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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레닌주의(러시아어: Марксизм-ленинизм, 영어: Marxism–Leninism)는 공산주의경제·철학·정치·사회 이론을 이오시프 스탈린 주도하에 정립한 통일적 공산주의 사상이며, 근대 산업화 시대와 냉전 시대의 보편적인 공산주의 사상이다. 스탈린주의(러시아어: Сталинизм, 영어: Stalinism)라고도 불리나, 스탈린주의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세부적인 정책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연장선상에 속하며, 이에 더해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인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러시아어: Развитие капитализма в России)에서 밝힌 정치경제론을 시작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저서인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러시아어: Об основах ленинизма)의 기본 전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1920년대말 이오시프 스탈린은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론을 재정의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로 소련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설을 세웠다.[1][2] 1930년대 공산당의 공식적인 책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볼셰비키당사》(러시아어: История Всесоюзно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Краткий курс)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라는 용어를 보편화시킨다.[3]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소련 내에서 수정주의 기조를 거치게 되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는 마오쩌둥 사상(毛澤東思想, Maoism),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는 주체사상(主體思想, Juche)의 형태로 반수정주의화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냉전 시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회주의국가가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던 이념이며, 현재도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와 폭력혁명(暴力革命)를 동반한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사상 체계이다.

목차

개요편집

일반적으로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하나의 사회 실현 가능성 또는 완성된 사회를 의미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산업화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한단계 낮은 공산주의인 사회주의 사회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성립, 과도기적 단계를 통해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이 과정을 모두 설명해 놓았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사상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러시아의 레닌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 체계를 확실화 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방법은 크게 저술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주의인 즉, 공산주의를 실현시킬 모든 방법이 구체화 되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제국주의론, 인간해방론 등 기존의 경제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인간의 철학적면을 구체화했다.

이 사상은 1세대 공산당들의 주요 이념이 되었는데 이는 공산주의의 정치, 사회, 철학, 경제, 문화 면을 모두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론적 기반은 레닌주의로부터 나왔으며, 1917년 혁명 이후 보완해야 할 점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스탈린에 의해 계승됐다. 레닌주의는 당시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카우츠키주의, 룩셈부르크주의과의 치열한 사상적 경쟁을 통해 탄생된 공산주의 분파 사상이므로, 최초의 공산 혁명인 러시아 혁명은 이 레닌주의를 기점으로 일어난 혁명이다.[4] 기존 마르크스주의에서 논의됐던 인식론 문제인 뒤링과 엥겔스의 논쟁에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을 최종 계승하여 일명 'DIAMAT'라고 불리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장기간의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필요성과, 소위, 식민지민족해방운동(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 운동의 연합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탄생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공산권이 붕괴된 지금까지 민족해방운동과 연계된 사상이기도 하다.[5]

사회주의국가에서 노동자·농민·인민 위원회(소비에트)의 독재의 필요성을 서술했다. 또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종교 문제에도 급진적으로 개입하여, 국가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민주집중제에 기반하여 당 독재를 정당화했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한 인민의 지도자 또는 수령의 독점적인 역할을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강조한 만큼 의회주의와 국민주권론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에 필적하는 대표적인 사상이었다.

또한, 혁명에 대한 입장도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랐는데, 기존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 소위, 칼 카우츠키를 신봉하는 - 들의 경우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그 공황으로 인해 자본가는 최후의 선택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노동자들과 계급대립이 정점에 이르면서, '자발적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레닌주의자들은 이미 유럽의 자본주의 공황은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이미 러시아에 영향을 준다고 봤다. 자본의 팽창에 따른 공황, 그리고 그 공황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국경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세계 단위로 이루어진다. 그 근거를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태동했던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자본주의 공황으로 인한 주위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혼란 조성을 예로 들었으며,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그저 노동자 세력이 와해되거나, 유산계급에 헌신하는 국가의 무차별적 탄압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6]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가 깊게 조명하지 못 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제도화를 계획했다. 이러한 면에서 레닌주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려고 했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레닌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7]

스탈린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와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공산주의라고 흔히 불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되었으며, 이 공산주의 이론은 많은 공산주의 체제 국가들의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 그의 이론이 어느정도 들어간 여러 공산주의 분파 사상들은 매우 많으며 그 중 스탈린주의도 포함된다. 그 외 마오쩌둥 사상, 호치민 사상, 티토주의, 카스트로주의, 게바라주의, 주체사상 그리고 호자주의 등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형성하여 나온 사상이다.

역사 이론편집

노농동맹론편집

블라디미르 레닌1907년에 저술을 완료한 『농업문제와 소위 '마르크스비판'』[8]에서 농민의 혁명성을 인정하였다. 그는 농민의 경제사적 역할과 재화 소유 방식을 분석했을 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쁘띠부르주아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토지를 사회주의적 경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역사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동시에 농업도 또한 사회주의에 걸맞는 생산관계 형태가 노동집약적 산업과는 별도로, 또는 서로 연게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주장의 준거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자본주의 농업 발전의 두 가지 길'이라는 이론을 내세웠다. 여기서 논해지는 두 가지 길 중 첫 번째는 당시 유럽에서 농업생산력이 상당히 높았던 프랑스를 기준으로 논해진 것으로, 국내 농업에 대한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전개하여 자본주의화를 앞당기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 양상은 소위,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두 번째는, 식민지 곡물을 이출하여 국내 지대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경로는 바로 영국의 모델이다. 그는 동시에 스페인이탈리아이 거친 자본주의화하의 지대 문제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였다.[9] 그는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도 또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맞아들면서 기존의 '소수의 대지주와 압도다수의 소농'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농업 체계가 흔들리고 소규모 자영농이 일반화 된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로 발전한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농업 경제도 잉여가치 독식이라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에, 농민도 또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향하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성격을 일정 수준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이론에 기반하여 1917년 2월 혁명의 이후에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는 더 진보된 농업 경제 구조화를 막는 원인이 되었다고 하였다.[10]

분파 자본주의사회하 농민의 역사적 성격 자본주의사회하 농민의 혁명성 자본주의적 농업 생산 구조에 대한 평가 사회주의적 농업 생산 구조의 가능성
볼셰비키 쁘띠부르주아적 성격과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 혼재 인정 발전 가능
멘셰비키 쁘띠부르주아 불인정 발전 불가능
나로드니키주의자 공산주의 형성의 주체 인정 퇴보 원시적 농업 공동체를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기반이라고 평가

결국 농업의 자본주의화는 봉건적 농업에 비해 진보된 것이나, 농업 노동력의 착취는 여전하기에 농민의 빈곤화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농민이 산업노동자와 같은 혁명의 유적존재로서 거듭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된다. 결과적으로, 토지의 사회주의화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빈농의 인간해방을 위한 것이기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빈농의 혁명성을 중시하였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농업의 하부 구조 변혁은 상업 이후의 산업이라는 공간의 변혁 속도에 비해서 매우 늦고 둔감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는 즉, 농민이 혁명적 변화에 있어서 근로대중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나로드니키주의에 대한 비판편집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진보적 귀족과 러시아 농촌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브 나로드에서 파생된 나로드니키주의(Narodnichestvo) ― 소위 당시 인민주의라고도 불린 ― 는 농업 발전의 모든 양상을 거부한 극단적인 정체적 사고라고 비판하였다. 당시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는 농업 소유 구조에서 완전한 악(惡)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농업 소유 구조는 인간의 선의에서 벗어난 반인류적 구조인 것이며, 과거의 원시적 농업 형태가 선(善)에 해당하는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전형이라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 유럽국가의 산업 발전과 농업 구조의 변혁을 실증적으로 검토하였고, 마르크스주의의 지대 이론에 따라 자본주의적 농업 구조는 이전 봉건적 농업 구조에 대해서 발전된 양상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 특유의 소규모 자영농 위주의 농업 생산 구조는 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킨 결과물로 나온 것이며, 기본적으로 이 과정에서 지주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켰다. 즉, 이전의 봉건적 농업 구조에 비해 '농지'(農地)이라는 생산수단에 대해서 인민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기반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이 경제 문제에 도덕주의라는 허울을 들씌웠다고 비판하였다. 즉, 그들의 주장은 고대사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모든 소유 구조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주장이란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있어서 이 인민주의 운동은 일종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비슷한 것이었다.[11]

멘셰비키에 대한 비판편집

당시 교조주의 입장에서 농업 문제를 바라봤던 멘셰비키의 강령도 블라디미르 레닌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멘셰비키들은 농업은 중세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단계에서 그 발전성을 완전히 다했다고 보았다. 즉,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완전히 산업노동자의 수중에 달린 것이며, 농업의 발전은 자본주의 상태에서 완전히 끝난 것이다. 즉, 이러한 역사 과정 속에서 농민은 자본주의 사회하에서 발전된 토지 수유 구조를 대변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성격을 버릴 수 없게 되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혁명에 방관하는 입장을 취하는, 혁명성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주장을 앞서 서술된 농업 발전의 보편성 예시를 들어 비판하였다. 농업은 공산제 사회에서 노예제 사회로 넘어왔을 때, 그리고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로 넘어왔을 때 항상 변혁의 과정을 겪었으며, 그러한 변화의 양상이 자본주의라는 공산주의로 향하는 중간 단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고 하였다. 동시에 실증적으로도 자본주의 농업 소유 구조가 농업 생산 구조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2]

단계론편집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신의 저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러시아가 기존의 농경에 기반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혁명의 진입기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또한, 1917년 4월테제(April Theses)에서 2월 혁명의 영향으로 이제 자본주의로의 도약이 완료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혁명적 분위기 조성(Революционная ситуация)에 부응하여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를 산업노동자 계급이 선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멘셰비키와 자주 충돌을 야기하는 입장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발전의 성숙도'와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판했었는데, 이는 멘셰비키가 이 두 가지를 결정론적으로 연계시켜서, "국내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의 성숙도가 없다면, 사회주의로의 혁명도 또한 절대불가."라는 국민주의·교조주의적 해석을 가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Государство и революция)에서 멘셰비키와 이에 동조하는 소위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하였다.[13]

혁명적 분위기 조성의 객관적 조건에서 자본주의로의 도입이 필수요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가 이를 '발전된 자본주의'라 칭한 이유는, '발전된 자본주의'가 갖는 제국주의적 속성 때문이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지구적인 식민지 쟁탈 현상은 유럽 내에서 국경 없는 '자본주의 발전 성숙도'에 기반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은 당연히 생산력 발전에 기반한 것이다. 현재 유럽의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는 스스로의 생산력을 감당하지 못 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러시아 내에서도 역시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중략)… 따라서 멘셰비키들의 주장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에 대해 국가라는 틀에 한정지어서 해석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 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혁명』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러한 지론은 생산력 발전을 국가의 단위가 아닌, 세계의 단위에서 보아야 한다는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로 넘어왔다. 생산력의 과잉 시대로 진입한 현 시점에서 혁명의 고조는 제국주의 분쟁의 중심지인 유럽에서 산발적이며, 분산적일 수밖에 없다."[14]라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언급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후 1년 후인 1918년블라디미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Пролетарская революция и ренегат Каутский)라는 저서를 통하여 독일 내 수정주의자들과 이른바 카우츠키류의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는 생산력 발전이라는 논의 차원을 오직 국경으로 선이 그어진 국내 안에서의 생산력 발전에 국한한다는 점이서 비슷한 반혁명 사조라고 비판하였다.

인민민주주의편집

혁명적 분위기 조성(Революционная ситуация)이라는 개념과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영향은 전지구적이라는 세계혁명적 관점에 기반하여 사회주의 러시아를 건설한 그이지만, 당시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서유럽에 비해 뒤쳐진 상태란 것은 그도 인정한 바였다.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본주의적 본원 축적을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의 방식으로 축적하게 되는데, 1936년 12월 5일 전 연방 소비에트 제8차 대회는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헌법(스탈린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이 기간을 포함하여 1918년에서 1936년 사이까지를 인민민주주의(Страны народной демократии, People's democracy) 단계라고 규정하게 되었으며, 헌법이 채택된 시점에서 소련은 더이상 자국을 인민민주주의 단계가 아닌,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국가'라고 규정하였다.[15]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패하고 수많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공산화되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유럽 지역의 혁명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한반도 이북 지역도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규정하여, 광범위한 통일전선에 따른 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 뿐만이 아닌, 민족자본가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중산쁘띠부르주아의 연합 정권의 형태를 보였다. 중국의 경우는 이를 신민주주의라고 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많은 공산당 통치 국가가 국호에 '사회주의'를 넣지 않고, '민주주의인민', '인민', '인민민주주의' 등을 넣은 것도 위와 같은 단계론에 기반한 것이다.

이 상태하에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하급인민위원회에 따른 지역 관리 등을 통하여 자본주의 잔재를 잠식하고, 동시에 토지개혁을 수행하여, '인민의 적'으로 분류된 집단에 의한 반혁명기도를 분쇄할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는 목적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인민민주주의' 또는 '민중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완전히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없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기 위한 명확한 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차별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16]

제국주의론편집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경제학 이론서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설명하였고, 거대한 초국적 기업과 강대국 자본주의의 약소국 경제에 대한 착취 루트에 분석한 이론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구성체하에서 자본가들은 더 많은 잉여가치를 독식하기 위해 식민지 쟁탈전을 필연적으로 감행할 수밖에 없다.

사회 이론편집

여성이론편집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여성이론은 기본적으로 당성(黨性)에 충실한 인간을 만든다는 근본적인 관점에 의해 전개된다. 즉, 당성의 입장에서 양성의 지엽적인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에서 여성인권, 여성지위는 그것이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목적하에 이루어진 면이 크다. 또한, 자본주의사회는 인간의 무분별한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정체이므로, '남성은 남성의 몸과 자연적 본능, 여성은 여성의 몸과 자연적 본능'이라는 성차별적 양분화는 자본주의사회하에서 필연적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이 지배하는 곳은 남성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주장하여 진정한 여성해방의 길은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는데, 위와 같은 맥락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10월 혁명 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어떤 방향으로 양성 평등 정책을 이어나갈지에 대해선, 독일의 여성주의자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인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과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그는 당시 유럽의 부르주아적 신념을 가진 근대적 여성들의 투쟁이 지나치게 문화 일면적 투쟁을 해왔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자유연애주의, 동성애와 연계하여 여성운동을 지도하는 것을 상당히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이 가져온 '가사노동에서의 해방'과 '여성의 기본적 선택권 존중'을 성평등 층위에서 커다란 발전이라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성차별을 근본적으로 없애지 못 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사회가 인성(人性)에 대해서 '유적존재'(Gattungswesen)로서의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욕구하는 개인과, 그것을 이루는 개인, 그리고 이루지 못 하는 개인, 이 세 가지 측면에 기초한 인성론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모든 교환은 등가교환이라는 정의 아래에서, 여성에 대한 노동착취도 또한, 여성의 특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등가교환이라는 궤변에 익숙한 역사 단계가 바로 자본주의이며, 이는 자본주의가 가진 본질적 특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사회하에서 인민은 여성을 바라볼 때,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여성의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며, 남자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의 기득권자들과 옹호 세력은 이를 '다양성', '다원성'이라는 이름하에 조장하고 옹호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빈곤 여성의 매매춘과 탁아소 부족으로 인한 고질적인 여성 인권 문제가 거론 되었는 데에 반해 소련은 보육원, 탁아소 정책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진행 되어 있었으며, 연방 성립 초기부터 여성이 거리낌없이 고급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당시 이러한 상황을 본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존 리드는 소련 방문 당시 이러한 모습을 보고 소련의 여성 정책을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17] 여성이론은 급진적 담론을 거부하고, 여성해방의 유일한 길은 정치경제적으로 낡은 생산 관계를 끊는 것이라고 한 점을 보아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의 전형이라고 보여진다.[18]

청년학생론편집

블라디미르 레닌은 청년들이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해선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문맥적 이론만 아는 것이 아닌 '직접 행동'과 '실천'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본주의 사회건 공산주의 사회건 인텔리겐치아는 약자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등 교육기관은 다수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얻은 잉여자본으로 만들어진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은 착취당하는 노동자 없이 존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고등 교육기관에 몸담을 수 있는 계층은 주로 중상류층 이상의 자녀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한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로 세워진 교육기관인 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받은 인텔리겐치아는 이 사실을 아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지 않아야하며,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법칙이 성립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교육기관은 국유화되고, 더 이상 착취 자본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을 이루는 재원들은 모두 노동의 결과물이란 점이다. 공산주의 대중계급의 집단적 노동 산물인 교육기관에서 종사하는 지식인은 역시 노동계급에게 봉사해야 할 의무가 뒤따른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패거리를 형성하기 위한 '장(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교육을 '낡은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교육의 특징은 주입식 교육과 암기 위주란 점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교육 방식이 이론과 실천을 괴리시키는 가장 악질적인 교육 방법이라고 봤으며, 장기적인 지식 발전을 저해하며, 이러한 교육을 받은 청년 다수는 자본가의 하수인 역할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근대, 근대를 포함해서 축적된 지식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려면 마르크스주의만을 아는 것이 아닌, 그 전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인문과학적 이론을 학습한 상태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20년 10월 2일 러시아 공산청년동맹 제3회 전러시아 대회에서 한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이 책을 통하여, 혹은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그대로 공산주의 이론과 과학은 주로 마르크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위대한 천재였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와서 마르크스주의의 학설을 19세기에 태어난 한 천재적인 공산주의자 1명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학설은 전 세계 수백만, 수천만 무산계급에게 교훈이 되었고,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에서 이 학설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마르크스의 학설은 혁명적인 수백, 수천만 계급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던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진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얻어진 인간 지식의 확고한 토대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사회의 발전법칙을 연구한 결과, 자본주의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공산주의로 인도된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그의 생전에 발달되었던 모든 학문의 성과를 완전히 소화하여서, 그것을 이용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상세하며 심오한 연구를 진행시킨 결과, 처음으로 위의 내용을 과학적 방법론의 하나인 연역법을 통해 증명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모든 것을 단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비판적으로 검토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사고작용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을 바로잡고 비판하였으며 노동운동의 현실을 통하여 검증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적인 형식에 제한되거나 부르주아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도저히 이끌어 낼 수 없는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무산계급 문화를 논할 때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오직 인류의 전발전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과거의 문화를 개혁할 때에만 비로소 무산계급 문화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무산계급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무산계급 문화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고안해 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전적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무산계급 문화는 자본가, 지주, 탐욕스러운 관료의 압제 아래에서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의 보고를 합법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크고 작은 다양한 지식의 샘은 모두 무산계급 문화라는 바다로 인도되어 플러들어왔으며 현재에도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혁명적으로 뜯어고친 경제학이 인류 사회가 도달해야 할 지점을 명시해 주고 계급투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결국 무산계급 혁명이 개시될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는 것과 같습니다.

청년 대표자들과 새로운 교육을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낡은 학교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라고 공격하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는 데 나는 그들에게 낡은 학교 교육 가운데서도 유용한 부분은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낡은 학교 교육은 젊은이들의 머리에 너무나 많은 지식의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게다가 그 지식의 90%는 쓸모없는 것이고 나머지 10% 조차 왜곡된 것인데, 이런 것을 낡은 학교로부터 배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야 할 대상을 공산주의가 내린 결론만으로 한정하거나 공산당의 슬로건만을 암기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창조한 문화유산에 대한 모든 지식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의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입식 교육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초적인 사실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모든 학생의 두뇌를 발달시키고 완전하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획득한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서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공산주의 학설은 내용 없는 공허한 것, 단지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간판으로 되어버릴 것이고 공산당원은 단순한 허풍선이로 전락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지식, 즉 과거의 문화유산을 단순히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억지로 머릿속에 틀어넣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교양 있는 인간이 되는데 필수적인 사실에 관한 지식으로 자신의 두뇌를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공산주의자가 중요하고 힘든 활동은 그다지 하지 않으면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할 사실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책에서 이미 내린 결론만을 가지고 공산주의에 대하여 허풍을 떤다면 그는 참으로 한심한 공산주의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행동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매우 해롭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보다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그 이상 자세히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공산당원 답지 못한 사람입니다."
1920년, 블라디미르 레닌

이 연설을 통해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과학적 방법론을 신뢰하며, 지성주의자이자 각종 지식을 쌓아서 선험적인 종합판단을 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 한 합리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입장은 사후 '전소비에트동맹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개조하면서 중요한 이론으로 채택했다.[19]

인식 이론편집

변증법적 유물론편집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에 영향을 받은 레닌은 당의 세계관적 교조를 만듦에 있어 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과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을 기반화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역사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존재론을 논의하는 것을 기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변증법의 논리를 사회와 역사 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카를 마르크스 사후에 형성된 유물론은 주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철학과 관련이 깊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기존의 모순 관계에 따라 변화-발전하여 새로운 것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즉,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자연과학적 맥락까지 적용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반뒤링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엥겔스의 이른바 '자연변증법' 철학적 교조는 자연스럽게 레닌에게 이어져 상당히 결정론적인 변증 유물론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DIAMAT)를 국정 철학으로 교조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유물론 서적을 저작했는데, 대표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О диалектическом и историческом материализме)이 있다. 스탈린 사후인 1958년에 저작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와 1960년에 저작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는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상을 체계화 하여 정리한 서적에 해당된다.

스탈린 이후 형성된 DIAMAT는 기본적인 4대 교조를 갖고 있었는데, 첫 번째로는 제현상의 보편적 관련과 상호의존성 두 번째로는 자연과 사회에서의 운동·변화·발전, 세 번째로는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으로서의 발전, 네 번째로는 대립물의 투쟁으로서의 발전 등 네 가지를 들고 '부정의 부정' 법칙 삭제이다.

이러한 철학 교조는 공산주의의 승리는 필연적이며, 공산주의사회의 성격은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으로 체현된 국가'와 같은, 최고의 경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립했다. 또한, 인간이 경제적 생산력에 따라 어떠한 발전 경로를 가질 수 있으며, 문명화 된 인간과, 그렇게 되지 못 한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중심추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인지심리학 이론가인 비고츠키 등이 나올 수 있는, 인지과학이 발달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지만, 70년대부터 거듭된 현대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해 DIAMAT의 교조성이 깨지기 시작한다. 특히 양자역학의 발전과 혼돈 이론의 성립은 DIAMAT의 자연물의 대립과 투쟁의 보편성에 관련된 결정론적 경향에 커다란 치명타를 주었다. 이는 생산 관계와 생산력 간의 모순으로 인해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기존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넘어서 모든 자연물의 대립과 투쟁을 통한 변화-발전을 교조화 했던 소련의 정통 변증법적 유물론 진영에게 이론적 수정의 경향성을 불러왔다.[20]

전술 이론편집

일국일당원칙편집

러시아 내전 도중인 1920년 8월 7일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2차 코민테른 대회를 통하여 각 식민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당의 조직과 동시에 당은 오직 하나여야 하며, 종파주의 활동을 엄금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21] 이러한 제2차 코민테른 대회의 일국일당원칙은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중국의 경우는 약 1년 후에 중국 공산당이 창건되었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도 1925년조선공산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당 조직 원칙에서 파당주의로 대표되는 종파주의는 엄금되며, 한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세부적 주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나의 당에 단결된 상태여야 한다.

전위당론편집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들이 전위당의 단결이 없이는 서로 종파 분쟁에 휩쓸려서 혁명의 퇴조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공신력이 없는 지휘체가 없이 이들이 적극적으로 파업을 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체제는 전복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때문에, 공산주의 및 기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알고있는 소수의 혁명가들이 전위대를 만들어 직접적인 폭력 투쟁에 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전위당론(Vanguardism, 前衛黨論)이라고 한다. 이는 사회주의적 대중정당론을 주장했던 멘세비키와 전적으로 대립되는 주장이었다. 그들의 세부적 주장 차이는 다음과 같다.

분파 당원이 되기 위한 조건 당의 역할 당의 규율 당의 운영 방식
볼셰비키 산업노동자, 농민, 빈민, 혁명적 병사 및 지식인 중 선발된 우수한 자 노동운동, 무장봉기, 이념투쟁 등을 직접 지휘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혁명적 집단주의에 근거하여 엄격한 당성(黨性)을 유지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한 집단지도제
멘셰비키 혁명에 동참하는 모든 대중 혁명 세력의 통합과 외연 확대 개인성과 자유의사주의의 기초 위에서 혁명 활동에 맞는 규율을 성립 외부 조직, 당원, 당 지도부의 자유참여에 의한 운영원리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당 조직 이론은 서로 화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나게 되었고 결국 1912년 서로 독립적인 당(黨)임을 선언하였다. 1918년 이후 멘셰비키는 볼셰비키당(러시아 공산당)의 독단주의와 엄숙주의를 비판하며, 대중정당으로의 전환을 요구했으며, 1927년부터는 해외에 망명한 멘셰비키들에 의해 해당주의(解黨主義)가 주장됐지만, 전위당론은 여전히 공산당의 기본적인 조직 원리이자, 당 조직론으로 굳어진 상태이다.

통일전선편집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은 1919년 창립과 동시에 각국의 공산당 지부에 사회민주주의자를 공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맹공 태세는 1930년대스페인 내전, 독일의 나치 집권 등의 수많은 반동적 사건이 터졌을 때도 유지되었다. 그 결과 스페인 내전에서는 공화파 내 고립주의와 내분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했으며, 약소식민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종파주의 현상이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하게 된다. 결국 1934년 8월 2일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중심으로 반파쇼인민전선론이 채택되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통일전선(United front, 統一戰線)이라 불리는 것의 시초이다. 주요 골자는 반파쇼 항쟁을 위하여 각국의 민족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22]

정치 이론편집

민주집중제편집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구현하는 민주주의적 중앙집권 통치체제이다. 냉전 시절 부터 현재 까지 모든 사회주의국가는 소위 '민주집중제'(Демократический централизм, 民主集中制) 통치체제를 받아들였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편집

블라디미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타 제국주의 세력을 경계하고 자신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판편집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평등의 필요성을 근거로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라는 주장이 가장 흔한 비판으로 되고 있다. 이런 비판을 가한 대표적인 학자는 한나 아렌트, 칼 포퍼, 앙리 베르그송, 위르겐 하버마스 등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유럽에서 발생한 파시즘나치즘이랑 동일선에 놓았다.[23] 칼 포퍼플라톤의 전체주의적 철인정치의 대표적인 현대적 구현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기본적으로 역사법칙주의(Historicism)에 기반한 전체주의 원리의 파생물이다. 따라서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단 하나의 진리주의를 설파하게 되며, 이 이념에 근거한 국가는 폐쇄를 지향하게 되고 다양성을 무조건 거부하게 되어있다. 더욱 큰 문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이념의 설파에서 그치지 않고, 이 이념에 기반한 실질적 행동을 집단적으로 개시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이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빠르게 퇴조되고 집단의 인식 수준도 심각하게 저하하여 모든 면에서 개방성과 경쟁력을 잃게 된다.[24] 위르겐 하버마스숙의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좌파 파시즘이라는 용어로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그 인식론의 기반부터 다원성을 거부하고 있으며, 획일적인 일원론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진리관이 명확한 철학이 지배하는 정치 공동체도 역시 교조화되고 전체주의라는 심각한 결함을 내보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였다.[25]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일당독재 정체(政體)는 자유주의를 포함하여 이와 유사한 사상을 지지하면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심한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당독재라는 정치적 성격은 최고통치자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일인독재로 변질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관료화가 되었으며, 이로 인한 관료주의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기도 하였다. 소련의 경우는 관료계층을 비판하는 용어로 노멘클라투라(номенклату́ра)라는 말이 있었다. 노멘클라투라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누리면서 부정축재를 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결국 이러한 관료주의 정체로 인해 자기부정을 통해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적응한 서구권과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혁신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였으며 이는 동구권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비판이 있다.[26]

갈등편집

마르크스-레닌주의는 20세기 초반 공산주의 분파의 주된 사상중 하나로 큰 세력을 형성했지만, 같은 공산주의 진영인 좌파공산주의, 그리고 같은 사회주의 진영인 아나키스트, 조합주의자들에게도 큰 비판을 받았다. 이 세 가지 진영이 공통점으로 언급한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중앙당의 권력이 매우 강하여, 군소 분파의 정치적 권리가 없고 또한 권력 구조가 매우 비민주적이고 국가 기관을 절대화하여 마르크스주의 역사 전례에 없던 권위주의를 새로 만들어낸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강력하고 확실한 위계질서가 없는 혁명 정당은 결국 혁명에 실패하게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에 국가 체제가 확고히 다져지지않으면 타 제국주의의 반동 책략에 의해 모든 공산주의 혁명 과정이 물거품이 될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그리고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에 대하여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적 정당이 없다면, 혁명도 없다"라고 일침하였다.

이러한 갈등 현상에 의한 이론 변증은 1900년대에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1910년대 때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한 러시아 혁명(1917년)이 성공하면서 여러 마르크스주의 분파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전향하거나, 그나마 남아있던 마르크스주의 분파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향해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관련 집단편집

혁명적 정당의 역할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공산당을 기점으로 모였다. 지금은 사라진 코민테른의 경우도 마르르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한 공산당을 지도하던 국제 노동운동 기관이었다. 21세기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해서 정권을 잡은 정당은 베트남 공산당, 라오 인민혁명당, 쿠바 공산당, 중국 공산당, 조선로동당이 있으며, 대부분 국가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은 비집권 소수정당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는 1991년 소련의 붕괴와 관련이 깊다. 붕괴 이후 수많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사회자유주의로 전향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련의 붕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불신을 높이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다만 네팔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세력이 연정을 통해 정권을 잡거나 보수 정당인 통합러시아당 측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사상 최대의 하원 의석을 확보하는 등 최근들어 재기를 꾀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현존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편집

관련 서적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The New Fontana Dictionary of Modern Thought (1479) Third Edition, Allan Bullock and Stephen Trombley, Eds., p. 506.
  2. Lisischkin, G. (Г. Лисичкин), Novy Mir (Мифы и реальность, Новый мир), 1989, № 3, p. 59 (러시아어).
  3. "Marxism" entry in the Soviet Encyclopedic Dictionary.
  4. 이 항목은 1999년에 저작된《The New Fontana Dictionary of Modern Thought Third Edition》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5. 이 항목은 1953년에 저작된《The Impact of Russian Culture on Soviet Communism》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6. 이 항목은 1991년에 저작된《The New Penguin Dictionary of Modern History》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7. 이 항목은 1969년에 마쉬 로윈이 저작한《Lenin’s Last Struggle》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8.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이라는 저서로도 알려져 있다.
  9. 블라디미르 레닌 저, 김인식 역,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백두, 1989년) pp. 66 - 67
  10. 블라디미르 레닌 저, 김인식 역,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백두, 1989년) pp. 69 - 71
  11. 블라디미르 레닌 저, 김인식 역,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백두, 1989년) pp. 103 - 106
  12. 블라디미르 레닌 저, 김인식 역,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백두, 1989년) pp. 41 - 48
  13. 블라디미르 레닌 저, 문성원, 인규남 역, 『국가와 혁명』(2015년, 돌베개) pp. 146 - 199
  14. 블라디미르 레닌 저, 남상일 역, 『제국주의론』(1986년, 백산서당) pp. 100 - 112
  15. Loeber, Dietrich André, 편집. (1986). 《Ruling Communist Parties and Their Status Under Law》. Law in Eastern Europe 31. Dordrecht: Martinus Nijhoff Publishers. 438쪽. ISBN 9789024732098. 2015년 12월 19일에 확인함. [...] with the exception of the 1924 Mongolian Constitution, all of the constitutions of the Eastern European and Asian Communist states were adopted after the second USSR Constitution of 1936 had been promulgated in which the first direct mention of the Communist Party can at last be found .
  16. Nation, R. Craig (1992). 《Black Earth, Red Star: A History of Soviet Security Policy, 1917-1991》. Cornell University Press. 85–6쪽. ISBN 978-0801480072. 2014년 12월 19일에 확인함. 
  17. 로버트 A. 로젠스톤 저, 《존 리드 평전》(아고라 출판사) p. 202 참조
  18. 블라디미르 레닌의 여성주의 입장에 대해 정리한 《공산주의청년여성이론》참조
  19. 블라디미르 레닌의 교육, 청년활동 입장에 대해 정리한 《공산주의청년학생론》참조
  20. 스티븐 호킹 저, 《시간의 역사》 pp. 50 ~ 52
  21. Branko Lazitch and Milorad M. Drachkovitch, Lenin and the Comintern: Volume 1. Stanford, CA: Hoover Institution Press, 1972; pg. 271.
  22. 『코민테른과 통일전선』(백의, 1988년) pp. 145 - 153
  23. 한나 아렌트 저, 박미애, 이진우 역, 『전체주의의 기원 II』(2006년, 한길사) pp. 132 - 150
  24. 칼 포퍼 저, 이한구, 정연교, 이창환 역, 『역사법칙주의의 빈곤』(2016년, 철학과현실사) pp. 110 - 124
  25. Jürgen Habermas, "Die Scheinrevolution und ihre Kinder. Sechs Thesen über Taktik, Ziele und Situationsanalysen der oppositionellen Jugend" (Frankfurter Rundschau, 5 June 1968) in: Wolfgang Abendroth, Oskar Negt, Die Linke antwortet Jürgen Habermas, Europäische Verlagsanstalt, pp. 5–15. Habermas later retracted the term in: Jürgen Habermas, "Probe für Volksjustiz", Der Spiegel, 10 October 1977.
  26. 노희상 저, 《공산주의 비판노트》 pp. 313 ~ 32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