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렌타로
미즈노 렌타로(일본어: 水野 錬太郎, 1868년 2월 3일 ~ 1949년 11월 25일)는 일본의 내무관료이자 정치인, 내무대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문부대신, 귀족원의원으로 요직을 역임한 사람이다.
미즈노 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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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46대 문부대신 | |
임기 | 1927년 6월 2일-1928년 5월 25일 |
전임 | 미쓰치 주조 |
후임 | 쇼다 가즈에 |
군주 | 쇼와 천황 |
총리 | 다나카 기이치 |
일본의 제40대 내무대신 | |
임기 | 1924년 1월 7일-1924년 6월 11일 |
전임 | 고토 신페이 |
후임 | 와카쓰키 레이지로 |
군주 | 다이쇼 천황 |
총리 | 기요우라 게이고 |
일본의 제38대 내무대신 | |
임기 | 1922년 6월 12일-1923년 9월 2일 |
전임 | 도코나미 다케지로 |
후임 | 고토 신페이 |
총리 | 가토 도모사부로 |
조선총독부의 제2대 정무총감 | |
임기 | 1919년 8월 12일-1922년 6월 12일 |
전임 | 야마가타 이사부로 |
후임 | 아리요시 주이치 |
총독 | 사이토 마코토 |
일본의 제35대 내무대신 | |
임기 | 1918년 4월 23일-1918년 9월 29일 |
전임 | 고토 신페이 |
후임 | 도코나미 다케지로 |
총리 | 데라우치 마사타케 |
일본의 제21대 내무차관 | |
임기 | 1916년-1918년 |
전임 | 구보타 기요치카 |
후임 | 고바시 이치타 |
장관 | 고토 신페이 |
일본의 제18대 내무차관 | |
임기 | 1913년-1914년 |
전임 | 오시카와 노리키치 |
후임 | 시모오카 주지 |
장관 | 하라 다카시 |
일본의 귀족원 의원 | |
지역구 | (칙선의원)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68년 2월 3일 |
출생지 | 에도 천초조월 정 (오늘날의 도쿄도 다이토구 도리고에) |
사망일 | 1949년 11월 25일 | (81세)
학력 |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
정당 | 교우구락부 |
상훈 | 정3위 |
개요
편집아키타 번의 번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키타 중학교(현재 아키타 현립 아키타 고등학교), 제일고등중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내무성에 들어갔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가담하였다.
1919년, 신임 정무총감으로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는데, 남대문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우규가 이들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미즈노는 다치는 데에서 그쳤다. 일본에서는 저작권법을 제정할 때 저작권 보호를 추진한 인물로 유명한 반면, 한국에는 간토 대지진 당시 내무대신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악감정을 조장해 학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