 공유하는데에 용기를 주는 미투 운동에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는 선댄스 영화제 청중들에게 "때가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여성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침묵해왔으나, 지금은 법이 성희롱을 겪은 여성과 남성의 편이며, 이것은 좋은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코넬대학교 재학시절 화학과 교수의 시험점수가 시험정답을 성관계와 교환하자고 했던 시절을 포함한 자신의 성차별과 성희롱에 대해도 얘기하였다.

개인 생활편집

 
배우자 마틴과 함께 2009년 백악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긴즈버그

코넬대학교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긴즈버그는 마틴 긴즈버그와 결혼하였다. 그의 배우자는 후에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제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그가 연방 컬럼비아 항소구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되자, 둘은 뉴욕에서 워싱턴 D.C.로 이사했고 배우자는 워싱턴D.C.에 위치한 조지타운 법학대학원의 법학교수로 재직하였다. 딸 제인 긴즈버그는 현재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들 제임스 긴즈버그는 시카고를 기반으로 둔 클래식 음악 음반회사인 세딜 레코드의 창립자이자 회장이다. 긴즈버그는 4명의 손주의 할머니이다.

어록편집

  • "아이를 낳을지 여부는 여성의 삶의 방식, 행복과 존엄에 관한 핵심적인 결정이다. 이는 여성이 자신을 위해서 결정할 문제이다. 그 결정을 정부가 여성 대신한다면 이는 여성을 스스로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1993년 대법관 지명 의회 청문회에서)[1]
  • "(정원이 9명인) 연방대법원 대법관 중 몇명이 여성이라면 만족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내 대답은 늘 같습니다. '9명'입니다.(2015년 조지타운대 강연에서)[2]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