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 2명이다.[1]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2]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기독교계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1]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3]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2년간의 구금 이후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4],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손병희 등은 복역 후 병사하였다.

명단 편집

종교 이름 사진 생몰 출신 지역 신분 형량 이후 행적 건국훈장 등급 서훈 년도
천도교 손병희   1861~1922 충북 청주 천도교 3세 교주 징역 3년 병보석 출감 후 사망 대한민국(1) 1962
권동진   1861~1947 충북 괴산 천도교 도사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관련 1년 복역
대통령(2)
오세창   1864~1953 한성 서예가, 전각가, 및 금석학
역사가로 활동
임예환 1865~1949 평남 평양 징역 2년 -
나인협 1872~1951 평남 성천 -
홍기조   1865~1938 평남 남포 -
박준승   1866~1927 전북 임실 -
양한묵   1862~1919 전남 해남 - 재판 중 사망
권병덕 1867~1944 충북 청주 징역 2년 -
김완규 1876~1949 한성 천도교 전제관장 -
나용환   1864~1936 평남 성천 천도교 도사 천도교 교역
이종훈[5] 1856~1931 경기 광주 천도교 장로 천도교 교역
홍병기 1869~1949 경기 여주 고려혁명당 관련 징역 2년형
이종일 1858~1925 충남 태안 천도교 월보과장 (보성사 사장) 징역 3년 제2의 독립선언문 작성
최린   1878~1958 함남 함흥 보성고보 교장 변절 - -
불교 한용운 1879~1944 충남 홍성 신흥사 승려 신간회, 사회계몽 대한민국(1) 1962
백용성 1864~1940 전북 장수 해인사 승려 징역 1년 6월 임정 지원 대통령(2)
개신교 이승훈   1864~1930 평북 정주 장로교 장로 징역 3년 오산학교 운영 대한민국(1)
박희도[6] 1889~1952 황해 해주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북감리교)
징역 2년 변절 - -
이갑성[6] 1889~1981 경북 대구 세브란스의전부설병원
사무원 (장로교)
징역 2년 6월 임정,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7개월 복역
대통령(2) 1962
오화영 1880~1960 황해 평산 남감리교 목사 광주학생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옥고, 해방 후 재북
1989
최성모 1874~1937 황해 해주 북감리교 목사 징역 2년 목회활동 1962
이필주 1869~1942 한성 정동교회 목사 (북감리교) 목회활동
김창준[6] 1889~1959 평남 강서 북감리교 전도사 징역 2년 6월 목회, 신학 공부, 한국전쟁 중 월북 - -
신석구 1875~1950 충북 청주 남감리교 목사 징역 2년 목회활동 대통령(2) 1963
박동완 1885~1941 경기 포천 기독교신보사 서기
(북감리교)
신간회, 목회활동 1962
신홍식 1872~1939 충북 청주 북감리교 목사 목회활동
양전백 1869~1933 평북 선천 장로교 목사 -
이명룡 1872~1956 평북 철산 장로교 장로 -
길선주[7]   1869~1935 평남 안주 장로교 목사 무죄
(구금 1년7월)
목회활동 독립(3) 2009
유여대[7] 1878~1937 평북 의주 징역 2년 목회활동 대통령(2) 1962
김병조[7] 1877~1948 평북 정주 - 상해로 망명, 임정 활동 1990
정춘수[7] 1873~1953 충북 청주 남감리교 목사 징역 1년 6월 변절 - -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 박희도, 정춘수는 변절하여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평가 편집

  • 3.1만세운동을 이끌어내고 표현하게 된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 되었다.
  • 3.1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의 근거로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을 잇는 대한민국 정부에 그 정신이 계승된다.
  • 일제의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 사회 전반이 친일 변질 상황에서 독립선언서 작성 및 배포 등 3.1운동 전반에 종교계가 앞장선 결과, 민족대표 33인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라는 한계가 있다.
  • 이들 33인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 행위로 변절하였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이 가운데~ :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199~210쪽쪽. ISBN 89-7474-870-3. 
  2. 종래에는 정오(낮 12시)로 알려져 왔다.
  3.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171~173쪽, 서문당, 박은식
  4. 1년 7월을 구금되어 옥중에 있다가 무죄로 방면되었음.
  5. 이종훈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연장자로 당시 66세였다.
  6. 민족대표 33인 중 박희도, 이갑성, 김창준은 만30세로 최연소자였다.
  7. 기독교계의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1919년 3월 1일 약속 장소인 태화관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