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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間島, 중국어 간체: 间岛, 병음: Jiāndǎo 젠다오[*])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간도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다.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도 한다.

간도(間島)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이섬(사잇섬)으로, 그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 가운데 '사잇섬'이란 말 뜻에 비추어 '간도'가 본래는 압록강두만강하중도(河中島)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두 강의 북안(北岸)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변형된 것이라 보는 견해와.[1] 두만강해란강 사이의 지역이 섬처럼 강에 둘러싸여서 생겼다는 견해가 있다.[2]

19세기 말, 조선청나라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토문(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이 지역(북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조선정계비의 위치상 '토문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고 주장하였고,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간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목차

역사편집

18세기까지편집

간도(間島)는 고대에는 부여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다. 윤관때 여진족을 평정하고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의 동북 9성을 쌓았다. 현재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 상태다.[3] 공민왕이 한반도 북부를 수복하면서 선춘령을 경계로 공험진까지 진출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 세종대왕 집권기에 압록강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켜 4군6진을 설치했다. 세종대왕은 명나라로부터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이 압록강공험진임을 인정받았다.[4] 세종대왕은 선춘령의 위치는 알지 못하나 백두산 북쪽에 있다고 보았다.[5] 동국여지승람 회령부조에는 공험진이 두만강 건너편 소하강가에 있었다고 명시되어있다. 또한 두만강 남쪽의 경원도호부에 공험진내방어소를 두었다고 기록했다.[6][7] 이는 공험진 본진이 두만강 건너편에 있었고, 공험진에 여진족이 침입했을 때 두만강 남쪽의 경원에 있는 내방어소로 후퇴하여 수비를 한 것으로 이해된다.[8] 1900년대에 선춘령비일 가능성이 있는 비석이 연길 포이합통하 강에 쳐박힌 채로 발견되었다.[9]

조선은 두만강북에 위치한 여진족에게 조선의 관직에 해당하는 벼슬을 주기도 했다. 조선 성종때에는 훈춘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를 논의했다.[10]

1616년누르하치후금을 세운 후 1644년청나라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상당수가 군사들을 따라 이 지역에서 중국 본토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본래 만주족들이 살던 지역이 공동화(空洞化)되자, (淸)은 강희제 집권기인 1677년에 '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백두산·압록강·두만강 이북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封禁地)로 정하고 만주족이 아닌 타민족의 거주와 개간, 삼림 벌채, 인삼 채취 등을 엄금하였다.[11] 1636년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의 위세를 실감한 조선 역시 압록강두만강의 북쪽 연안에 대한 도강(渡江)을 엄금하고 월강죄(越江罪)로 다스렸다.[12]

간도는 두만강과 그 지류인 해란강(海蘭江), 가야하(嘎呀河, 알아하), 훈춘하(琿春河, 혼춘하) 등 여러 물길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한 땅이었으나, 만주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간되지 못했다. 게다가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인해 150년 가까이 이 땅은 청조 통치자들을 위한 수렵지이자 삼(蔘) 등 약재의 채집지로 독점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이었다.

19세기 이후편집

19세기에 들어서 서슬퍼런 봉금령도 부패와 혼란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800년 조선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정조가 사망하면서 세도정치의 전횡과 부패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청나라 역시 건륭제 말년에 화신의 전횡과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4년) 등 거듭되는 반란이 일어나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부터 세도정치의 학정(虐政)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조선의 농민들이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이북으로 건너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나라아편전쟁(1839년 - 1842년 / 1856년 - 1860년)과 태평천국의 난(1851년 - 1864년)으로 혼란에 빠져 월강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조선함경도 지방에서 1869년(기사대흉년), 1870년(경오대흉년) 대흉년이 들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을 건너 단속 자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 봉금령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단속을 피해 간도에서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주민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났다.

1881년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폐지하였고, 1883년에 조선이 '월강금지령'을 폐지한 데 이어 1885년에 청나라가 조선인에 대한 만주 이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조선인의 간도 유입 현상은 더욱 증가하였다.

20세기 초에도 일본 제국의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항일 운동을 위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계속 이주했다. 1932년에 일본 제국은 만주에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간도를 관할하는 젠다오 성(間島省, 간도성)을 설치했다. 간도는 1949년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고, 현재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장백 조선족 자치현 등이 중국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다.

백두산 정계비편집

간도(間島)는 고대에는 부여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았다. 윤관때 여진족을 평정하고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의 동북 9성을 쌓았다. 현재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 상태다.[13] 공민왕이 한반도 북부를 수복하면서 선춘령을 경계로 공험진까지 진출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 세종대왕 집권기에 압록강두만강 남쪽의 여진족을 쫓아내거나 귀화시켜 4군6진을 설치했다. 세종대왕은 명나라로부터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이 압록강공험진임을 인정받았다.[14] 세종대왕은 선춘령의 위치는 알지 못하나 백두산 북쪽에 있다고 보았다.[15] 동국여지승람 회령부조에는 공험진이 두만강 건너편 소하강가에 있었다고 명시되어있다. 또한 두만강 남쪽의 경원도호부에 공험진내방어소를 두었다고 기록했다.[16][17] 이는 공험진 본진이 두만강 건너편에 있었고, 공험진에 여진족이 침입했을 때 두만강 남쪽의 경원에 있는 내방어소로 후퇴하여 수비를 한 것으로 이해된다.[18] 1900년대에 선춘령비일 가능성이 있는 비석이 연길 포이합통하 강에 쳐박힌 채로 발견되었다.[19][20]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穆克登)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는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수원(水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21]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다른 청나라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22] [23] [24] [25]

영유권 분쟁편집

19세기 말의 상황편집

1800년대 초부터 조선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881년에는 연변 지역의 조선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긴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 '봉금령'을 폐지하고 본토 주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간도에 있던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마찰이 생기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양국의 기본적인 국경선두만강이라는 전제하에 도문강(두만강)의 도문(圖們)과 토문(土門)은 모두 만주어에서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취한 것(借字, 차자)이므로 '토문은 곧 두만강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청나라는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의 주장이 엇갈려 모두 결렬되었다.[26]

20세기 이후편집

1903년(광무 7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시에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1903년 10월 - 1905년 5월)하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는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만주 일대를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남진은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후 일본 제국은 한일합방을 추진하였다. 1905년에는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고, 조선은 일본의 중개를 거쳐 조약을 맺는다는 내용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그러나 을사 늑약에는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상의 업무를 감리·지휘하고 조약을 중개할 권한을 가질 뿐 직접 대한제국을 대리하여 체결할 권한을 가진다고는 규정하지 않았다.[27][28] 일본 제국은 1907년 8월 23일, 간도에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내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으나,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이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법적 권한을 인정하고 파출소를 철수하였다.(간도 협약이 체결된 당일,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만주 5안건 협약을 체결하였다.)

서간도의 대규모 이주는 독립운동가 이상룡이 이민 초기의 산에서 화전을 하던 것을 지양하고 넓은 평야지역에서 벼농사를 짓도록 교도한 것에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그는 처음 통화현 대사탄에서 광업사를 철치하여 중국인에서 쓸모없는 황량한 저습지를 조차하여 조선일들로 하여금 울로초 등을 베어내고 수전을 만들어 벼농사를 짓도록 했다. 1914년부터 이 농업방식이 크게 성공하여 조선인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를 개간하여 수전농업이 만주땅에 대규모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20년대 말까지 남북만주의 한인이 개척한 전 농토가 102만구에 이르렀고 90만구가 벼농사를 짓는 수전이었으며 벼생산량은 연 1300만 석에 달하게 되었다. [29]

1962년 10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조중 변계 조약을 체결하여 백두산두만강 상류의 국경선을 명확히 획정하고,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한 영토권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2000년대에는 한국 사회에서 간도 협약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이 100년이기 때문에 2009년 9월에 그 시효가 완성된다는 일방적 주장이 신뢰할 만한 근거 제시 없이 사실인냥 유포되는 소동이 있기도 했다.[30] [31]

한국영토의 다른 분쟁지역편집

더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의 봉금령 위반과 조선의 '월강죄'(현종실록, 현종 2년(1661 신축) 4월 1일 3번째기사 등)는 사형으로 논하는 중죄였다. 그러나, 좁고 척박한 토지와 상습적인 기근에 시달리던 함경도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이섬(間島, 간도)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강건너 비어있는 땅에 가서 도둑 농사(사이섬 농사)를 지었다.(김동석, 《한국 현대소설의 비판적 언술 양상》, 소명출판, 2008년 263쪽 등)
  2. 39. 간도는 어느나라 영토인가
  3. [1] 윤용혁 공주대 교수(고려시대사)는 “정설이 없는 상태다. 두만강 이북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그 전후 고려의 국경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북쪽으로 올라가 있어 의아하다”고 말했다.
  4.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5월 16일
  5. [2]
  6. 先春嶺과 公嶮鎭碑에 대한 新考察 최규성 (「한국사론」 34, 2002), 40p- 41p
  7.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원도호부
  8. 先春嶺과 公嶮鎭碑에 대한 新考察 최규성 (「한국사론」 34, 2002), 40p- 41p
  9. [3]
  10. [4]
  11. 두만강(豆滿江)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2. 유병탁 기자 (2004년 4월 9일). “간도이주 조선 초부터 시작됐다.”. 경향신문. 
  13. [5] 윤용혁 공주대 교수(고려시대사)는 “정설이 없는 상태다. 두만강 이북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그 전후 고려의 국경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북쪽으로 올라가 있어 의아하다”고 말했다.
  14.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5월 16일
  15. [6]
  16. 先春嶺과 公嶮鎭碑에 대한 新考察 최규성 (「한국사론」 34, 2002), 40p- 41p
  17.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원도호부
  18. 先春嶺과 公嶮鎭碑에 대한 新考察 최규성 (「한국사론」 34, 2002), 40p- 41p
  19. [7]
  20. 정계(定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록 : 김지남(백두산 정계시 역관), 《북정록》. 박권(백두산정계시 조선측 대표, 접반사), 《북정일기》. 홍세태, 《백두산기》 김지남의 아들인 역관 김경문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김.
  21.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임진) 12월 7일 3번째기사.
  22. 이익,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편 "토문은 두만강이고, 음이 비슷해 잘못되었다."
  23. 한치윤,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조선편 "혼춘(渾春)은 그 서쪽의 토문강까지가 20리이며, 조선과 경계이다."
  24. 정약용, 《다산시문집》 15권 강계고 서편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三蓬坪)에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천참의 국경으로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三韓, 삼국시대) 뒤에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압록강이 모두 장백산(長白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장백산의 남맥(南脈)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康熙) 만년에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명을 받들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드디어 양하(兩河)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25. 이긍익,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두만이 곧 토문이다."
  26. 이중하(을유·정해감계에 참여), 《백두산일기》.
  27. 간도협약 체결 당사자는 청·일 대한제국에는 효력 없는 조약이다 주간조선 2319호
  2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yonsei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29. 석주 이상룡, 사단법인 석주 이상룡 선생 기념사업회
  30. "간도반환 소송가능시한 3주밖에 안남아" 재미동포 피맺힌 절규”. 뉴시스. 2009년 8월 12일. 
  31. “학계 "간도 100년 시효설 터무니없어". 연합뉴스. 2009년 9월 3일.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