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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일본의 제122대 천황
재위 1867년 ~ 1912년
전임 고메이 천황
후임 다이쇼 천황
신상정보
출생일 1852년 11월 3일
출생지 일본의 기 일본 야마시로 국 교토
사망일 1912년 7월 30일(1912-07-30)(59세)
사망지 도쿄부 도쿄시 메이지 궁전
부친 고메이 천황
모친 나카야마 요시코
배우자 쇼켄 황태후
서명

메이지 천황 (일본어: 明治天皇, めいじてんのう 메이지 덴노[*], 명치천황, 1852년 11월 3일 (가에이 5년 9월 22일) ~ 1912년 (메이지 45년) 7월 30일)은 일본122번째 천황 (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30일)이다. 는 무쓰히토 (睦仁), 어린 시절의 궁호는 사치노미야 (祐宮), 시호는 메이지 (明治), 오시루시는 "영" (永)이었다. 고메이 천황의 서자로, 조정의 유력자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딸인 나카야마 요시코의 소생이나, 이후에 에이쇼 황태후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천황이 되어, 5개조 서문을 발표하였고, 도쿠가와 막부 세력을 무너뜨리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절대 군주제를 확립했다. 또한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던 에도의 이름을 도쿄로 바꾸고, 일본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해외파를 중용하였는데, 이토 등은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폐번치현 (1871년), 근대식 학제 공포 (1872년), 내각제 채택 (1885년), 메이지 헌법의 공포 (1889년), 국회 개설 (1890년) 등 일본의 각종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의 이러한 근대화와 함께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1910년식민지로 만들게 된다. 한편, 일본인들은 이러한 메이지 시대에 이루어진 각종 근대화에 대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무쓰히토 대제", "메이지 대제"[1]라 부르기도 한다.

메이지 천황은 근대 서구 사상이나 서구적 개혁 요소들을 받아들인 인물 중 하나로, 서구식 복장과 서양 요리를 즐겼다. 또한 전통적인 일본 시가(詩歌) 양식으로 씌어진 10만 여 수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생애 편집

어린 시절 편집

 
고메이 천황

메이지 천황은 1852년 11월 3일 교토 어원 부근의 한 집에서, 고메이 천황과 후궁 나카야마 요시코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2] 이는 "출산은 건물을 더럽히는 일"이므로, 천황의 자손은 생모의 친정 쪽에 있는 별채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일본 궁중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2] 궁중의 의식을 거쳐, 아버지 고메이 천황은 이레 째에 '사치노미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며[3], 사치노미야를 태어난 지 30일이 지나서야 대면할 수 있었다.[4] 사치노미야는 요시코의 방에서 자라게 되었으며, 다다야스의 어머니 쓰나코가 시중을 들게 되었다.[4] 이듬해에는 외할아버지 다다야스의 집으로 거처가 옮겨졌다.[4]

사치노미야가 태어나고 이듬해인 1853년, 매슈 페리가 이끄는 미국 해군 함대가 일본을 찾아왔다.[5], 이들은 에도 막부쇼군에게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국서를 전하는 문제로 우라가 (浦賀)에서 관료들과 마찰을 일으켰다.[5] 필모어의 국서는 7월 14일 막부에 도착했는데, 국서가 도착한 뒤 막부는 쇄국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개항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편이 나뉘어 다투었다.[5] 여기에 러시아에서 예프피미 푸탸틴이 이끄는 함대가 나가사키에 들어와, 영토 문제와 통상 요구에 대한 내용을 담은 칼 네셀로데의 서한을 막부에 전달하고자 했다. 이 문제도 찬성자과 반대자로 편이 나뉘는 등 막부는 서양 국가와의 교역 문제로 진통을 앓고 있었다.[6] 결국 1854년 막부는 미국과 가나가와 조약을 맺어, 시모다하코다테의 항구를 개방하기로 했다.[7]

이 시기에 사치노미야는 두 차례의 큰 병을 앓았고, 1854년 봄에는 궁궐과 주변 지역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고메이 천황과 사치노미야를 비롯한 황실이 궁을 버리고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8][7] 여기에 1854년 5월에 사치노미야의 고열이 나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토에 다시 대지진이 일어나기도 했다.[7] 사치노미야는 같은 해 12월 21일 러일 화친 조약이 이루어질 무렵, 이로나오시 (色直し)를 통해 처음으로 색이 있는 옷을 입도록 하는 의식을 치렀다.[9] 1855년 11월 23일에는 새로이 지어진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다.[9]

1856년에는 미국에서 타운센드 해리스가 이끄는 군함이 시모다에 들어와, 교쿠센 사를 "총영사관"으로 삼아 점거하였고, 네덜란드 전권변무관이었던 야누스 헨리쿠스 동커쿠르티우스는 나가사키 부교를 통해 막부에게 개방과 함께 후미에를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10] 그러나 이러한 외부 사정은 교토에 잘 전해지지 않았으며, 사치노미야는 천황의 명령으로 거처를 다다야스의 집에서 궁궐로 옮기게 되었다.[10] 궁궐에서는 고메이 천황의 정비였던 구조 아사코의 아들로 입적되었다.[10] 고메이 천황은 개항 문제를 두고 막부와 마찰을 빚어왔으며[11], 1858년 7월 29일 시모다 부교 이노우에 기요나오 등이 해리스를 만나 미일 수호 통상 조약에 도장을 찍자, 고메이 천황은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 양위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1] 하지만 그러한 의사를 밝힌 칙서는 막부에 전달되지 않았다.[11] 8월 5일, 고메이 천황은 다시 한번 칙서를 보냈으나, 8월 16일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사망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면서 양위는 무마되었다.[11]

1859년 3월 30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카히토가 사치노미야의 스승이 되었다.[12] 다카히토는 사치노미야에게 글씨 쓰기를 가르쳤으며, 이 밖에 후세하라 노부하루유교 경전 등을 읽는 법을 가르쳤다.[12] 고메이 천황이 직접 와카를 가르치기도 했다.[13] 1860년 9월 28일, 고메이 천황은 사치노미야를 황태자로 세우는 의식을 열었다.[14] 이 의식을 통해, 사치노미야는 '무쓰히토'라는, 고메이 천황과 중신들이 정해준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14]

즉위 초기 편집

1866년 (게이오 3년) 11월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가던 고메이 천황은[15] 회복되었다가 다시 증상이 악화됨을 되풀이한 끝에 같은 해 12월 25일 숨을 거두었다.[15] 1867년 (게이오 4년) 1월 9일에는 천조 의식이 치러졌고, 무쓰히토는 15세의 나이로 천황이 되었다.[16] 조정은 새 천황의 즉위에 맞춰 1월 15일 대사면령을 반포한 뒤, 1월 19일에는 막부에게 조슈 토벌군을 해산하라고 명령했다.[17] 2월 16일에는 《효경》의 한 구절에서 딴 시호 '고메이'를 선대 천황에게 바쳤다.[18] 하지만 무쓰히토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니조 나리유키섭정 자리를 맡아 무쓰히토를 돕게 되었다.

무쓰히토로 천황이 바뀌자, 유럽과 미국의 열강들은 조정과 막부 사이에 벌어질 권력 쟁탈전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18] 특히 프랑스는 특명전권공사 레옹 로시에게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만나게 하여, 프랑스가 막부 편임을 강조하고 개항을 강행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19] 그리고 조슈 번과 사쓰마 번도 막부가 개항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영국과 독자적으로 교섭을 하고 있었다.[19] 조정은 요시노부가 효고 (兵庫) 개항을 약속한 것에 대하여, 무쓰히토가 선대 고메이 천황의 유지를 받들 것이므로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했으나[19] 요시노부는 국가의 이해득실을 따져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식으로 반박하여 조정과 마찰을 빚었다.[19] 그러나 무쓰히토는 조정과 막부가 개항을 두고 마찰을 빚은 일들에 대하여 거의 관여하지 않았으며, 섭정 니조 나리유키가 요시노부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등 정치적인 일의 처리를 어느정도 도맡고 있었다.[19] 요시노부는 조정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서양 국가들과 계속 접촉하여, 고이데 히데미이사카와 도시마사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 러시아와의 가조약을 체결하게 했다.[20] 그리고 오사카 성으로 영국의 특파특명전권공사 해리 파크스를 비롯하여 여러 외국 공사관들을 초대했다.[20]

이 무렵 무쓰히토는 왕비 간택 문제와 맞딱뜨리게 되었다.[21] 1867년 6월 27일, 무쓰히토는 좌근위대장 이치조 사네요시의 누이동생이자, 황족의 외손녀인 하루코 (美子)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하루코는 무쓰히토보다 세 살 위였다.[21] 곤다이나곤 야나기하라 미쓰나루세쓰케 (摂家)들을 찾아 하루코가 천황의 배필로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고, 세쓰케들은 모두 찬성했다.[21] 다음 날인 28일, 히노 스네무네가 칙사로 이치조 사네요시 저택에 가서, 하루코가 천황의 배필이 되었음을 알렸다.[21] 그러나 연말과 연초를 거치면서, 왕정복고 공포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1868년 (게이오 4년) 4월에 하루코의 오빠 사네요시가 죽는 일 등 여러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혼례는 1868년 12월 28일이 되어서야 치러질 수 있었다.[21]

막부의 몰락과 권력 투쟁 편집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무쓰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한 직후 막부가 직면한 문제는 효고를 개항하는 것과 조슈 번에 대한 처분이었다.[22] 우선 효고를 개항하는 일은 곤다이나곤 다이고 다다오사가 조정을 설득하여 합의점을 찾았고[22], 1867년 6월 6일에는 막부가 에도와 오사카에서 외국인들의 상행위를 허가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22] 이를 통해, 막부가 미국, 유럽 국가들과 약속한 조약의 조항들은 이행되었으나[22], 같은 해 6월 13일 나가사키 부교가 히젠 우라카미 마을의 기독교도들을 체포하는 등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미국·유럽 국가들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22][23] 쇼군 요시노부는 프랑스 특명전권공사 레온 로시를 만나 기독교도들의 석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폴레옹 3세에게 일본의 상황을 고려해 포교 활동을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끝에 기독교도들을 석방하는 대신 우라카미 마을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23] 메이지 천황이 즉위 이후 처음으로 국정에 관한 회의에 참여한 것도 1867년 4월 22일에 열린, 기독교도 탄압 문제에 관한 어전 회의였다.[23] 메이지 천황은 5월 21일 기독교를 믿는 2,400여 명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1873년 3월에 그 때까지 개종하지 않은 기독교도들을 풀어주었다.[23]

한편, 조슈 번은 사쓰마 번삿초 동맹을 맺어 막부를 압박해왔다.[23] 삿초 동맹을 중심으로 한 혼슈 서부, 규슈, 시코쿠의 번들은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였고, 막부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원조를 얻어 근대 병기를 사들였다.[24] 막부의 간조부교[주 1]였던 오구리 다다마사는 쇼군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하는 절대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번을 현으로 바꾸는 계획 등을 강구했으나, 지지 기반이 부족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24] 1867년 10월 14일,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의 칙허를 자원하기 위해 상서를 올렸고, 15일에 입궐했다.[25] 메이지 천황은 요시노부의 청원을 허락했으나, 공포는 12월 9일에서야 이루어졌다.[25]

막부 중신들과 다이묘들은 요시노부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26] 또한 1867년 11월 15일, 삿초 동맹 결성을 주도한 사카모토 료마 등이 가와라마치에서 막부가 보낸 자객들에게 죽음을 당하였고[26], 이보다 앞서 10월 20일에 섭정 니조가 연 회의에는 영주들이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며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26] 결국 조정은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사직하겠다고 청원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6] 하지만 12월 9일, 왕정복고령 공포와 함께 총재와 의정, 참여관 등으로 구성된 새 정부가 수립되었고, 섭정과 관백, 막부 등의 관직이 사라졌다.[26] 이로써 에도 막부의 쇼군 대신 천황이 직접 정치를 돌보는 친정이 시작되었다.[25]

12월 16일, 쇼군직이 없어져 내대신으로 임명된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6개국 공사를 초청하여, 새로운 정권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렸다.[27] 다만 외교에 관련된 일은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기관이 없어 계속 요시노부가 책임을 질 것임을 덧붙여 알렸다.[27] 그러다 12월 19일, 요시노부는 갑자기 생각을 바꿔 조정에 왕정복고를 폐지할 것을 청원했다.[27] 그 뒤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무사 부대가 에도에서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12월 23일에는 에도 성의 외성이 불타는 일이 발생하였다.[27] 여기에 사쓰마의 지번 (支藩)인 사도와라 번과 에도를 지키던 쇼나이 번 사이에 일어난 무력 충돌이 막부가 사쓰마 번의 관저를 불태워버리는 일로까지 발전하자[27] 오사카 성을 중심으로 한 막부 지지자들은 크게 분노했고, 요시노부도 이에 호응하여 교토를 치기로 결심하였다.[27]

 
에노모토 다케아키

1868년 1월 3일 도바·후시미 가도를 타고 진군하면서 아이즈 번구와나 번을 근거지로 한 막부군은, 도바와 후시미 양쪽에서 사쓰마 번 병력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군대와 부딪쳤다.[28] 메이지 천황은 1월 4일, 닌나 사 (仁和寺)로 출가해 있던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를 토벌대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천황의 군대임을 상징하는 비단 어기와 절도 (節刀)를 내렸다. 이로써 막부에 대항하는 조정과 사쓰마 번은 요시노부와 막부군을 조정의 적 (朝敵 조테키[*])으로 몰 수 있었다.[28] 한편, 사쓰마 번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달아나던 막부군은 이나바 마사쿠니요도 성으로 들어가 전열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이나바는 막부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28] 또한 야마자키를 지키고 있던 쓰 번도 이미 조정에 귀순하여, 막부군을 공격했다.[28] 전세가 불리해지자, 요시노부는 오사카 성을 버리고 미국 해군 군함 이로쿼이 호와 막부 군함 가이요 호를 이용하여 에도로 달아났다.[28] 1월 7일, 조정군은 오사카 성을 점령했고, 1월 15일에는 메이지 천황의 관례 의식과 더불어 외국 공사들에게 "천황이 내정·외정 등 모두에 걸쳐 일본을 다스리기 위한 최고의 권능을 쓸 것"임을 알리는 국서를 보냈다.[29] 요시노부는 1월 17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야마우치 요도 등 자신에게 호의적인 조정 쪽 인물과 접촉하여 조정과 막부 사이를 중재해줄 것을 부탁했다.[30] 그리고 프랑스 공사 로시와 몇차례 가진 만남에서, 스스로 은퇴함과 동시에 후계자로 기슈의 영주 도쿠가와 모리쓰구를 추천했다.[30] 21일에는 요시나가와 요도에게 다시 "(로시에게 말한 것과 같이) 스스로 은퇴할 것이며, 큰 병에 걸렸다. 조적의 오명을 씻어달라."라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냈다.[30] 2월 12일에는 간에이 사로 들어가 근신하기로 맹세했으나, 승려였던 고겐 왕자에게 자신을 위해 입조하여 해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30]

메이지 천황은 요시노부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기 위하여, 2월 3일 니조 성에 행차하여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를 동정대총독으로 임명해 어기를 내리고, 요시노부와 막부의 잔당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31] 4월에는 하시모토 사네야나가 이끄는 정부군이 에도 성에 무혈입성하였다.[32] 그러나 토에노모토 다케아키,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그리고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중심으로 한 막부군이 저항하고 있었으며, 쇼기타이 (彰義隊)가 에도 성을 노리고 있었다.[32] 이 무렵에 메이지 천황은 덴포 산에 행차한 뒤, 오사카에 머무르고 있었다.[32] 교토로 돌아온 뒤 메이지 천황은 만기친재 (萬機親裁), 즉 천황이 모든 것을 돌볼 것임을 선언하는 포고문을 내렸다.[33] 왕자, 구게, 제후가 1등관이 되었으며, 이 밖에 서민들도 2등관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하였다.[33] 또한 관리는 공선입찰을 통해 뽑으며, 연임제로 4년 간의 임기를 두었다. 또한 관리들은 봉급의 30분의 1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33]

한편, 기타시라카와노미야는 간에이 사가 정부군에게 공격당하자 그 곳을 떠나, 히라카타 (平潟)를 거쳐 아이즈 국와카마쓰 성으로 들어가 막부군에 합류했다.[34] 또한, 6월 16일에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맹주가 되었고, 7월 13일에는 시라이시 성으로 자리를 옮겼다.[35] 그러나 9월 18일 기타시카라와노미야는 정부에 변명서를 써 보냈고, 11월에는 정부가 기타시카라와노미야에게 "후시미노미야"의 자리를 돌려주고 교토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35]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왕자도 에노모토를 비롯한 막부군과 손을 잡았다는 밀고가 들어와 형벌을 받았으나, 1872년 정부는 아사히코 왕자에게도 후시미노미야의 자리를 돌려주었다.[35] 그리고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패색이 짙어지자 12월에 홋카이도로 달아나, 그 곳에 에조 공화국을 세웠으나, 1869년 5월 18일 결국 멸망했다.[35] 에노모토는 붙잡혀 3년 간 감옥에 갇혔으나, 1872년 사면을 받고 홋카이도 개척사로 임명되었다.[36] 이 밖에, 1868년부터 옛 고즈케 지방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하는 일이 잦았으며[37], 1871년 4월에는 구게들이 도쿄를 불태우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나기도 했다.[37]

수도 옮기기 편집

 
도쿄 고쿄의 항공 사진.

메이지 천황은 1868년 8월 27일 즉위식을 거행하고[38] 그 때까지 쓰여오던 연호 "게이오"를 대신하여 "메이지"라는 새 연호를 쓰기로 하였다.[39] 메이지라는 연호는 《역경》 (易經)의 "성인이 남쪽을 향하여 천하의 소리를 듣고, 밝음을 향해 다스린다" (聖人南面而聽天下嚮明而治)라는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39] 이에 앞서 8월 4일에 정부는 포고문을 내리고, 에도의 새 이름으로 "도쿄"라는 이름을 지었으며,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의 도쿄 행차를 계획하고 있었다.[39][40] 9월 20일 교토를 떠난 메이지 천황은 10월 13일 도쿄에 도착했으며, 에도 성은 황궁이 되어 "도쿄 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41] 이 사이에 도호쿠 지방의 번들은 모두 메이지 천황에게 항복했다.[41] 메이지 천황은 도쿄에 머무르면서 미토 번의 영주 도쿠가와 아키타케, 가즈노미야 지카코 공주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요코하마에 머무르던 외국 사절들과 공사들 등을 접견했다.[42] 메이지 천황은 그 후 12월 23일 교토로 돌아왔다가, 몇년 간 도쿄를 자주 오갔다.[42][43] 메이지 천황이 살아있는 동안, 정부는 도쿄가 새 수도가 되었다고 발표하지 않았지만, 1875년 즈음이 되어서는 황궁, 정부 기관 뿐만 아니라 외국 공관도 도쿄에 세워져 사실상 수도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43][주 2]

메이지 유신 편집

1869년 판적봉환을 통해 다이묘들로부터 이미 영지를 비롯한 재산과 권리를 돌려받고, 막번 체제를 부번현 삼부제로 개편한 메이지 천황은 번을 완전히 폐지하려 했다.[44] 1871년 7월 14일, 메이지 천황은 번을 폐지하고 행정 구역을 정부가 직접 다스리는 부와 현으로 개편한다는 내용의 "폐번치현"을 발표하였다.[45] 영주들은 번에서의 세습권을 비롯한 특권을 모두 잃어 도쿄로 돌아와야 했으며, 대신 도쿄에서 현령이 각지로 파견되었다.[45] 폐번치현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부가 현에서 세금을 걷어 재정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45] 7월에는 폐번치현 뿐만 아니라 태정관제의 개편과 3원 분할 등이 이루어졌다. 3원은 천황이 직접 정사를 총괄하는 정원, 입법을 맡는 좌원, 법을 집행하고 행정을 맡는 우원으로 이루어졌다.[46] 대외적으로는 홋카이도와 지시마에 있던 11개의 율령국과 86개의 군에 관리를 두고 이주 장려 정책을 실시하여 러시아를 견제하였다.[46] 또한 러시아에게 사할린 섬을 양도하는 대신, 지시마 열도 18개 섬을 양도받아 국경선을 확정했다.[46]

1870년대에 들어 일본 정부는 미국, 유럽 열강들과 맺은 조약의 불평등한 조항을 고치려 했다.[47] 1871년 3월, 정부는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 대장성 출사 요시다 기요나리에게 각국 조약 개정을 맡겨 조사를 명했다.[47] 그리고 같은 해 11월 12일, 이와쿠라 도모미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47]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과의 조약 개정에서 "최혜국 대우"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곧 협상을 각국 대표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열기로 결정하고 순수한 의례적 방문으로 목표를 바꾸었다.[47] 미야케 세쓰레이 등은 사절단의 이러한 "목표 변경"을 "의미없는 나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47]


  • 폐번치현 및 제도 개혁
  • 세이난 전쟁 + 오쿠보 사망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 편집

  • 자유 민권 운동 / 입헌 운동
  • 헌법 제정
  • 정당 정치의 시작

산업화와 자본주의 경제 편집

  • 메이지 시대의 경제 발전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 건설 편집

메이지 시대에는 영토 확장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이 가속화되었다.

내용 순서

이 문단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이루어진 제국주의 정책에 대하여 별도로 정리

  • 홋카이도 개척사와 아이누 탄압
  • 류큐 침략
  • 타이완 침략
  • 조선 (대한제국) 침략과 합병 (을미사변, 을사늑약에 관해서도 기술)

청·러시아와의 갈등 편집

메이지 정부는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고, 이권을 늘려나가는 과정에서 주변 열강들과 대립하였다. 러시아는 쿠릴 열도의 영유권 문제로 메이지 정부와 갈등하고 있었으며,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메이지 정부와 갈등하고 있었다.

  • 청일 전쟁 (을미사변은 윗문단에 따로 씀)
  • 러일 전쟁

만년 편집

영향 편집

사후의 영향과 평가 편집

  • 노기의 자살
  • 메이지에 대한 일본인들의 찬양

비판 편집

  • 제국주의

현대의 영향과 평가 편집

  • 현대에 메이지 천황이나 메이지 시대를 소재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

호칭 편집

메이지 (明治)는 원래 메이지 천황이 쓰던 연호를 메이지 천황이 사망한 이후에 시호로 올린 것이다.[3] 생전에는 '천황', '천자님', '금상' (今上 곤조[*]) 등으로 불려왔으며[48] 본명 무쓰히토는 외국인과의 접견 때 쓰였다.[48] 또한 궁호 사치노미야는 오시치야의 예를 치른 뒤, 고메이 천황산기 (参議) 고조 다메사다가 올린 일곱 개의 이름 중에서 골라 지은 것이다.[3][48]

또한, 메이지 천황 이전까지는 신유갑자가 되는 해, 또는 상서로운 일이나 재난이 일어난 해에 연호를 고치도록 했었으나[3], 메이지 천황 대에 이르러 한 천황은 한 연호만을 쓰도록 하는 형식이 굳어졌다.[3]

외양 편집

가족 편집

함께 보기 편집

풀이 편집

  1. 간조부교 (勘定奉行)는 막부의 재정과 소송에 관한 일을 맡는 자리였다.
  2. 현재도 일본국 헌법을 비롯한 일본의 법령에는 수도에 관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다이쇼 천황간토 대지진 이후에 내린 칙어들 중에는 "도쿄를 제국의 수도로 한다"는 내용이 있다. 반면, 교토에 있는 어소는 현재까지도 계속 남아 있다.

각주 편집

  1. 《메이지 천황》 하권, 521쪽.
  2. 《메이지 천황》 상권, 9쪽.
  3. 《메이지 천황》 상권, 15쪽.
  4. 《메이지 천황》 상권, 34쪽 ~ 35쪽.
  5. 《메이지 천황》 상권, 36쪽 ~ 43쪽.
  6. 《메이지 천황》 상권, 44쪽 ~ 47쪽.
  7. 《메이지 천황》, 50쪽 ~ 52쪽.
  8. 《메이지 천황》 상권, 48쪽 ~ 49쪽.
  9. 《메이지 천황》 상권, 52쪽 ~ 55쪽.
  10. 《메이지 천황》 상권, 58쪽 ~ 62쪽.
  11. 《메이지 천황》 상권, 70쪽 ~ 82쪽.
  12. 《메이지 천황》 상권, 83쪽 ~ 85쪽.
  13. 《메이지 천황》 상권, 88쪽
  14. 《메이지 천황》 상권, 91쪽
  15. 《메이지 천황》 상권, 157쪽 ~ 159쪽.
  16. 《메이지 천황》 상권, 164쪽 ~ 165쪽.
  17. 《메이지 천황》 상권, 168쪽.
  18. 《메이지 천황》 상권, 169쪽.
  19. 《메이지 천황》 상권, 170쪽 ~ 171쪽.
  20. 《메이지 천황》 상권, 173쪽
  21. 《메이지 천황》 상권, 174쪽 ~ 177쪽.
  22. 《메이지 천황》 상권, 180쪽.
  23. 《메이지 천황》 상권, 181쪽 ~ 184쪽.
  24. 《메이지 천황》 상권, 185쪽 ~ 189쪽.
  25. 《메이지 천황》 상권, 190쪽 ~ 193쪽.
  26. 《메이지 천황》 상권, 194쪽 ~ 202쪽
  27. 《메이지 천황》 상권, 203쪽 ~ 204쪽.
  28. 《메이지 천황》 상권, 205쪽 ~ 207쪽.
  29. 《메이지 천황》 상권, 207쪽.
  30. 《메이지 천황》 상권, 211쪽 ~ 212쪽
  31. 《메이지 천황》 상권, 214쪽 ~ 221쪽.
  32. 《메이지 천황》 상권, 229쪽 ~ 233쪽.
  33. 《메이지 천황》 상권, 235쪽 ~ 236쪽.
  34. 《메이지 천황》 상권, 241쪽 ~ 245쪽.
  35. 《메이지 천황》 상권, 246쪽 ~ 248쪽.
  36. 《메이지 천황》 상권, 265쪽.
  37. 《메이지 천황》 상권, 248쪽 ~ 249쪽.
  38. 《메이지 천황》 상권, 251쪽.
  39. 《메이지 천황》 상권, 254쪽.
  40. 《메이지 천황》 상권, 255쪽.
  41. 《메이지 천황》 상권, 256쪽 ~ 260쪽.
  42. 《메이지 천황》 상권, 261쪽 ~ 267쪽.
  43. 《메이지 천황》상권, 282쪽 ~ 296쪽.
  44. 《메이지 천황》 상권, 309쪽.
  45. 《메이지 천황》 상권, 310쪽 ~ 312쪽.
  46. 《메이지 천황》 상권, 315쪽 ~ 317쪽.
  47. 《메이지 천황》 상권, 318쪽 ~ 324쪽.
  48. 《메이지 천황》 상권, 545쪽.

참고 서적 편집

한국어 서적 편집

  • 도널드 킨 (Donald Keene), 《메이지 천황》 상·하권, ISBN 89-7225-393-X {{isbn}}의 변수 오류: 유효하지 않은 ISBN.ISBN 89-7225-392-1 {{isbn}}의 변수 오류: 유효하지 않은 ISBN.
  • W.G. 비즐리, 장인성 옮김, 《일본 근현대사》 개정 3판, ISBN 89-324-6125-2

일본어 서적 편집

  • 궁내성 임시제실편수국 편수, 《메이지 천황기》 (전 13권, 깃카와코분칸, 1968년 ~ 1977년.)[1]

바깥 고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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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널드 킨이 《메이지 천황》 상·하권을 쓰면서 기초로 한 문헌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