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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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壬午禍變), 임오옥(壬午獄) 또는 사도세자 사건(思悼世子事件)은 1762년 7월 4일 사도세자노론과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 뒤 사망한 사건이다.

임오화변
壬午禍變
별칭임오옥, 사도세자사건
참가자영조·노론
장소조선 조선
날짜1762년 (영조 38) 7월 4일
사망자장조(사도세자)
원인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결과세자의 지위를 사도세자의 아들(훗날 정조)가 계승

배경 편집

영조는 자신의 서자인 사도세자를 엄하게 키우며 한편으로는 의심했다.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영조를 크게 두려워했으며, 15세 때인 1749년부터 13년 동안 대리청정을 수행하면서 영조와 갈등을 겪었다. 심한 압박 속에 병을 얻은 사도세자는 비행을 저질렀는데, 서로 대립하는 당파였던 노론소론의 싸움에 그의 비행이 이용되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 편집

사도세자는 장인 홍봉한에게 쓴 편지에서 ‘내 나이가 15세인데 아직 명릉(할아버지인 숙종의 능)을 참배하지 못했다’[1]고 썼는데, 이는 그가 영조의 불신을 받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영조가 병상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영조에게 약을 올릴 것을 권했지만 사도세자가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다.[2]

사도세자의 병과 비행 편집

부인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옷 입기를 꺼리거나 특정 옷감을 꺼리는 의대증(衣帶症)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는 하지만, 증상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그 전부를 지어낸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사도세자가 스스로 써서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신이 울화증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1]

조선왕조실록에도 사도세자가 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3] 그의 아들 정조도 아버지의 병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 있다.[4] 또한 정조가 직접 지은 여귀를 달래는 제문에서도 "모년(某年 1762년(영조38)을 말함) 이전의 의지할 곳 없는 귀신을 제사하여, 환후(患候)가 침독(沈篤)했음을 알게 하노니,"라며 사도세자에게 죽은 억울한 원혼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병이 심했음을 알아달라고 하고 있다.

심리학자 강현식은 사도세자의 심리상태를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조증으로 판단하며 숙종, 영조, 정조에게도 나타나는 집안 내력이라고 보았다.[5]

사도세자는 궁녀와 궁인을 죽이는 등 비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1762년 5월 22일(양력 6월 14일) 나경언에 의해 영조가 알게 되었다.[6]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노론이 반대하는 소론이 논쟁을 벌였다.

임오화변 편집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뒤주 속에 가뒀다.[7]

8일 뒤인 윤 5월 21일 세자가 죽자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8]

사건 이후 편집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정조는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777년 재위한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9]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렸다.[10] 이후에도 사도세자를 추존해달라는 상소가 계속되었는데, 그 중 1792년(정조 16) 쓰여진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만 명 이상이 참여한 만인소였다.

노론은 둘로 갈라져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파와 그렇지 않은 벽파로 나뉘었다. 두 당파는 정조의 탕평책에 대한 입장 차이로 정쟁을 하였다.

1899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면서 사도세자의 시호(諡號)가 장종(莊宗)이 되었고, 후에 다시금 황제로 추존되면서 장조(莊祖)로 바뀌었다.

각주 편집

  1. ““울화증 약 몰래 보내주세요…””. 
  2.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476
  3.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94) ·무인년1539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
  4. 정조 1권,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5월 13일(계미) 2번째기사 윤음을 내려 문녀의 죄악을 포고하다 "~대행 대왕께서 인자하게 덮어 주시는 덕이 그처럼 진지하고도 간절하셨기 때문에 선친(先親)의 지난날의 질병이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정상으로 회복될 수도 있었는데, 흉계를 빚어 온 지가 이미 오래이고 의구심이 쌓여 온 것이 점차 고치기가 어려웠으니, 그 때에는 단지 문침만 제때에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선도 제때에 하지 못하였다.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또한 일찍이 자주 좌우 사람을 보내어 기거(起居)의 안부를 묻게 하고 음식의 다소를 살피게 하셨으니, 이는 곧 양궁(兩宮)께서 자애하시고 효도하시게 될 수 있는 하나의 크고 좋은 기회였는데, 환후가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평복(平復)하게 될 수 없었으니, 어찌하겠는가? ~"
  5. 강현식,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살림, 2008년, ISBN 89-522-1018-2, 254-263쪽
  6.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5022_002
  7.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5113_002
  8.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805121_002
  9.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10_004
  10.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003020_001

같이 보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