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Dalgial/앎이란 무엇일까

  • 그럴 때가 있었다. 내가 다 맞다. 그게 삐져나오는 기고만장의 시절.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때, 창문 밖에 보이는 향나무를 보고 나는 소나무라고 우겼다. 향나무인 줄 이미 알고 있는 착한 친구에게. 그렇게 향나무는 소나무가 되었고, 《오발탄》 속 충치처럼 나를 찌르는 추억이 되었다. 녀석을 만나 쇠주 한잔 하며 그때 그랬지 하면 풀릴까. 시간과 시절과 삶은 가혹하거나 무심하여 우리는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알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아득하다.
  • 푸릇한 학부 신입생 시절 동아리 첫 학습 중에 간사로 들어온 선배가, 전날밤까지 함께 왁자지껄 퍼마시고 시시껄렁 잘 놀았던 그 선배가 짐짓 진지해진 얼굴로 몇 마디 던진 말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학습 대상 책 무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가물가물하여 머뭇거리던 우리들에게 그는 말했다. “다 아는 것 같지? 머릿속에서 입속에서 니네가 아는, 그 맴도는 것이? 웃기지 마라. 니네 대가리에서 입으로 니네 입에서 타인의 귀로 옮겨가 그놈이 대가리를 주억거릴 때. 그때, 그만큼이 니들이 아는 것이다.” 아. 나는 평생 갈 충격이었는데, 아마 첫 학습의 통과의례였던 듯, 이제 모 신문의 기자가 된 그 선배는 그날의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추억의 밀도는 균질하지 않다.
  • 프랑스 유학 가서 20대에 경제학 박사가 되어 돌아온 동아리 선배를 만나, 학부 건물 앞 벤치에 앉아 나누던 대화 또한 강렬하다. 2학년 봄이었으니, 벌써 군대 갈 놈들은 갔고 곧 갈 동기도 바로 옆에 있었고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대학생의 사회적 책무에 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가 문득 다윈의 《종의 기원》 얘기가 툭 나왔다. 선배는 너무도 당연히 다들 원문 읽은 것을 전제하고 얘기를 했고, 우리는 어리둥절했고, 한참 얘기하다 무지한 우리들의 표정을 발견한 선배가 그랬다. 아주 부드럽게. “무식한 놈들.” 실존주의가 나오면 윤리 시간에 주워들은 케고르니 사르트르니 해 쌓던 우리는 그 뒤로 그분의 책을 읽은 만큼만 그분에 대해 안다고 정확히 얘기한다. 한 권도 읽지 않았으면, 명쾌하다. 그분의 존함은 가끔 들어왔으나, 전혀 모르오.
  • 그렇게 각박함에도 앎이란 즐겁다. 이 풀이 저 꽃이 무얼까 하다 갸였어?! 하는 즐거움부터 희미하던 무언가가 또렷해질 때의 즐거움까지. 이곳저곳에 모르는 것이 가득하며, 기웃거리고 궁리하는 즐거움 또한 크다. 대학원에 막 들어가 아직 꽃 피기 전이라 훈풍이 덜하던 어느 밤, 몇 차의 술자리가 끝나고 대중교통편이 끊겨서 근처에 있는, 박사과정을 수료한 선배네 집에 가게 되었다. 들고 간 검정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뭇 클 정도로 집이 휑했다. 이사 들어갈 집의 모습처럼 세간이 하나도 없었던 것. 부스스 웃으며, 그 사람이 나갔어. 논문은 잘 안 써지고, 써봐야 자리가 잡힐지 암담하고, 논문 쓰느라 호구지책은 없고, 이혼까지. 그 스산한 자리 끝에 왜 공부하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선배의 대답. “재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