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기》(百濟記)는 백제의 사서이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인 《일본서기》(일본어: 日本書紀/にほんしょき)에 나와 있는 백제삼서 중의 하나이며, 가장 이른 시기에 인용되어 있는 책이다. 《일본서기》신공기(神功紀)와 응신기(應神紀)에 걸쳐서 출전을 일일이 밝히지 않은 경우에도 이 《백제기》를 인용했거나 《백제기》를 기초자료로 이용하여 작성한 내용이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1]

《백제기》의 내용과 성격 편집

《일본서기》 안에서 《백제기》가 직접적으로 인용된 부분은 신공기 62년조[2], 응신기 8년 봄3월조[3]와 25년조[4], 웅략기(雄略紀) 20년조[5]이다.[6] 《백제기》의 내용상 성격은 백제와 왜의 통교라는 역사 사실과 함께, 백제의 장수이자 귀족이었던 목라근자(木羅斤資)와 목만치(木滿致) 부자의 활동을 중심으로 백제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신공기 49년(369) 목라근자와 사사노궤 등이 이끄는 병력이 가야 7국과 전라도 지역을 평정하였다는 기록도 원래는 《백제기》에 수록된 내용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백제기》가 마지막으로 인용된 웅략기 20년(475) 기사도 백제의 수도 한성 함락, 즉 목만치(목례만치)가 문주왕을 따라 남쪽으로 간 시점이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자체는 백제 8성씨의 하나인 목(木)씨의 집안 전승 즉 가전(家傳)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백제가 아닌 일본열도에서 성립된 것이지만[7] 가야 왕족들의 백제 망명, 목만치와 구이신왕의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추문 같은,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 원전은 백제에서 성립된 원사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8]

용어사용 편집

《백제기》의 전반적인 내용은 백제를 마치 왜에 종속된 신하국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응신기 8년 봄3월조에 인용된 《백제기》에서 '선왕의 우호를 닦았다'고 한 것은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삼국과 왜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도 공통되는 점이다. 관련기사들 속에서 추출한 인명과 지명은, 한반도의 인명지명이 결여되어 있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기사와는 확연히 구별되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그것과도 상당한 정합성을 보이고 있다.[9] 또한 대성(大城)이나 대후(大后) 같은, 한국의 다른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용어가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일본을 지칭한 용어 편집

일본 즉 왜국과 그 왕을 가리켜 《백제기》는 귀국(貴國)ㆍ대왜(大倭) 내지는 '천황(天皇)'이라고 부르고 있는데,[10] '귀국'이라는 용어는 《백제기》안에서만 보이는 용어이며, 일본을 지칭하는 2인칭의 용어로 보든 '귀한 나라' 내지는 '존엄한 나라'라는 뜻으로 읽든 간에 원래 백제에서 쓰이던 용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밖에 왜 조정을 국한해서 지칭하는 용어로 천조(天朝)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있으나 모두 《일본서기》편찬단계에서 원문이 개서된 것으로 여겨진다.[11]

백제에 대한 호칭 편집

백제인들이 편찬한 역사책을 원전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안에 인용된 《백제기》의 기록 가운데에서도 백제가 주체로 되어 있는 기록(응신기 8년ㆍ25년조, 웅략기 20년조)과 함께 제3자로 취급된 기록(신공기 62년조)가 양립하고 있다. 하지만 신공기 62년조를 제외하면 대개는 '이에 우리(我)의 침미다례를 빼앗았다[故奪我沈彌多禮]'[12]거나, 목만치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우리 나라(我國)로 들어와서[來入我國]', '우리 나라(我國)의 국정을 잡았다[執我國政]'[13]라고 적는 등 대체로 백제가 주체가 된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기년 표기 편집

《일본서기》웅략기 20년조에 인용된 《백제기》는 '개로왕 을묘년 겨울' 즉 왕의 이름과 간지, 계절로 기년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에서도 많이 보이는 기년표기 방법이지만, 왕의 재위년수로 기년을 표기한 《삼국사기》와는 원칙적으로 다른 기년법이며 《일본서기》의 원칙과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매지권』이나 『사택지적비』같은 백제 금석문을 비롯해 신라와 일본의 고대 금석문에서도 간지로 기년을 밝힌 사례가 적지 않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의 그것과 같은, '○○왕 ○○년' 혹은 '□□ ○년' 하는 식으로, 연호 내지는 국왕의 재위년수로 기년을 표기하는 방법은 간지로만 기년을 밝히는 방법보다 새로운 것이며, 기존의 간지만 써서 기년을 표기하는 전통방식과 결합된 과도기적 단계의 기년표기법이 바로 《백제기》에서 왕의 이름과 간지를 함께 사용해 적은, 기년표기방식으로 추정되며, 기록대상이 된 시점에서 멀지 않은 시기의 원본 《백제기》가 《일본서기》인용 《백제기》의 모본으로서 존재했음도 알 수 있다.[14]

참고 문헌 편집

  •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12권, '백제의 문화와 생활'

관련항목 편집

각주 편집

  1.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12권 '백제의 문화와 생활' p317.
  2. 六十二年, 新羅不朝. 卽年遣襲津彦擊新羅.【百濟記云 『壬午年, 新羅不奉貴國. 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 新羅人莊飾美女二人, 迎誘於津. 沙至比跪受其美女, 反伐加羅國. 加羅國王己本旱岐ㆍ及兒百久至ㆍ阿首至ㆍ國沙利ㆍ伊羅麻酒ㆍ爾汶至等, 將其人民, 來奔百濟. 百濟厚遇之. 加羅國王妹旣殿至, 向大倭啓云 "天皇遣沙至比跪, 以討新羅. 而繩新羅美女捨而不討, 反滅我國. 兄弟人民皆爲流沈, 不任憂思. 故以來啓." 天皇大怒, 旣遣木羅斤資, 領兵衆來集加羅, 復其社稷.』】
  3. 八年春三月, 百濟人來朝.【百濟記云 『阿花王立旡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及峴南ㆍ支侵ㆍ谷那ㆍ東韓之地. 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4. 廿五年, 百濟直支王薨. 卽子久爾辛立爲王. 王年幼, 大倭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婬,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討新羅時, 娶其國婦而所生也. 以其父功專於任那, 來入我國往還貴國. 承制天朝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皇聞其暴召之.』】〉
  5. 廿年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爰有少許遺衆, 聚居倉下. 兵粮旣盡, 憂泣茲深. 於是, 高麗諸將言於王曰 "百濟心許非常. 臣每見之, 不覺自失. 恐更蔓生. 請遂除之." 王曰 "不可矣. 寡人聞, 百濟國者, 爲日本國之官家, 所由來遠久矣. 又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 遂止之.【百濟記云 『盖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 國王及大后王子等, 皆沒敵手.』】
  6. 이밖에 신공기 47년 여름4월조와 49년 봄3월조도 직접적으로 《백제기》와의 관련여부를 수록하지는 않았지만 위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백제기》를 기초자료로 이용해 작성한 내용으로 여겨진다.
  7.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12권, '백제의 문화와 생활' p.320
  8. 웅략기 20년조에 인용된 《백제기》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즉 '이리' 같은 짐승으로 부르고 있는 데에서, 왕성을 함락시키고 국왕 일족을 시해한 고구려에 대한 적의를 느낄 수 있는데, 백제가 고구려에 대해서 강한 적의를 느끼고 있었던 시기가 늦어도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공격 때(612) 백제가 은밀하게 고구려를 도왔던 시점 이전이라는 것을 들어, 원본《백제기》의 최초 성립을 7세기 초 이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 왕의 휘를 기록할 때에도 《삼국사기》원문과 일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화(阿花)ㆍ직지(直支)ㆍ귀수(貴須)처럼 《삼국사기》의 주와 동일 내지는 유사한 경우가 적지 않다.
  10. 천황이라는 용어는 7세기 말 덴무(天武) 천황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라는 지적이 있다.
  11.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12권, '백제의 문화와 생활' p.334~335
  12. 《일본서기》권제10, 응신기 8년 봄3월조
  13. 《일본서기》 권제10, 응신기 25년조
  14.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제12권, '백제의 문화와 생활' p.332~p.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