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Hardk/보존문서1

마지막 의견: 13년 전 (Hardk님) - 주제: 토론:김두한

안녕하세요

귀하께서 하신 편집 잘 보았습니다. 그러나 김두한김옥균 관계는 11촌으로 백부가 맞습니다.

  1. 김을동 인터뷰
  2. 안동김씨 족보--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06 (KST)답변
안준생, 김춘삼 관련은 야인시대 관련이 아닌 김두한 관련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10 (KST)답변
김을동씨 인터뷰와 다음 까페의 자료가 서로 모순됩니다. 다음까페 자료는 분명히 김옥균과 김좌진의 관계가 11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옥균과 김두한이 삼촌-조카 관계라면 김옥균-김좌진의 항렬이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김춘삼과 김두한과 서로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부분은 남겨 두었습니다만 김두한과 무관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안준생에 관련된 부분은 김두한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김구나 백범일지에서 다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이하 토론은 항목 자체의 토론항목에서 하고 싶습니다. --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19 (KST)답변

김형규(김두한의 조부)와 김옥균 관계는 삼종질입니다. 김두한은 김옥균을 조부뻘 즉 백부가 맞습니다. 그리고 안준생 관련은 관련 단체에서 백범어록에 김구가 김두한을 호통쳤다는 카더라 관련 내용입니다. 김춘삼 또한 마찬가지이고요.--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24 (KST)답변

삼종질 사전 참조하세요.--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30 (KST)답변

편집요약으로 하시지마시고 토론에 의견남겨주세요. 그리고 토론란에서는 안준생, 김춘삼, 편집요약에서는 한홍구 평가 관련 말하시면서 편집 다른 내용들 삭제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39 (KST)답변
이하 항목 자체에 토론을 답니다.--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42 (KST)답변
김두한과 김옥균이 삼촌과 조카 사이가 아니라 조부와 손자뻘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1:44 (KST)답변
위키백과:편집 지침 참조하세요. [1]문서 삭제는 훼손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2:17 (KST)답변
단순한 실수입니다. 원상복귀했습니다. 그리고 항목 자체에서 토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2:19 (KST)답변
위키백과:편집 요약참조하세요. 요약으로 토론하시지마시고 토론에서 의견남겨주세요.--떠돌이 (토론) 2010년 10월 19일 (화) 02:21 (KST)답변

문서

[2] 현재 편집된 해당 인용문은 딱 그 부분만 넣으면 평가하는거처럼 나오는데요.

"장군의 아들, 그것은 김두한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 개인을 논할 때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상징하는 수식어가 된다는 것은 그 인물이 끝내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김두한 신화에서 김좌진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면 김두한은 그저 뒷골목 깡패의 보스나 해방 뒤 백색테러의 행동대장의 하나로밖에는 기억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좌진 장군과 쌍벽을 이룬 홍범도 장군의 아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준 열사의 아들로 진짜 독립군 대장이 되어 중국대륙을 누빈 이용(李鏞)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용 장군은 북에서 고위직을 지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뒷골목 깡패 보스라는 어떠한 근거가 되는 주장, 자료도 나오지 않습니다. 뒤로 갈수록 오류점들이 많고요. 백기완 가대기 일화 기사에서는 못살게 굴던 김두한이라고 강조하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시위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1916년부터 현재 가장 오랫동안 양복점 운영한 이경주 씨나 종로구 이발사분 등 진짜 종로구 상인들 증언에서는 오히려 김두한을 볼 때마다 전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홍구는 이준 아들이나 홍범도 아들 등 이야기를 언급하는데 이준 아들 이용, 홍범도 당시 시대배경과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것을 끼어맞추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홍구 자신도 드라마 야인시대가 화제가 되고 있자 왜 안 쓰느냐고 써보라는 권유로 썼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3] 한홍구는 김일성은 1930년대 와해된 독립운동 상황에 보천보 전투는 비록 군사적 성과는 미미했으나 와해된 상황에서 한 것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안중근도 엄연한 군인인데 개인의 자격에 의거로 말하는 등 이치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짜 일본군이 된 유림의 아들 유원식에 대한 언급도 없으며 아버지를 대신해 이토히로부미 아들에 용서를 구한 행위로 김구가 안준생을 죽이려고 하는 등 노발대발한 백범일지에 있는 내용을 진보 쪽에서는 김두한으로 각색하기도 했습니다.

회고록에 일제 행적은 없고 해방 후 좌우대립 행적 이야기만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회고록과 2권으로 나눈 버전 회고록도 확인했지만, 일제 행적 이야기도 다루고 있으며 자전권 보관소를 근거로 선우영빈을 단순히 친일 인물로 그리고 통합됐다고 단정 짓고 있지만 근거자료도 말하지 못하며 고작 근거는 증언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라는 이 부분은 김동회 인터뷰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홍구는 김옥균 김좌진 관계를 촌수로는 20촌이 넘는 그냥 문중일 뿐이다. 라고 단정 짓고 있지만, 김형규가 김옥균 생부에게 양자로 간 것도 사실이며 오랫동안 왕래도 한 것도 사실이며 일가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촌수로 11촌도 사실입니다. 안동 김씨 족보 11촌

국군준비대 사상 수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백선엽 등 단체 간에 대립 부분 말한 적이 있었고 박갑동 또한 한강에 시체들 손이 올라오는 등 끔찍한 상황이었다고 해방정국 당시 상황을 말한 적 있습니다. 해방정국에 그냥 동네건달로 단정 짓고 있지만 박갑동은 조선청년전위대 전위대장으로 있을 때 그때는 민족진영에서 꼼짝하지 못했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정진룡에 대한 이름을 당시 대한민청 사건(대한민청 본부에서 있었던 살해사건) 기사자료에 정진룡으로 나오고 있는데, 현재 이재용 이재룡 선동열 선동렬([4])등 편한대로 쓰는것으로 볼 때 단정짓기에 무리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정진영(또는 룡)이 부산에서 주먹 보스라는 것도 일명 카더라일 뿐 근거 자료가 없습니다. (김두한의 부하들이 신의주에서 이성순에게 얻어맞고 벼루고 있다 해방 후 종로에서 만나 서로 으르렁하다가 김두한이 화해해서 형님아우 됐다는 일화도 한 때 기정사실화로 인터넷에 유포된 적이 있었는데 출처는 김춘삼 자서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서전 토대로 드라마 왕초에서도 이 일화를 썼고요.)

대한청년단 감찰국장 밑에서 부국장이 되어 감찰국장으로 승진하고 불법감금·공갈 등의 혐의로 단정짓고 있지만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맡았고 국가보안법입니다. 한국 전쟁 때 김두한은 전쟁에 참전한 것이 허구라고 단정짓고 있지만 김웅수 장군, 김종문 (1919년), 김동길, 등 한국 전쟁 당시 행적에 대해 말한 적 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로 한 발언 말하면서 김성수를 친일파인데 독립운동가이라며 단정짓고 있지만 제가 알기로 김성수 친일 논란은 현재도 진행형이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서 독립운동가이기도 독립운동가 이강훈도 김성수를 독립운동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또한 김성수를 높이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진보당에서 탈퇴한 게 기회주의로 단정 짓고 있지만 원래 시경에 내사받고 탈퇴하고 노농당으로 옮긴 것입니다. 4대 국회 낙선은 당시에 민주당 열풍과 3대 의정 때 비구승 옹호한 것으로 종교단체에 탄압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을 김두한이 김종필과 가까워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며 단정 짓고 있지만, 김종필과 김두한은 자료를 보았을 때 정치적이나 뭐나 같이 활동했다는 자료도 없습니다. 그리고 피로 물들인 민족사이라 책은 김두한의 회고록 또는 자서전이 아닙니다.

국회오물투척 사건 이후 재판 중에 울먹이며 부친의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자해를 시도하는 등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뉴스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기사자료 등에는 그런 기사는 없고 자해시도라는 부분은 칼로 배를 그은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칼로 배를 그인 것은 오물투척사건은 배후가 있다는 배후설에 반발한 것으로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에서도 당시 기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오물투척 배후설은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배후가 있다고 보고했다고 이만섭이 말한 적 있습니다. 또 이 배후설은 진보 쪽에서는 귀가 얇다는 등 재각색해서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습니다. 평가는 사실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비판과 비난을 구분해야 합니다. 일부 실제 사실을 자신들에게 맞게 부풀며 각색된 기사를 평가 항목에 넣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습니다.--떠돌이 (토론) 2011년 1월 30일 (일) 14:29 (KST)답변


떠돌이씨의 주장에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 김두한이 뒷골목 깡패 보스라는 어떠한 근거가 되는 주장, 자료도 나오지 않습니다. => 김두한에 대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은 개인의 도덕성이나 인물에 대한 여부와는 무관하게 깡패 출신의 국회의원입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반적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에 대한 근거 입증은 그 사람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김두한이 깡패 보스가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장황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님은 김두한이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김두한이 깡패가 아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 '김형규가 김옥균 생부에게 양자로 간 것도 사실이며 오랫동안 왕래도 한 것도 사실이며 일가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촌수로 11촌도 사실입니다.'고 했는데, 해당 링크의 기사내용과 첨부된 PDF 파일은 제대로 확인은 했는지요? 김옥균 생부는 병태(炳台), 김형규의 양부는 병태(炳泰)입니다. 한자를 분명히 확인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님이 제시하신 링크 주장대로라면 김옥균-김좌진은 실제혈연 11촌, 입양관계 19촌이니 김옥균-김두한은 실제혈연 12촌, 입양관계 20촌이지요. 촌수관계에 대한 한홍구의 주장은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실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습니다.(입양관계로 딱 20촌) 그리고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도 8촌을 넘어가면 친족개념에서 문중의 개념으로 바뀝니다. 일단 김형규가 김옥균 생부에게 양자로 간 것이 사실이라는 언급이 사실이 아니므로 왕래가 있고 일가라는 말도 사실로 인정하기 힘듧니다. 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 김형규-김옥균은 입양관계로 형제가 되고 그럴 때에만 김옥균이 김좌진의 백부가 됩니다. 이게 원래 누구의 주장인지 모르지만 명백한 오류입니다. 그리고 과거 이에 대해 바로 님이 제시한 링크의 근거를 통해서 내용을 확인하고 그 근거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님이 계속 김옥균-김두한의 촌수 관계를 10촌이라고 고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평가는 사실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비판과 비난을 구분해야 합니다. 실제 사실을 자신들에게 맞게 부풀며 각색된 기사를 평가 항목에 넣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습니다.'=> 님이 작성한 '김두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수많은 평가들은 대한민국의 일반적 상식과는 다르게 전적으로 호의적입니다. 궁금한 건 호의적인 평가를 한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시각에 맞추어 부풀리지 않았고 유독 한홍구만 부풀리고 각색했다는 건지요?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김두한에 대해 공정하고 풍부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런 명백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평가에 포함된 수많은 내용들은 거의 모두 제거되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사실의 기록이 아닌 평가에서는 한 인물에 대해 존재하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홍구의 평가내용은 그런 다양한 시각 중의 하나이고, 따라서 전기적 부분이 아닌 평가 부분에서 충분히 실릴 수 있는 내용이고 실려야 하는 내용이라고 봅니다. 님이 이야기하고 있는 '한홍구의 김두한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비판과 비난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한홍구의 김두한에 대한 평가가 위키백과에 실리지 못할 정도로 편파적이고 문제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위의 족보 문제에서 님이 보이고 있는 오류와 모순 때문에 '떠돌이'가 작성한 김두한 항목의 내용에는 문제가 많고, 따라서 항목에서 해당 기여부분은 삭제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토론) 2011년 1월 30일 (일) 15:34 (KST)답변

답변

깡패라는 말은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 이후 언론으로부터 처음 쓰며 폭력배는 깡패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씨도 참여한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에서도 방송되었습니다. 박한용 씨는 종로구 상인들이 시위했다는 말을 유포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김두한이 깡패라는 부분은 김좌진 부자설, 종로구 상인들 시위설, 김구가 김두한을 호부견자했다는 설 등 주로 민족문제연구소 등 진보단체이나 극우 단체 등에서 쓴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이기동, 박춘금이란 자이며 해방 후에는 이정재, 임화수가 깡패 시초로 꼽고있습니다. 특히 이기동, 박춘금이란 인물은 친일파라는 이미지만 있을 뿐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 [5]
  2. [6]


제가 한자 확인은 못했지만 그러나 안동김씨 대동보 제5권 친가 11촌 양가 19촌으로 20촌이 넘고 그냥 문중일뿐이다라는 한홍구이 말한 내용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주장에서는 변화에 없다고 보입니다만, 8촌 개념이 현재같은 가족개념으로 동등하시는거 아니시겠죠? 자식없이 사망하면 양자로 입적해서라도 대를 잇고 있습니다.

  1. [7]
  2. [8]

김두한의 비판 관련은 김좌진 부자 설, 김구가 김두한 호통했다는 설, 종로구 상인들이 시위했다는 설, 김두한이 상인을 못살게 굴고 가대기라는 짐꾼에게 시비를 걸다가 무릎을 꿇게 했다는 설 등 대다수 이런 내용에 크게 다르지 않고 있으며 출처도 위정자 단체뿐입니다. 위키에서도 한국어판은 물론 영어판에서도 김좌진 부자 설이 편집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설마 외국사람들이 편집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겠죠? 그리고 한홍구 기사는 한홍구의 전체 생각이 아니며 민족문제연구소, 시사저널 등에 기고된 기사 내용과 굉장히 겹쳐져 있습니다. 아무튼, 저도 그래서 예전에 좌우대립에서 살상에 대해 비판이 있다는 편집을 했지만, 내용이 너무 짧아서 삭제한 적이 있습니다. --떠돌이 (토론) 2011년 1월 30일 (일) 16:22 (KST)답변

묻습니다. 깡패라는 말을 현대 한국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국가가 공인하지 않은 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분쟁을 해결하거나 생계를 유지한다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1공화국 당시의 친 자유당 정치깡패' 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제가 지적하는 것은 깡패라는 단어의 유래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김두한 깡패설을 진보단체에서 유포했다고 하는데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좌우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개인의 인간성이 좋다 나쁘다 여부가 아니라 김두한이 깡패(폭력배)출신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애초부터 그의 인생역정에서 너무나 분명한 팩트인데 누가 유포했으니 이게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이기동, 박춘금, 이정재, 임화수가 깡패라는 건 압니다만 그게 김두한이 깡패 출신이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까?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근거를 끌어 오시기 바랍니다.
한홍구가 말한 내용이 터무니없다니요? 8촌은 옛날에 누가 죽으면 상복을 입는 가장 먼 친족입니다. 전통사회에서도 8촌을 넘어가면 문중으로 바뀌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예요. 혈연으로도 이미 김옥균-김좌진은 11촌으로 친족의 개념을 넘어가는데, 입양되면서 19촌으로 더욱 멀어집니다. 김옥균-김두한은 입양관계 기준으로는 딱 20촌이고요. 완벽하게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저도 인정한 사항입니다만 과연 터무니없는 낭설로 취급받을 수 있을 정도로 부정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괜히 사돈의 팔촌이라는 속담이 있는 게 아녜요. 문중의 일원으로서의 교류와 친척으로서의 왕래는 구별해야지요. 그리고 교류가 얼마나 없었으면 후손들이 족보를 헷갈려 하겠습니까? 전통사회에서 8촌을 넘어 가는 친족과의 관계가 현재와는 아주 다른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입양은 문중 단위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당장 김좌진의 생부가 입양해 간 것이 그런 예이지요. 그리고 관련 내용이라고 링크한 내용은 김두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인데 이를 굳이 링크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김좌진 부자 설? 이거 뭡니까?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이야기?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는 사실 오래 전부터 떠돌던 이야기였고 지금도 김두한은 김좌진의 친자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에 대해 각종 기록을 추적해서 명확하고 분명하게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인 것은 맞다'고 분명하게 확인해 준 기사가 월간 말 2003년 5월호의 기사였던 <'장군의 아들'이 넘나드는 끝없는 거짓말의 경계선>이라는 기사입니다. 진보단체, 진보진영 언론이 유포한 기사라서 신뢰가 가지 않는다면 이 기사까지 부정해서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누가 유포했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하지 말고 각종 내용에 대해서 님이 믿지 않는 이유를 명확한 사실정보에 기반해서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누가 썼으니 기사가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당시의 관련 기록이나 증언을 보니 이런 내용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밝히는 것은 토론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항에 대해 관련인들의 증언이 엇갈리는 경우는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니 해당 사항에 대해 엇갈리는 증언들도 교차검증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을 함께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한홍구 기사는 한홍구의 전체 생각이 아니며 민족문제연구소, 시사저널 등에 기고된 기사 내용과 굉장히 겹쳐져 있습니다. => 그래서요? 먼저 민족문제연구소나 시사저널의 기사 내용의 문제점을 먼저 지적해 주기 바랍니다.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민족문제연구소나 시사저널의 기사내용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교차검증이 가능하게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장하는 내용이 동일하면 한홍구의 전체 생각이 아닙니까? 이는 한홍구씨가 한홍구씨 나름대로 자신이 입수할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취사선택을 한 것이라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언급입니다.
위정자 단체? 이건 무슨 말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현대한국어에서 통용되지 않는 대단히 이상한 단어조합입니다. 누구를 가리키는 겁니까? —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120.50.69.127(토론 / IP 정보)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1. 깡패라는 말은 주로 영어의 갱(Gang)이라는 단어에 패거리라는 말을 덧붙인 조어가 기정사실화로 쓰였는데, 한국의 건달은 건달은 원래 건달바[9][10]에서 준말로 쓰이다가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폭력배=깡패로 굳히게 된것입니다. 1957년에 김두한은 1954년에 제3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정치인 신분입니다.
  2. 현재 같은 가족개념이나 멀리 8촌까지 안가도 웬만한 관계도 남입니다. 덕수 이씨 안동 김씨 전주 이씨 등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에서는 8촌이면 먼 친척도 아닙니다. 덕수 이씨도 이번에 자녀 없이 사망해서 양자로 입적해서 대를 잇게 하는 논의 되고 있습니다.
  3.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이야기가 아니며 과거에는 해방정국에 좌·우 대립에서 좌익에 대한 살상에 대해 비판이 가해졌으며 2000년 이후 김좌진 부자 설이 나오게 된 것이며 유전자 검사를 거부했다는 설은 2006년에 위연홍이라는 조선족분이 자신이 김좌진의 외손녀라고 주장했을 때인데. 2008년에 아고라에서 김좌진의 가족이 폴란드 등 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등 내용에 게시글을 계기[11]로 현재 유포되고 있는 김을동이 유전자 거부했다는 설이 나오게 된것입니다. 원출처는 [12]입니다. 여기 자세한 내용은 김좌진 문서에 참고바랍니다.
  4. 시사저널, pd저널(박한용 기고문) 등 내용이 김좌진 부자설, 김구가 김두한 호통쳤다는 설 등 내용에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5. 위정자는 정치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니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떠돌이 (토론) 2011년 1월 30일 (일) 17:45 (KST)답변


1 깡패의 어원은 이미 알고 있고 관심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깡패, 그러니까 주먹꾼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지요. 깡패의 어원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잖습니까?
2 상복을 입는 가장 먼 친척이 8촌이고, 김옥균-김좌진은 이미 그 제한을 넘어가고 있는데다가 양자관계까지 고려하면 더 멀어집니다. 저는 현대의 기준이 아닌 전통사회의 기준으로 얘기했고, 8촌을 넘어서도 입양은 가능하다는 것도 밝혔습니다.
3 2000년 이후 김좌진 부자설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당장 김용옥이 김좌진-김두한이 친자관계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던 《도올세설》은 1990년에 나온 것이고 이전에도 꾸준히 이야기되던 내용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던 겁니다. 사실 관계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저는 월간 말 2003년 5월호의 기사였던 <'장군의 아들'이 넘나드는 끝없는 거짓말의 경계선>에서 제시된 여러 가지 내용에 따라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4 민족문제연구소, 시사저널의 내용과 한홍구의 기고문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인용과 함께 지적해 보시지요.
5 시사저널, 한홍구, 김용옥, 월간말, 민족문제연구소 등등의 인물들이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님이 말하는 대로 '정치하는 사람'입니까? 단어의 어감을 이용한 의도적인 불분명한 사용이라고 지적당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모르고 그랬다면 앞으로 주의하기 바랍니다. -- (토론) 2011년 1월 30일 (일) 18:10 (KST)답변

이제 김두한 관련 토론은 해당 항목의 토론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사용자토론에서보다는 본 항목 자체에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입니다. 해당 항목 토론 문서을 이용해 주시고, 여기에 글이 달려도 김두한의 토론 문서에 답하고자 합니다. -- (토론) 2011년 1월 30일 (일) 18:31 (KST) - 떠돌이 사용자가 삭제한 부분을 다시 복구하였습니다.답변

불필요한 토론으로 서로 간에 시간, 그리고 용량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님의 의견을 수용하여 한홍구 기사 삭제하지 않았습니다.--떠돌이 (토론) 2011년 2월 1일 (화) 19:13 (KST)답변

사용자 페이지에 있는 글을 함부로 지우지 말기 바랍니다.

떠돌이씨, 이곳은 제 사용자페이지입니다 어떻게 자기 사용자페이지도 아닌 남의 사용자페이지의 내용을 지울 생각을 합니까? 한번만 더 이런다면 공식적으로 신고하겠습니다.-- (토론) 2011년 1월 30일 (일) 23:11 (KST)답변

김두한 관련 토론 과정에서 중복되는 내용의 일부를 삭제합니다.

사랑방에서의 문의 결과에 따라 제 사용자페이지의 내용 일부를 삭제합니다. 기존의 논의 중에서 토론 장소를 옮긴다고 언급한 이후의 토론 내용은 이미 김두한 토론페이지로 옮겨져 있으며, 그곳에서의 토론은 당연히 지속됩니다. 차후 이곳을 통한 논쟁에는 응답하지 않을 예정이고 내용에 대해 통고없는 삭제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글을 달아 주신 leno님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 (토론) 2011년 2월 1일 (화) 12:03 (KST)답변

사용자:Dalgial님 건 참조바랍니다.

지금 사용자:떠돌이님하고 논쟁이 있으신거같은데, 왜 사람들이 이 사용자를 피할려하는지 알게될겁니다. 수고 많으시군요.--175.253.55.159 (토론) 2011년 2월 8일 (화) 14:05 (KST)답변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전에 토론 과정에서 포기하고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외부 커뮤니티에서 어떤 사용자가 위키백과의 내용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현재 분쟁의 사용자와 비슷한 논리와 어투로 반영하려다 해당 커뮤니티의 거센 반발을 산 적이 있습니다. 외부링크1 외부링크2
그 이후 위키백과의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니 바로 사용자:Dalgial님이 결국 분쟁에 휘말려 아예 위키백과를 접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용자:Dalgial님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시 공개적으로 토론을 확대해서 재개했습니다. 실망스러운 것은 최대한 토론을 널리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들의 참여가 활발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기껏 해당항목에서 분쟁 기간에 그나마 나은 편집을 했던 다른 사람 역시 악성 다중계정 사용자였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대단히 피곤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그 날까지 계속 싸움을 계속하려 합니다. -- (토론) 2011년 2월 8일 (화) 14:23 (KST)답변

한 가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토론이 끝나기 전까지는 문서를 토론이 시작 했을 때의 상태로 두는 것은 어떨까요? --SVN Ta.】【Con. 2011년 2월 9일 (수) 23:41 (KST)답변

토론을 시작했을 때의 상태를 언제로 잡고 계시는지요? 일단 해당 버전을 알려 주시면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버전을 토론 직전으로 생각하시는가에 따라 차후의 대응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 (토론) 2011년 2월 9일 (수) 23:44 (KST)답변
떠돌이 님이 토론:김두한에 올리신 후의 1월 30일의 이 판으로 잡고 싶네요. --SVN Ta.】【Con. 2011년 2월 10일 (목) 00:26 (KST)답변
1차적으로 정리됐던 내용 중에서 딱 한홍구의 평가만 제외됐군요. 쓸데없는 내용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1차적인 논의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자 정상적인 항목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내용이 삭제되었지요.
단지 분쟁 중이라는 이유로 빠졌다는 것이 저로서는 꽤 불리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토론 자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해당 항목은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훼손과 문서사유화 과정을 거친 결과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봉책으로 지적하신 상태로 되돌린다면 이 상황에서는 상대방에게 추가적인 성실한(?) 토론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집니다.
이 상태에서 그냥 유야무야 되다가 시간이 흘러서 제가 위키에 뜸해지다가 동결이 풀릴 때, 상대방이 또 나타나서 자기가 써대고 싶은 대로 쓰고 다른 사람들이 수정을 하는 것은 바로 되돌리기를 해댈 것이 뻔한데,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수단이 과연 존재하나요?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리자 측의 중재의 일환이라면 몇 가지 전제를 달고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는 한데요,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군요. 이런 상황에서는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 바로 SEVEREN님이 말씀하시는 문서보호의 공식성 여부가 불투명합니다.
관리자 선거에 출마하신 것 같은데, 일단 아직은 관리자가 아니시군요. 위키백과 관리자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중재가 들어가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중재라면 호의는 고맙지만 일단 사양하겠습니다. 문서의 동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용자에 의한 더 많은 의견 교환이 더 필요한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이런 의견은 SEVEREN님이 아니라 관리자께서 해 주셨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SEVEREN 님의 제안이 위키백과 운영진의 공식적인 요청인지 여부를 다시 확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요청이라면 그때 다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토론) 2011년 2월 10일 (목) 01:59 (KST)답변
한 가지를 정정하자면, '관리자'는 '운영자'가 아닙니다. '관리자 권한을 갖고 있는 일반 사용자'로 이해하시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BIGRULE (토론) 2011년 2월 13일 (일) 16:34 (KST)답변
그렇군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2월 13일 오전까지 '김두한' 관련 내용과 떠돌이와 관련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관리자들의 조치와 일반사용자들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여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관련 사항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좀 껄끄럽게도 느껴질 수 있는 언급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간 관심을 보여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 (토론) 2011년 2월 13일 (일) 17:06 (KST)답변

토론:김두한

먼저 다른 데에 신경쓰느라 김두한 문서 건에 대해 중재하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는 걸 사과 드립니다. 헌데 백:사관 방에 남기신 것도 그렇고 일단 다시 한번 토론란이나 본 문서를 살펴보았는데 떠돌이 님께서는 아무런 의견이나 편집을 하고 있지 않고 있어 보입니다. 지금 현재 어디에서 어떻게 편집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Alto (토론) 2011년 2월 18일 (금) 14:17 (KST)답변

네. 2월 10일 새벽에 관리자에 의해서 임시동결되었습니다만 2월 10일 오전 이후로 떠돌이는 더 이상의 편집이나 토론 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일단은 토론 및 항목수정을 잠정적으로 완료한 상태입니다. 분쟁기간처럼 매일 위키백과에 접속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문서 수정과는 별개로 그간 떠돌이가 했던 토론과 편집은 전형적인 방해편집이라고 보고 차단 대신 경고 및 해당 문서에 대해 지속적인 주시를 신청하고 관리자들이 어떻게 할 지 보고만 있습니다.
아무래도 id를 바꾸든가 해서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데, 내용상 동일인이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이번 분쟁까지 소급해서 경고나 차단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토론) 2011년 2월 19일 (토) 03:00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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