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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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釜山鎭城)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든 (城)이다. 넓이는 24,198m2이고,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부산진성
(釜山鎭城)
대한민국 부산광역시기념물
부산진성 전경(금루관)
종목기념물 제7호
(1972년 6월 26일 지정)
면적24,198m2
시대조선
위치
주소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 (범일동)
좌표북위 35° 8′ 9″ 동경 129° 3′ 38″ / 북위 35.13583° 동경 129.06056°  / 35.13583; 129.06056좌표: 북위 35° 8′ 9″ 동경 129° 3′ 38″ / 북위 35.13583° 동경 129.06056°  / 35.13583; 129.06056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본래 부산진성의 외성(外城)이었던 것을 일본군(日本軍)이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일본식으로 새로 쌓은 왜성(倭城)이기도 하다.[1][2]

유래편집

자성대의 유래는 부산진성을 본성 또는 모성(母城)이라는데 대해 자성대의 성을 지성 또는 자성(子城)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또 정상에 자성을 만들어 장대(將臺)로 삼았다고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3][4]

현지 안내문편집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부산진성은 흔히 자성대(子城臺)라고 부르는 곳으로, 원래는 부산성의 한 부분이다.[5]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부산성을 헐고 일본식으로 다시 쌓은 석성이다. 소서성·환산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왜군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 장군 만세덕이 머물러 만공대라고도 했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성을 다시 고쳐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숙소로 사용되었다.[5]

성벽의 높이는 1.5∼10m이며,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4개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객사, 동헌 등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창고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바닷물이 성 밑에까지 닿았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의 성이 철거되고 시가지 확장을 위한 매립공사로 인해,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1974년에 동문·서문·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금루관, 자성대위의 장대는 진남대라고 하였다.[5]

부산진성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2단의 일본식 성벽과 명나라 장군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와 최영장군비각이 보존되어 있다.[5]

한국문물연구원 해설편집

부산 자성대 역사관 건립부지에 대한 구제발굴 결과 왜성이 2차례에 걸쳐 축조된 것이 확인되었고 입회조사에서 부산진성의 체성으로 추정된 석축과 토축은 왜성인 것으로 확인되었다.[5]

1차왜성은 1953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등성시설과 같은 왜성시설물이 확인되어 한일성곽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사료된다.[5] 2차 왜성은 자성대왜성의 외곽을 둘러싼 삼지환의 체성으로 확인되었다.[5]

역사편집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의 전투 장면을 자세하게 그려 놓은 「부산진성 순절도」에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부산포(釜山浦)에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었다. 내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甑山)을 둘러싼 본성이고, 현재 정공단이 있는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甑山)을 둘러싸고 있던 성이고, 자성대는 그 외성(外城)으로 쌓은 것인데, 외성은 현재 자성대라고 부르는 곳이다. 임진왜란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선조 26년에 왜장 모리(毛利輝元) 부자가 부산성을 헐고 왜성(倭城)으로 다시 쌓았다. 소서성·환산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일본에서는 당시 부산진성이 부산왜성 이였을 당시 마루야마 성(丸山城)[6], 고니시성(少西城)[7] 이라고 불렀다. 현재 부산진성은 일본명의 '마루야마 성' 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일본군을 몰아낸 뒤에는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 군대가 머물러 주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공대(萬公臺)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성과 사대문을 쌓고 관아를 고쳐 부산진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숙소로 쓰였다.

이 성은 오늘날의 증산에 있었던 부산진성의 내성인 본성과 함께 1593년(선조 26) 경상도 군정의 책임자였던 모리 히데모토(毛利輝元) 부자(父子)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왜장 아사노 나가요시(淺野長慶)가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에 수축 또는 증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증산에 있었던 본래의 부산진성이 일본군에 의해 허물어져 사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1607년(선조 40)부터 부산왜성의 지성인 자성대왜성을 부산진성으로 사용하면서 새롭게 수축하였다. 『충렬사지(忠烈祠志)』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산 첨사진으로 사용하던 성 안의 우뚝 솟은 산 정상에 다시 자성을 쌓고 장대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부산진성을 수축할 때 부산진성의 장대로 사용하였다고 보인다. 또 본성인 부산일본성(부산왜성)을 모성으로 보면, 지성으로서 모성에 대한 자성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영남진지(嶺南鎭誌)』에는 임인년에 자성 위에 육우정(六友亭)을 세우고, 승가(勝嘉)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에 자성은 한 진(鎭)의 장대가 되고, 승가정은 자성의 장대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동서의 산을 따라 성벽으로 성곽을 두르고 바닷물을 끌여들여 참호를 20m 너비로 만들어 배가 바로 성벽에 닿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시가지 정비라는 명목으로 성을 철거하고 자성대 일대 해면은 매축되어 옛모습이 없어졌다.[8] 현재 남아있는 성지(城址)는 2단이며, 성벽의 높이는 최고 10 미터에 최저 1.5 미터이다.[9]

복원편집

1974년 7월 8일부터 1975년 2월 25일까지 부산시에서 정화 복원공사를 하여 동문, 서문, 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원래는 진동문(進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자성대 정상부에 장대는 진남대(鎭南臺)라고 각각 이름 붙이고 편액을 달았다. 1975년 9월 동문 주변 성곽을 신축하였으며, 서문의 금루관은 높은 다락으로 좌우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우주석)이 각각 서있다.[10]

이곳은 남쪽 변방에 목구멍 같은 경계이며,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이 중요한 곳이다.
 
—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

영가대편집

 
1748년경 이성린 작품 사로승구도, 앞쪽 바위 위에 영가대와 그 뒤로 부산진성 서문이 보인다.

1614년 광해군 때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성 근처 해안가에 선착장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161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吳允謙)이 이 정자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다음부터 통신사행은 이곳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일본으로 갔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영가대’(永嘉臺)라고 이름지었다. 원래 동구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변에 있었던 영가대는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철거되어 일제강점기 때 일본상인 오이카와(及川民次郞)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졌다가 사라졌는데, 2000년 부산광역시의 역사유적지 표석 설치계획에 따라 동구 좌천동 지하철역 부근의 도로공원에 “부산포왜관·영가대터” 표석을 세웠고, 2003년 9월 25일 동구청에서 자성대에 복원했다.[11]

기타편집

조선시대에는 성 안에 객사, 동헌 등 많은 관공서와 창고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군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와 동쪽 산 중턱에는 남해안 일대를 노략질한 왜구를 소탕한 최영장군 비각이 보존되어 있다.[8]

명칭 변경편집

당초 문화재 지정명칭은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었으나, 2020년 1월 15일 부산진성(釜山鎭城)으로 변경되었다.[12]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https://cafe.naver.com/wakanstudy/464 부산명칭의 유래.식민사관관련 (부산진지성, 부산일본성)
  2. https://drive.google.com/file/d/0BwTcBEcAL7iTVVpVWXhkbGM1TDA/view 부산진왜성.PDF 일본 고시 내용 부산·마산·울산·부산진지성문 왜성 호칭 구포·안골왜성 유적 발굴문 Busanjin Waeseong Dwarf Castle.PDF Contents of Japanese Notice Busan, Masan, Ulsan, Busan Jinji Castle Gate
  3. https://cafe.naver.com/wakanstudy/802 부산일본성 증산왜성 1936년 고적61호등록 (부산진왜성.pdf 내용)
  4. https://cafe.naver.com/wakanstudy/745 부산진지성은 부산성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인조22년) (부산진지성, 부산일본성)
  5. 현지 안내문 인용
  6. 일본성의 모양을 보고서 그렇게 부른 이유. 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1]
  7.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곳에 주둔했기 때문에 고니시성 이라 불렀다.
  8.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 “우리지역문화재”. 문화재청. 2012년 9월 17일에 확인함. 
  9. “문화재현황”. 부산광역시. 2012년 9월 17일에 확인함. 
  10. 동구. “지정문화재”. 부산광역시 동구. 2017년 9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9월 17일에 확인함. 
  11. 동구. “비지정문화재”. 동구 문화관광. 2012년 9월 1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2. 부산광역시 고시 제2020 - 8호,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명칭변경 고시》, 부산광역시장, 2020-01-15,
    • 변경사유:
      • 우리나라 성곽 체계에서 본성(本城)과 지성(支城)을 구분하여 쓰는 용례가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 왜군이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왜성과 자성대왜성을 설치하면서 증산왜성이 본성(本城)으로, 자성대왜성이 지성(支城)으로 설명되었으므로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은 한국의 전통 성곽 시설과 무관한 용어로서 수정이 필요함.
      • 부산진성(釜山鎭城)은 부산성(釜山城), 부산포성(釜山浦城) 등으로도 지칭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방어하기 위하여 진(鎭)을 두었고, 이 진에 첨사(僉使)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으며, 이 진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진성(鎭城)이므로 보편적 개념인 부산진성을 사용함이 적절함.
      • 조선 전기 증산(甑山) 아래 축조했던 부산진성은 왜군들에 의하여 허물어졌고,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 수군이 임진왜란 시 왜군이 축조한 자성대왜성을 수축 또는 증축하여 구한말까지 부산진성(釜山鎭城)으로 사용하였으므로 문화재 명칭도 이런 역사성을 반영하여 부산진성(釜山鎭城)으로 변경하고자 함.
      • 아울러, 위 변경사항과 관련된 부산진지성 서문 성곽우주석의 명칭도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으로 변경하고자 함.
      • 단, 문화재 지정번호, 지정일자 등은 현 지정 내용과 동일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