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박정희 정부는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세워 정권을 잡은 후 1979년 10·26 사건으로 사망할 때까지의 정부를 말한다.
박정희는 1962년 3월 24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윤보선 대통령의 사퇴로 제2공화국의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으며,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63년 12월 17일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1]
개요 편집
구정치인의 활동 금지, 부패한 공직자의 처벌 등을 명분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반란을 통해 등장한 '박정희'는 국가 안정 보장이명분인 중앙정보부와 경제 성장이 명분이나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장악한 군정의 최고 통치 의결 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세웠다. 그는 이 과정에서 헌법의 제3차 개헌에 따라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국회를 단원제 국회로 변경하였으며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을 하였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은 비밀 회담을 통하여 일본 외무 장관 오히라와 만나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였고 일본의 경제적 요구 사항을 수락하고 무상으로 3억 달러, 정부 차관으로 2억 달러, 상업 차관으로 1억 달러를 제공할 것을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일 회담 반대 시위가 발생하였으나 박정희 정부의 계엄령 선포에 의해 시위가 진압되었고 한일 협정이 체결되었다.
박정희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순적인 반공을 국시로 하면서 정치적 반대자나 정권에 위협이 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반혁명 반국가행위자로 몰아 제거하였으며산업화를 내세우며 경제규모의 확대 및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촉진시키는 방법으로 1960년대 경제성장을 급속히 추진하였다.
브라운 각서를 통하여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은 박정희 정부는 자유 세계 수호를 내세워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고 북한의 도발을 명목으로 대통령 3회 연임을 허용하는 3선 개헌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곧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국회를 해산한 후 비상 국무 회의에서 유신 헌법을 의결하였고 이것을 명목상의 국민 투표 확정하였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는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유신 헌법의 결과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임기 6년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가 확립되었고 대통령 중임 제한 조항이 삭제되어 영구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통령에게는 긴급 조치권과 국회 해산권, 국회 의원 3분의 1 추천권이 부여되었다. 이로써 삼권 분립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에 따라서 대학생들은 유신 철폐 시위를 하였으나 박정희는 긴급 조치권을 발동하여 반대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인민 혁명당 사건을 터뜨려서 관련자 8명을 바로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인하여 희생된 노동자와 농민들은 불만을 가졌고 경제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의 문제가 ‘전태일 분신’으로 상징적으로 표출되었으나 그럼에도 박정희 정부가 이를 무시하자 학생들의 정권 비판이 강력하게 전개되었으며[2], 사법파동(1971. 7. 28.) 광주대단지 사건(1971. 8. 10.) 등 각계각층이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야당에 대한 지지가 크게 증가하자 정부는 데모를 진압하기 위하여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키고, 무기한 휴교조치와 더불어 대학생들에 대한 제적처분을 내렸다. YH 무역 사건에 항의하던 김영삼이 국회 의원직에서 제명되자 부마 민주 항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이 당시 구군부를 지지하면서 군사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은 무력 진압과 비상계엄에 찬성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됨에 따라 유신 체제는 붕괴하게 되었다.
경제 편집
제1,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수출 주도형 성장을 통하여 경공업 육성, 노동 집약적 산업, 베트남 전쟁의 군인 수출로 고도성장을 실현하였으며 경부 고속 도로를 개통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외채 상환 시기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제3,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였고 자본 집약적 산업을 발달시켰다. 1970년대 정책금융이 중화학공업에 투자되며 경공업은 생산 부족 현상을 겪었고, 농촌사회는 점차 붕괴했다.[3] 중화학공업에 집중된 투자는 다른 분야의 불균형을 야기하여 공업 분야의 고강도 노동도 증가했다.[3]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달성하였으며 제1차 석유 파동은 중동 건설 진출로 극복하기도 했으나 제2차 석유 파동에서는 중화학 공업 중심 경제가 악화되었고 이는 곧 국민들의 불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농민들의 문제로 결론낸 통일벼 냉해 편집
1972년 10월에 국회에서는 통일벼 재배의 실패에 관한 국정 감사가 열렸다.[4] 정부는 통일벼의 여러 단점에도 1972년의 통일벼 재배 면적을 18만 7471㏊로 대폭 늘렸었다.[4] 그런데 여름의 예년보다 상당히 낮은 기온 때문에 통일벼는 냉해를 입은 것이다.[4] 또, 냉해로 이삭이 제대로 패지 않아 이삭이 여물기를 기다리느라 추수가 늦어지는 바람에 서리와 우박 피해까지 통일벼는 고스란히 입었다.[4]
재배 실패와 관련한 농촌진흥청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통일벼 재배 면적 확대는 벽에 부딪치고, 학계에서 반대 목소리는 날로 높아져, 통일벼를 개발한 농학자들조차도 확대 보급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다.[4] 정부 안에서도 통일벼의 입지는 한층 좁아지고, 지역의 반대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농림부는 1972년 말에 ‘품종 선택은 농민의 자유 의사에 맡긴다.’는 방침을 확인하고, 특정 품종을 농민에게 권장하면 문책한다고 정한다.[4]
농촌진흥청은 수확 감소 사태는 통일벼 종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재배 농민이 통일벼의 특성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탓이라며 반론을 폈고, 이후 농민들은 농한기마다 불려 나가 각종 교육을 받아야 하게 된다.[4] 기술의 생산자(농촌진흥청)가 기술을 보완하여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소비자(농민)가 부족한 기술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보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통일벼 보급에 관한 정부의 일관된 태도였던 셈이다.[4]
사회 편집
사회와 고립된 입지의 천주교 복지단체 설립 편집
1976년 충청북도 음성군에 천주교의 사회복지단체 꽃동네가 설립된다.[5] 현재는 국내에서 사회 복지 시설 중에 가장 방대한 시설과 규모로 극빈자들과 장애인들에게 생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5] 그런데 장애인 단체에서 자립적 생활 및 지역사회의 동참을 규정하는 유엔이 제정한 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6]
국제법을 위반한 부랑아 수용 민사작전 편집
부랑아 대책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7] 그런데 사업을 시작할때 해당 인원의 동원과 이송이 장면 정부 시기에는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 모집 형식이었다면, 5・16군사정부에서는 서울시가 ‘수집’을 하는 차이점이 있었다.[7] 또한 자료상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5・16군사정부의 그 방식은 강제적인 단속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농지조성을 목표로 한 자활정착사업장에서는 강도 높은 노동이 이루어졌다.[7]
국제형사재판소(ICC) 로마규정에 따르면 자활정착사업에서 고아, 부랑인 및 한센병 완치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을 시킨 행위는 불법한 감금 또는 신체적 자유의 박탈에 해당한다.[7] 정부의 이 자활정착사업은 보건사회부가 관할하고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지만, 정부 지원이나 미국 원조물자를 취급하는 것이어서 단체나 개인은 정부와 자연스럽게 유착하거나 또는 물자를 횡령하는 등의 비리가 있었다.[7]
이미 사건이 50여년은 지났음에도 1960년대 자활정착사업장의 현황은 공식적으로 아직 정리된 바가 없는 실정이어서, 정부는 이에 대해 그 필요성을 인지하고 시급히 조사에 나서야 한다.[7] 이 정부 관할 사업장들이 전국에 흩어져 분포하고 있으므로 종합적인 파악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이 필요하지만, 현재의 자료로는 신문 등 보도나 국가기록원 공개 문서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사업장이 있었던 현지에서 자료 확보가 필요하다.[7]
무속신앙을 대상으로 종교박해 편집
교육 편집
박정희 정부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를 마련하였고 고교 평준화 제도를 시행했다.
문화 편집
한강개발 3개년계획 편집
한강의 종합적인 이용 계획에 의하여 공유 수면 매립 사업이 추진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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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스커트 노출 단속 편집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미국에서 귀국하면서부터 유행되었다.[10] 점점 짧아져서 1971년에는 무릎 위 17㎝ 이상 올라가는 미니스커트는 과도 노출로 단속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10]
시민회관을 세종문화회관으로 개칭 편집
화재로 다시 건설중이던 서울시 시민회관을 1978년 2월 세종문화회관으로 개칭하고 4월에 개관한다.[11] 세종문화회관은 1988년 ‘예술의 전당’이 건립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의 전당으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다.[11]
불국사의 국가주도 첫 대형 복원 사업 편집
지금의 통일신라 불국사는 대부분 고증되지 않은 1970년대 근현대 건축의 산물이다.[12] 구품연지(九品蓮池)는 공간 부족을 이유로 발굴하지 않고, 회랑을 만들어 석가탑, 다보탑의 시야를 가린다.[13]
고구려 군사 유적의 파괴 편집
1977년 서울시 광진구 태봉이라고 불리는 구릉의 정상부에 구의동 고구려 보루 유적이 발굴조사된다.[14] 그렇게 화양지구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조사되었는데, 지금은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15] 그 태봉이라는 구릉이 구의동 한양아파트 24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16] 역사 유적을 70년대 개발의 미명 아래 마구 파괴시킨 과거사이다.[16]
참고로, 잠실 대교 북단에 위치한 또다른 구의동 유적은 1976년에 발굴되었는데, 발굴 조사 당시에도 군사 시설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백제 고분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던 유적이다.[17]
컬러 텔레비전 방송 계획 유보 편집
1970년대 후반에는 세계 주요 방송사 중 우리나라만 흑백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가전 업계에서는 이미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해 수출까지 하고 있던 시점이어서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더 이상 미루기는 어려웠다.[18] 하지만 신군부 집권 시기 1981년 1월 1일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게 된다.[18]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1970년대 초부터 여러 차례 계획이 제출되었지만, 기자재 수입으로 인한 무역 역조를 우려한 상공부의 반대, 컬러텔레비전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언론의 논조,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 때마침 불어 닥친 제2차 유류 파동 등으로 인해 도입이 번번이 유보되었기 때문이다.[18] 북한은 남한보다 앞서 1974년에 국내 컬러TV 방송을 시작한다.[19]
외교 편집
1972년 10월 통일벼 냉해 관련 국회 국정 감사 시기에 이웃 나라 한국의 식량 사정 불안을 걱정한 일본에서도 외교관을 통해 정부의 통일벼 재배 확대에 우려의 의견을 전달해 온다.[4]
국방 편집
보훈단체 광복회 설립 편집
1965년 2월 27일 사단법인 광복회가 설립되고[20] 1973년 국회에서 《원호대상자단체설립에관한법률》으로 개정에 의해 원호처 소관이 된다. 수훈애국지사(受勳愛國志士)와 그 유족 중 연금을 받고 있는 사람을 광복회의 회원으로 하였다.[20]
임진왜란 한산대첩기념비 건립 편집
1979년 한산대첩기념비 제작을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하고[21] 기념비는 완공했으나 대통령 서거로 제막식을 치르지 못한다.[22] 한산대첩기념비는 이충무공의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23] 이 제막식은 34년만에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8월 한산도에서 열린다.[22]
공안탄압 편집
각종 정치규제법으로 검거된 인원 편집
국가보안법 | 반공법 | 정치활동정화법 | 사회안전법 | 집시법 | 비상사태 특별조치법[24] | 국가보위 특별조치법[25] | 긴급조치9호 | 합계 | |
---|---|---|---|---|---|---|---|---|---|
1961년 | 296 | 1 | 297 | ||||||
1962년 | 3038 | 3038 | |||||||
1963년 | 102 | 86 | 239 | 427 | |||||
1964년 | 29 | 79 | 18 | 126 | |||||
1965년 | 37 | 84 | 98 | 3 | 222 | ||||
1966년 | 44 | 104 | 7 | 2 | 157 | ||||
1967년 | 44 | 110 | 4 | 6 | 164 | ||||
1968년 | 83 | 168 | 37 | 1 | 289 | ||||
1969년 | 81 | 323 | 27 | 1 | 432 | ||||
1970년 | 204 | 368 | 25 | 597 | |||||
1971년 | 217 | 276 | 49 | 543 | |||||
1972년 | 175 | 507 | 24 | 1 | 706 | ||||
1973년 | 164 | 260 | 37 | 461 | |||||
1974년 | 152 | 228 | 7 | 87 | |||||
1975년 | 74 | 328 | 5 | 13 | 420 | ||||
1976년 | 121 | 386 | 9 | 29 | 198 | 738 | |||
1977년 | 35 | 322 | 1 | 157 | 515 | ||||
1978년 | 30 | 208 | 3 | 6 | 11 | 215 | 473 | ||
1979년 | 57 | 199 | 1 | 2 | 160 | 414 | |||
1980년 | 23 | 136 | 811 | 3 | 4 | 1 | 978 | ||
합계 | 1968 | 4167 | 3849 | 19 | 625 | 15 | 15 | 726 | 11384 |
제1심 형사공판 사건 접수(기소인원) 편집
반공법 제4조 찬양,고무 1,2심 재판결과 편집
실형 | 집행유예 | 선고유예 | 면서,형면제 | 가정법원 송치 | 무죄 | 합계 | |
---|---|---|---|---|---|---|---|
1심인원 | 67 | 86 | 3 | - | 2 | 2 | 160 |
2심인원 | 26 | 47 | 2 | - | - | - | 75 |
항소후집계 | 53 | 100 | 3 | - | 2 | 2 | 160 |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 국가인권위원회
- ↑ 김민배,「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역사비평』(1995. 가을호), 역사문제연구소, 1995. 8. 89쪽.
- ↑ 가 나 “한국사 연대기 > 현대 >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 >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다”.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12월 30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3장 한국인이 배우고 개발한 과학 기술 > 1. 녹색 혁명, 그 빛과 그림자 > 기적의 쌀, 한국의 추위에 쓰러지다”.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3월 5일에 확인함.
- ↑ 가 나 “사랑의 공동체, 음성 꽃동네”. 《디지털음성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10일에 확인함.
- ↑ “꽃동네 26년 거주자 “교황님 저를 밟고 꽃동네에 가세요””. 미디어오늘. 2014년 8월 7일.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과거사 청산을 위한 국가폭력 연구: 노역동원을 중심으로(I) - 1960년대 초법적 보안처분과 국토건설사업”. 연구보고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2020년 1월 31일.
- ↑ “미신 타파 운동”. 《디지털제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15일에 확인함.
- ↑ “한강개발3개년계획”. 《디지털강남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3일에 확인함.
- ↑ 가 나 “미니스커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4일에 확인함.
- ↑ 가 나 “세종문화회관”.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2024년 3월 4일에 확인함.
- ↑ “불국사는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 낸 '상상력의 산물'”. 플러스코리아타임즈. 2013년 1월 1일.
- ↑ “불국토로 가는 길목인 ‘구품연지’ 복원 외면…박정희 정권의 어이없는 문화정책”. 경향신문. 2023년 2월 17일.
- ↑ “서울 구의동 `고구려 보루 유적`에 담긴 비밀”. 매일경제. 2018년 4월 19일.
- ↑ “서울 구의동 유적 (서울 九宜洞 遺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3일에 확인함.
- ↑ 가 나 “[한국사 미스터리](33) ‘개발’미명에 파괴된 구의동유적”. 경향신문. 2004년 2월 9일.
- ↑ “아차산 고구려 유적 발굴의 뒷이야기”. 《디지털구리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3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한국문화사 > 04권 근현대 과학 기술과 삶의 변화 > 제4장 과학 기술과 일상 생활의 변화 > 2.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확장 >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등장과 변모 > 텔레비전 방송”.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4년 3월 9일에 확인함.
- ↑ “통일에 대비한 방송체계연구(1단계)”. 보고서(ALIO). 한국콘텐츠진흥원. 2010년 4월 30일.
- ↑ 가 나 “광복회 (光復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3월 16일에 확인함.
- ↑ “지화자 통영, 한산대첩제 개막”. KBS. 2013년 8월 14일.
- ↑ 가 나 “한산대첩기념비 제막식”. 통영시의회. 2013년 8월 19일.
- ↑ “한산대첩기념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4년 3월 7일에 확인함.
- ↑ 비상사태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 ↑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