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
보시라이(중국어 간체자: 薄熙来, 정체자: 薄熙來, 병음: Bó Xīlái, 한자음: 박희래, 1949년 7월 3일 ~ )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정치인이자, 베이징대학교의 전 정치지도자로, 제17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었으며, 충칭시 당위원회 당서기였다. 보시라이는 중국 공산당 혁명 원로 중 하나인 보이보(중국어 정체자: 薄一波)의 아들이다.
보시라이 薄熙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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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Bó Xīlái |
출생 | 1949년 7월 3일 |
성별 | 남성 |
국적 | 중화인민공화국 |
경력 | 전 정치인이자, 베이징대학교의 전 정치지도자, 제17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충칭시 당위원회 당서기 |
직업 | 정치인 |
소속 | 중국공산당 |
이력
편집문화 대혁명 시기에 그는 홍위병(중국어 정체자: 紅衛兵) 조직의 연동(중국어 정체자: 連動)의 주동 멤버로서 "뿌리가 붉으면 붉은 싹이 나온다"라고 하는 계급적 혈통론을 강조하였다.
1979년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였고, 1982년에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국제뉴스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연구실 간부로 있다가, 랴오닝성에 전출하여 금현(중국어 정체자: 金縣)현 부서기를 거쳐 1992년부터 다롄 시장을 맡았다. 2001년 중국 공산당 랴오닝성의 성장, 2004년 상무부 부장이 되었다.
보시라이는 2007년 충칭시 공산당 서기가 된 이후, 지방 정부의 중앙 정부 정책 간여와 반(反)덩샤오핑 군중노선, 정통 공산주의적 이미지가 강조되는 '충칭 모델'을 기획하였으며 충칭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보시라이는 충칭시 중국 공산당 당서기 재임 중(2007년 - 2011년)에 4년간, 과거 마오쩌둥주의와 대약진 운동(중국어 정체자: 大躍進) 등으로부터 지속된 공산주의 혁명 가요곡(革命歌謡曲)을 노래하자는 캠페인을 실시하였고, 개혁‧개방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일어난 시대로 생각하게 하는 풍조를 만들었고, 중일전쟁 시기의 수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충칭시가 서홍시(西紅市, 서쪽의 붉은 도시라는 뜻)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것이 이후의 창홍타흑(중국어 정체자: 唱紅打黑)의 전주곡이었다.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로 재직 시 2008년 7월부터 충칭 간부의 부정부패 적발과 조직폭력 범죄자 처형이라는 실적 공개에 앞장 서고, 1,500명 이상을 적발하였다. 2010년 3월, 붉은색 가요로 충칭의 TV 방송 채널을 광고 없이 모두 채우고 부패조직 소탕을 수단으로 기세를 올리며 군중을 모아간 보시라이의 제1차 캠페인 「창홍타흑(중국어 정체자: 唱紅打黑)」이 종료되었다. 보시라이는 대외적으로 성과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다」, 「군중노선으로 권력을 노리려 했던 것에 불과하다」 등 다른 중국인들은 「창홍타흑(중국어 정체자: 唱紅打黑)」 등의 진의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몰락
편집헤이우드 사건
편집2011년 11월, 충칭시 소재의 한 호텔에서 닐 헤이우드(Neil Heywood)가 원인 불명으로 사망하였다. 초기에 중국 당국은 사인이 급성 알코올 중독이었다고 밝혔지만, 후에 관계자의 증언이 나왔는데 헤이우드가 평소에 술을 안 마시는 금주가였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타살 의혹이 일어났다. 닐 헤이우드는 보시라이 일가와 오래전부터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고, 영국 정부는 중국 정부에 사건의 전말을 요청하였다. 2012년 4월 10일 중국 언론은 닐 헤이우드가 타살당했으며,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중국어 정체자: 谷開來)가 관련되었고, 사법 당국이 물증의 일부를 확보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고, 보시라이 부부의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불법 자금 수뢰 및 불법 자금의 해외 송금 의혹을 조사하였다.
왕리쥔 사건
편집닐 헤이우드 변사 사건에 관련, 충칭시 공안 당국에서 수사를 지휘하였고, 변사 사건에 관하여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가 관여되었다는 정보를 확보하였다. 그 후, 공안국장 왕리쥔(중국어 정체자: 王立軍)은 보시라이 측으로부터 수사 중단의 압력을 받았고, 그러한 일련의 일로 왕리쥔이 미국 총영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하였다.(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왕리쥔의 망명 신청을 거부하였다.) 이로부터, 왕리쥔 사건으로 발전하였고, 보시라이에 관한 사건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보시라이의 해임
편집2012년 2월 보시라이의 측근이었던 왕리쥔 전 공안국장이 경질되어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자신이 조사를 받을 것이 염려되어, 같은 해 3월 8일, 보시라이는 전국인민대표대회《형사소송법 법수정안(초안)》의 심의를 할 때 불참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낳았다.
3월 14일 전국인민 대표회의 폐막 후에 원자바오 총리는 기자 회견에서, 보시라이가 일으킨 창홍타흑(唱紅打黑) 운동 등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에 비유하여 비판하였고, 다음 날인 3월 15일,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 직에서 해임되어 당국의 조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결과
편집2012년 9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전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의 공직과 당적 박탈 및 사법처리를 결정하였다. 2012년 10월 26일, 전국인민대표회의(대한민국의 '국회'에 해당) 상무위원회가 보시라이의 전인대 대표자격을 박탈했다. 2013년 9월 22일, 중급인민법원은 보시라이에게 1심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2013년 10월 25일, 산둥성 고급인민법원은 보시라이에게 2심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이로서 보시라이에 대한 사법 절차가 완료되었다.
경력
편집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보시라이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신화통신의 이력 소개
전임 张国光 |
랴오닝성 성장 2001년 2월 ~ 2004년 2월 |
후임 장원웨 |
전임 뤼푸위엔 |
중화인민공화국 상무부 부장 2004년 2월 ~ 2007년 12월 |
후임 천더밍 |
전임 왕양 |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 2007년 ~ 2012년 |
후임 장더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