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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음악가편집

독일편집

쉬츠편집

Heinrich Sch tz(1585-1672) 바흐 이전의 독일이 낳은 최대의 작곡가. 폭넓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기초로 독일의 전통적인 폴리포니(多聲音樂)에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극적이며 표출적인 양식을 채택하여 많은 감동적인 교회음악을 작곡하였다. 바흐로부터 1백년 전인 1585년에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카셀의 헤센 변경의 영주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1609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유학하여 대작곡가인 조반니 가브리엘리에게 사사, 새로운 바로크 양식을 습득하였다. 귀국 후에는 카셀의 궁정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617년에는 작센 선거후(選擧候)의 궁정악장으로서 드레스덴에 초빙되어, 일생의 대부분을 이 지방에서 보냈다. <부활제 오라토리오>, 종교합창곡집 <칸초네스 사크레>(1624) 등으로 점차 명성을 떨쳤으며, 1628년에는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몬테베르디에게서 극음악의 양식을 배웠다. <심포니 사크레>(1629)나 <크라이네 가이스트리헤 콘체르테>(1636-1639)는 그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후 <종교합창곡집>(1648)으로부터 만년의 <마태 수난곡>(1666)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작품을 계속 작곡하여 독일교회음악의 아버지가 되었고, 1672년 87세의 고령으로 드레스덴에서 별세하였다.

북스테후데편집

Dietrich Buxtehude(1637-1707) 바로크 시대에 속하는 북부독일의 작곡가이며 대 오르가니스트이다. 태어난 곳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북유럽 출신이다. 1668년 이래 북부 독일의 자유도시 뤼베크에서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였다. 이 교회의 성능이 좋은 큰 오르간으로, 그는 환상에 가득찬 장려한 오르간곡을 작곡하였고, 그 양식은 젊은 바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또 일종의 교회연주회인 '저녁의 음악'을 번성하게 하여. 이것이 뤼베크시의 명물이 되었다. 작품은 오르간곡 외에 다수의 칸타타와 미사곡이 있으며, 이것들은 형식의 다양성과 내면적 정서의 깊이에 있어 중기 바로크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을 대표하고 있다.

텔레만편집

Georg Philipp Telemann(1681-1767) 후기 바로크 시대에 속하는 독일의 작곡가. 그의 작풍은 바흐보다 새롭고, 생전에는 바흐보다 더 명성을 떨쳤다. 놀랄 만한 속필이며, 작품은 교회 칸타타(1400 이상), 오라토리오와 수난곡(약 100), 실내악(500 이상), 관현악 모음곡(약 130)을 비롯하여 총수 4000곡 가까이에 이른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폴란드 등의 양식을 교묘하게 소화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특히 프랑스풍인 우아경묘(優雅輕妙)한 표현에 뛰어났으며, 그 신선한 매력은 20세기 이후에 특히 재평가되고 있다. 1681년 막데부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이미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라이프치히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배운 뒤 1705년부터 조라우의 궁정악장으로서 프랑스와 폴란드의 음악을 연구하였고, 1706년에는 바흐의 생지 아이제나흐의 궁정으로 초청되었다. 이 무렵 바흐와 서로 알게 되었으며, 1714년에는 바흐의 차남 대부(代父)가 되었다. 1716년에 프랑크푸르트 음악감독이 되었고, 1721년부터는 북독일의 대도시 함부르크의 음악감독에 취임하고, 1737년에는 파리로 나와 국제적인 명성을 확립하였다. 함부르크에서는 5대교회의 예배음악을 비롯하여, 시의 여러 행사를 위해 정력적인 작곡을 계속하였고,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주최하여 근대적인 청중의 육성에도 진력하였다. 1767년, 86세의 고령으로 최대의 영예에 싸여서 세상을 떠났다.

바흐편집

헨델편집

(영국편 참조)

바흐(필립 에마누엘)편집

Carl Philipp Emanuel Bach(1714-1788) 제바스티안 바흐의 차남이며 바로크 시대와 빈 고전파의 중간에 위치하는 독일 작곡가이다. 모든 분야에 걸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자기 자신이 탁월한 클라비어의 연주가였으므로 특히 클라비어 음악에 뛰어난 것이 많고, 고전 소나타 형식의 기초를 확립한 점에서 역사상 중요한 존재로 되어 있다. 그의 작풍은 로코코풍의 우아함과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을 아울러 지니고, 하이든이나 베토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 클라비어 주자로서 일하였으며, 1767년에는 텔레만의 후임으로서 함부르크시의 음악감독이 되고, '대바흐'라고 격찬받으면서, 그 곳에서 73세의 일생을 끝마쳤다. 지금은 '베를린의 바흐' 또는 '함부르크의 바흐'라고 불리고 있다.

바흐(크리스티안)편집

(영국편 참조)

베토벤편집

Ludwig van Beethoven(1770-1827) 베토벤은 음악사상 드물게 보는 뛰어난 작곡가로서, 56세의 일생 동안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그뿐 아니라 매우 강의(剛毅)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작곡가로서 치명적이라고도 할 귓병에 걸리는 등 수많은 곤경에 부딪히면서도 한번도 그러한 장애에 굽히는 일 없이 음악의 불꽃을 높이 불태우는 것을 지상(至上)의 사명으로 확신하고, 많은 걸작을 세상에 내보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다. 베토벤이 세례를 받은 날은 1770년 12월 17일로 되어 있으나, 출생한 정확한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베토벤가의 집안은 네덜란드 가계(家系)이며, 조부 루드비히가 본으로 이주하여 독일인을 아내로 맞고, 베이스 가수로서 본의 궁정에서 일하는 한편 주류 판매상도 경영하였는데, 그 때문에 조모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만년에는 쾰른의 수녀원에 격리되었다. 그리고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도 테너 가수로서 본의 궁정에서 일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결과가 되었다. 또한 베토벤 자신도 훗날 귓병으로 고생하였는데, 이것은 조상 때부터의 주독(酒毒)의 유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베토벤의 소년시절은 가혹한 음악공부로 지새는 나날이었다. 그 무렵,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가 천재소년으로서 연주여행을 하여 화려한 성공을 하고 있었다. 이 선례를 본 베토벤의 아버지도 자기의 아들을 소년연주가로 육성하고자 꾀하였던 것이다. 베토벤도 40세경까지 자기의 나이를 2살이나 적게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천재소년으로서 연주시켰을 때에 아들의 나이를 2살 어리게 속였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은 이미 7세 때에 쾰른에서 첫 무대에 섰고, 아울러 음악의 기초공부에 정진하였다. 소년시절의 스승 중에서는, 1778년부터 4년간 취임하고 있었던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반 덴 에덴과 1781년부터 그의 후임으로서 본에 온 네페의 두 사람이 가장 영향력이 강하였다. 1787년 봄, 16세가 된 베토벤은 빈으로 가서 모차르트를 방문하고, 피아노로 훌륭한 즉흥연주를 행하였다. 이에 놀란 모차르트가 "여러분, 이 사나이를 기억해 두십시오. 언젠가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병환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본의 선제후(選帝侯)의 요리장(料理長) 딸로서, 한번 결혼했었으나 젊어서 미망인이 되고 21세 때 베토벤의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마음씨 고운 어머니였으나 베토벤이 빈으로부터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별세하였다. 그 때문에 베토벤은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주벽이 심한 아버지 대신에 생계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어, 1789년에 본의 궁정 관현악단이 국민가극장의 관현악단으로 개편되었을 때에 비올라 주자로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다시 본에서 5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 시기의 베토벤에게 있어서 안식처는 브로이닝가(家)였다. 그는 이 집의 딸 엘레오놀라의 피아노 선생으로서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주인 헬레네는 본 궁정의 고문서관(古文書官)의 미망인으로서 교양이 높은 부인이며, 베토벤을 친자식같이 사랑하여 부족했던 교양을 몸에 지니게끔 마음을 썼다. 또 베토벤 자신도 교양의 부족을 느끼고, 1789년부터는 본대학의 철학과 청강생이 되어, 혁명적인 자유사상 속에 청춘의 기풍을 실현하였다. 이윽고 베토벤은 1792년 11월에 다시 한 번 빈으로 가게 되었다. 이해의 여름에는 런던으로부터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에 들른 하이든에게 격려되어, 빈을 영주(永住)의 고장으로 정하고 자기를 시험할 결심을 굳혔다. 빈으로 나온 베토벤은 바로 하이든의 제자가 되었다. 동시에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 대위법을, 그리고 살리에르에게 성악 작곡법을 배움으로써 기초에서부터 음악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하였다. 차츰 친구들도 얻고, 빈에 사는 귀족 저택의 음악살롱에 출입하게 되었는데, 특히 피아노의 즉흥연주를 매우 잘한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또 작곡가로서의 이름도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빈으로 온 지 2년쯤 되는 1795년 3월에 베토벤은 처음으로 피아니스트로서 부르크 극장의 자선연주회에 출연하여, 자작(自作) <피아노 협주곡 제2번>(내림나장조, 1795)을 대중 앞에서 연주하였다. 같은 해에, 빈의 유명한 음악출판상(商) 아르타리아사(社)로부터 <3개의 피아노 트리오 작품> 1이 출판되었다. 이리하여 베토벤은 24세 때 비로소 빈에서 피아니스트 및 작곡가로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베토벤의 관심을 가장 강하게 끈 것은 피아노였다. 1795년 이후의 5년간, 베토벤의 작곡은 피아노에 한정되어 있으며, 제1번부터 제11번까지의 피아노 소나타(제8번 <비창> 작품13이 유명), 거기에다 제1번부터 제3번까지의 피아노 협주곡이 계속해서 작곡되었다. 그리고 점차로 베토벤의 관심은 실내악과 교향악에도 쏠리게 되었다. 그 무렵 리히노프스키 후작의 저택에서 슈판치히가 주재하는 현악 4중주가 연주되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 모임을 통하여 실내악과 친근해지게 되었고, 6곡의 현악 4중주곡(작품18, 1800)이 작곡되었다. 같은 해에는 <제1교향곡>도 완성하고, 이같이 하여 29세의 베토벤은 명실공히 작곡가로서 독립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무렵, 베토벤은 치명적인 귓병에 괴로움을 받기 시작하였다. 징후(徵候)가 처음 나타난 것은 1798년경이었지만, 1801년에는 귀울림(耳鳴)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되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마저 고통스런 일이 되어서 차츰 사람 대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1802년 여름에는 빈의 교외 하일리겐슈타트에 칩거하였고, 10월 6일에는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遺書)'를 썼다. 귓병으로 절망하여 한때는 자살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장하게도 다시 일어섰다. <제2교향곡>을 완성하고, 이어서 영웅 나폴레옹을 찬양한 거대한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1804)의 작곡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분격한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한 헌사(獻辭)를 찢어버리고 단순히 "영웅교향곡,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의 추억을 위하여"라고 써붙였다. '불멸의 애인에게의 편지'라고 불리고 있는 1통의 편지가 남아 있지만, 이 편지에는 일부인(日附印)인이 없고, 또 누구에게 썼는지도 알 수 없다. 이 편지를 받아야 할 불멸의 애인이 과연 누구였는지에 대해 옛날부터 많은 추측이 나돌았으나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799년에 부른스비크 백작가(家)의 두 딸이 베토벤의 제자가되었다. 이 가운데 큰딸인 테레제와는 제4교향곡이 완성되는 1806년에 약혼하게 되고, 1800년부터는 테레제의 4촌동생인 백작영양(伯爵令孃) 줄리에타 깃채르디도 제자가 되었다. 베토벤은 한때 줄리에타와의 결혼을 생각하였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로 단념하고 대신에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올림다단조) 작품 27의2(1801)를 줄리에타에게 헌정하였다. 한편 나중에 약혼한 테레제에게는 <피아노 소나타 제24번>(올림바장조, 작품78, 1809)을 바쳤다. 그러나 테레제와의 약혼도 1810년에는 이유 불명인 채 취소되었다. 이 밖에 불멸의 애인 후보로 거론되었던 여성이 몇 사람 또 있다. 그러나 결국 '불멸의 애인'이 누구였는지는 오늘날에도 알지 못한 채로 있다. 이윽고 베토벤에게는 노도와 같은 명작의 시기가 찾아왔다. 1804년, <에로이카 교향곡>이 완성된 해에 파리의 피아노 제작자 에라르로부터 1대의 피아노가 베토벤에게 기증되었다. 그 때까지의 피아노보다 넓은 음넓이를 갖는 이 에라르 피아노를 얻고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제21번 <발트슈타인>(다장조, 작품53, 1804)을 작곡하였다. 같은 1804년, 베토벤은 가극 <피델리오>의 작곡에 착수하고, 다음해 5월에 이를 완성하였다. 이는 그의 일생에서 오직 하나의 가극이었으나, 그 뒤 두 번에 걸쳐서 개작(改作)하고 그 때마다 새로운 서곡을 써넣었다. <피델리오>의 초연은 1805년 11월 안 데아 빈 극장에서 있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곧 개작을 시작하여 <레오놀레 서곡 제3번>을 붙여 1806년에 재연되었으나, 이 때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베토벤이 두 번째로 개작의 붓을 든 것은 1814년의 일로써, 이 때 2막 3장으로 축소되어 <피델리오 서곡>을 붙여서 상연하여 비로소 성공하였다. 그동안에도 베토벤의 창작은 다방면에 걸쳐서 추진되었다. 1805년에는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열정>(바단조, 작품57)과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크로이첼>(가장조, 작품47)이 작곡되었으며, 1806년에 <피아노 협주곡 제4번>(사장조, 작품58), <바이올린 협주곡>(라장조, 작품61), 거기에다 현악 4중주곡 <라즈모프스키> 3곡(작품59) 등의 명작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곡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불안했던 프랑스군의 빈 점령시대에 작곡되었던 것이다. 1806년 5월에 베토벤은 빈을 떠나 부다페스트로 가서, 교외에 있는 부른스비크 백작의 저택에 머물렀다. 테레제와 약혼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테레제와의 조용한 애정 교류는 베토벤의 마음에 평정(平靜)을 가져다 주고, 평온한 미광(微光)에 빛나는 업적을 이루게 해 주었다. 교향곡 제4번(내림나장조, 1806)과 비통한 정서를 찬양한 <코리올란> 서곡, 강렬한 응집(凝集)을 보이는 교향곡 제5번 <운명>(다단조, 1808), 하일리겐슈타트의 숲을 산책하면서 구상하였다고 하는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교향곡 제6번 <전원(田園)>(바장조, 1808), 고금(古今)을 통하여 유례 없는 방대한 내용을 지닌 첼로 소나타 제3번(가장조, 작품 69, 1808), 영혼의 승화를 더듬는 미증유의 웅장함을 지닌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내림마장조, 1809) 등의 대작이 계속 완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고전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창작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결코 격동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는 일을 하지 않고, 모든 고뇌도 환희도 마음속 깊이 가라앉히고 정화(淨化)시켜, 그것을 고전적 균형미의 세계로 승화시켰다. 더욱이 거기로부터는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불꽃이 튄다. 이리하여 베토벤의 음악은 고전적 완성 속에 정서(整序)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층 감동의 노도가 되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끌고 들어간다. 1808년 12월, 베토벤은 오래간만에 자기 작품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제5>와 <6>의 2개의 교향곡, 거기에다 피아노 협주곡 등을 초연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졸렬한 연주 때문에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완전히 빈이 싫어진 베토벤은 카셀의 궁정악장에 취임 할 결심을 하였으나, 루돌프 대공(大公), 로프로비츠 후작(侯爵), 킨스키 후작(侯爵) 등 세 사람의 빈 귀족이 연금을 보내어 생활보장을 통보해 옴으로써 베토벤을 빈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군이 다시금 빈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화폐 가치는 하락하고, 루돌프 대공을 제외하고는 연금이 끊기고 말았다. 1809년에는 나폴레옹군이 빈에 접근하였기 때문에, 황제를 비롯하여 유명한 귀족들은 난을 피하여 빈에서 탈출을 하였다. 이 때에 작곡된 것이 루돌프 대공과의 이별과 귀환을 테마로 한 피아노 소나타 제26번 <고별>(내림마장조, 1810)이다. 베토벤은 이 루돌프 대공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대공 트리오>라고 통칭되는 피아노 트리오 제7번(내림마장조, 1811)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된 데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1810년에 베토벤은 유명한 서곡을 포함하는 극음악 <에그몬 트>를 작곡하였으나, 그 해에 테레제 폰 부른스 비크와의 약혼을 취소하고, 당시 빈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17세 소녀 테레제 폰 마르파티와 결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베토벤은 39세였다. 결국 이 결혼은 실행되지 않은 채 끝나고 말았다. 1811년의 여름, 베토벤은 건강이 좋지 않아, 보헤미아의 온천지 테프리츠로 요양하러 떠났다. 이때 친형제처럼 이 거장을 보살핀 것은 베를린의 여류성악가 아마리에 제발트였다. 그녀는 베토벤의 신변에 등장한 최후의 여성이었다. 한편, 나폴레옹군은 1812년에 모스크바 원정을 시도했다가 패퇴하고, 1813년에는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비토리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빈에서도 전승의 축하행사가 있었으며, 이 해의 말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가장조, 1812)?교향곡 제8번(바장조, 1812)이 초연되어 대호평을 받았다. 베토벤의 인기가 상승한 것을 이용하여 가극 <피델리오>의 제3회의 상연이 있은 것은 1814년 5월이었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되고, 이 해의 9월에는 연합국이 영토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유명한 빈회의가 열렸다. 빈이 국제적인 각광을 받은 이러한 시기에 베토벤의 이름은 빈의 영광으로 구가되었고, 일생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음에는 죽은 동생 카를의 아들에 대한 심로(心勞)가 거장의 마음을 피로하게 하였다. 큰동생인 카를은 1816년에 병사하였는데, 그 아내를 정숙치 못한 여인이라고 믿고 있던 베토벤은 조카의 후견인으로서 조카을 맡아 양육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동생의 미망인과의 사이에 말썽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조카인 카를도 타고난 유약한 성격으로 해서 만년의 베토벤을 계속 괴롭혔던 것이다. 1817년 12월, 베토벤의 47세의 생일을 기념하여, 런던의 피아노 제작자 존 브로드우드로부터 새로운 피아노가 기증되었다. 때마침 만년의 피아노곡을 작곡중이던 베토벤은 이 새로운 브로드우드를 얻어, 일련의 웅장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만년에 5개의 불후의 소나타가 남게 되었다. 피아노 소나타 제28번(가장조, 작품 101, 1816), 제29번 <해머클라비어>(내림나장조, 작품 106, 1818), 제30번(마장조, 작품 109, 1820), 제31번(내림가장조, 작품 110, 1821), 제32번(다단조, 작품 12, 1822)의 5곡이 그것이다. 1818년, 경애하는 루돌프 대공이 오르뮈츠의 대주교(大主敎)로 임명되었다. 2년 후에 거행된 서임식(敍任式)을 위해서 베토벤은 큰 미사곡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2년의 작곡 예정은 4년으로 늘었고, <장엄미사곡>의 전곡이 완성된 것은 1822년이었다. 1822년에는 런던의 필하모닉 협회로부터 베토벤에게 교향곡의 작곡 의뢰가 왔다. 이리하여 3년간이 최후의 교향곡 작곡에 소비되어, 1824년에 교향곡 제9번 <합창>(라단조)이 완성되었다. 그해 5월에는 제9교향곡의 초연이 빈에서 열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회당(會堂)이 떠나갈 듯한 청중의 환호도 이미 베토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고, 다만 눈으로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1824년에 옛 친구인 슈판치히가 러시아로부터 빈으로 돌아와 다시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였으므로 이에 자극되어 베토벤은 다신 현악 4중주곡의 작곡에 흥미를 가졌다. 그 결과 만년에 5곡의 현악 4중주곡이 계속해서 완성된 것이다. 즉 현악 4중주곡 제12번(내림마장조, 작품127, 1825), 제13번(내림나장조, 작품130, 1826), 제14번(올림다단조, 작품131, 1826), 제15번(가단조, 작품132, 1825), 제16번(바장조, 작품135, 1826)의 5곡이다.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일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 무렵부터 장(腸) 질환은 악화되었으며, 몇 번이고 수술을 했으나 조금도 호전(好戰)되지 않고, 점점 쇠약해질 뿐이었다. 1827년 3월 26일 저녁, 심한 뇌우가 빈을 덮쳤다. 이 때 병상의 베토벤은 오른손의 주먹을 꼭 쥐어 높이 쳐들고, 하늘의 한구석을 쏘아보며 숨졌다. 마지막 말은, "제군, 갈채하게, 희극은 끝났네"라는 라틴어였다.

교향곡 제3번 영웅편집

交響曲第三番<英雄> 베토벤이 작곡한 내림마장조, 작품 55(1804)으로, 이 곡의 작곡 동기는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찬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작곡한 뒤에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였으므로,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한 베토벤은 그 곡에 다만 '한 사람의 위대한 추억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전체는 4악장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유명한 제2악장은 장송행진곡으로 되어 있다. 작곡된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사망하였을 때, 베토벤은 이 영웅의 죽음을 미리 알고, 이 장송행진곡으로 나타냈던 것이라고 말하였다.

교향곡 제5번 운명편집

交響曲第五番<運命> 베토벤 작곡 다단조, 작품 67(1808). 이 곡은 제1악장 처음에 나오는 주제로 특히 유명하다. 그 주제는 4개의 음표로 된 것으로, "이와 같이 운명은 문을 두드린다"고 하는 데서 <운명>교향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작곡자 자신이 그러한 제명을 붙인 것은 아니고, 친구인 리이스가 나중에 그러한 것을 말하였음에 불과하다. 이 4개의 음표로 되는 악구(樂句)는 베토벤이 빈의 공원 플라타를 산책하고 있을 때, 박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착상한 것이라 한다. 1806년에 테레제 브룬스뷔크 백작영양과 약혼하였으나, 그 약혼은 1년 후에 깨지고 말았다. 이 교향곡이 작곡된 것은 마침 그 무렵이었으며, 약혼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맛보고 있던 시대의 작곡이다. 4악장으로 되는 당당한 작품이며, 베토벤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애호되고 있다.

교향곡 제6번 전원편집

交響曲第六番<田園> 베토벤 작곡 바장조, 작품 68(1808). 하일리겐슈타트 교외를 산책하고 있을 때 베토벤은 친구에게 말하였다. "내가 시냇가의 제방풍경을 작곡한 것은 여기입니다. 메추라기, 꾀꼬리, 뻐꾹새 등이 나와 함께 작곡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음을 그대로 살리고자 한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자연에 접해서 얻은 인상을 음악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제1악장은 '전원에 가서 품은 명랑한 감정의 환기(喚起), 제2악장은 '시냇가의 풍경', 제3악장은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 종악장은 '목양자(牧羊者)의 노래, 비바람 뒤의 즐거운 감사에 찬 감정'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교향곡 제9번 합창편집

交響曲第九番<合唱> 베토벤 작곡 라단조, 작품 125(1824). 이 곡은 실러의 '환희에의 송가(頌歌)'가 종말합창으로 되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합창교향곡(코랄 심포니)이라고 한다. 베토벤이 이 시에 작곡을 하려고 생각한 것은 20세경부터이며, 그것이 이 곡에 의해 실현된 것은 54세 때였다. 이 위대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실로 30여 년의 세월을 요했던 것이다. 종악장은 라단조로 시작되지만, 알레그로 앗사이의 라장조로 바뀌고,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로 연주하는 유명한 으뜸멜로디가 나온다. 그리고 바리톤 "오오 친구여, 이 같은 가락으로가 아니라, 좀더 즐거운 가락을"의 독창에 이어서 장대한 합창으로 되어 있다.

서곡 에그몬트편집

序曲 <Egmond> 베토벤 작곡 작품 84 (1810). 괴테의 극 <에그몬트>가 빈에서 상연될 때 4개의 간주곡(間奏曲), 크레루헨의 2개의 노래, 기타와 합쳐서 작곡한 것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 서곡만이 유명하게 되었다. 벨기에의 귀족정치가 에그몬트 백작(1512-1568)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괴테의 극인데, 이 서곡은 박해에 굽히지 않는 에그몬트의 힘찬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서곡 레오노레편집

序曲 <Leonore> 베토벤 작곡 작품 72a 및 작품 138(1805-1825). 베토벤의 가극 <피델리오>에는 4종의 서곡이 있는데, 1805년의 상연 때 사용된 것이 서곡 <레오노레> 제2번, 그 이듬해에 나온 것이 제3번이다. 그 후 1828년의 상연에 즈음해서 또 한 곡이 작곡되었으며, 그것이 제1번으로서 출판되었다. 따라서 현재 <레오노레> 제1, 제2, 제3이라고 불리는 것은 제2, 제3, 제1의 순으로 작곡되었다. 거기에다 또하나, 제목명을 <피델리오>로 한 다음의 서곡이 있으며, 연주회용으로 가장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제3의 서곡이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편집

piano 協奏曲第五番<皇帝>베토벤 작곡 내림마장조, 작품73(1809). 베토벤의 5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가장 원숙한 작품이 이것이다. 특히 영국 방면에서는 <황제 협주곡>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런 종류의 곡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황제와 같이 다른 곡 위에 군림한다는 뜻이며, 베토벤이 붙인 제목은 아니다.

피아노 소나타 제8번 비창편집

piano sonata 第八番<悲愴>베토벤 작곡 다단조, 작품13(1799). <비창>이라는 제명은 베토벤 자신이 붙였지만, 비창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당시의 소나타에 잘 사용된 스케르초 악장이 이 작품에는 없다. 그런 점이 다소 비창이란 이름에 어울린다. 아직 30세가 되지 않았을 때의 작품이며,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환영받고 있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편집

piano sonata 第十四番<月光>베토벤 작곡 올림다단조, 작품27(1809). 작품27에는 2곡의 '환상곡풍 소나타'가 있는데, 그 제2의 곡을 보통 <월광>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작곡자 자신이 붙인 제명은 아니며, 당시의 문필가 레일시타프가 붙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곡의 아다지오 악장은 베토벤이 조이메라 하는 2류시인의 <기도하는 소녀>라고 제목 붙인 시에 감격하여 작곡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베토벤의 애인이었던 줄리에타 기차르디 백작 영양에게 바쳐진 것으로, 이 곡은 그 연애시대의 정열로써 작곡했다고도 추측되고 있다.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열정편집

piano sonata 第二十三番<熱情>베토벤 작곡 바단조, 작품57(1806). 베토벤의 소나타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것이 이 곡이며, <열정>(아파쇼나타)이라고 하는 말은 함부르크의 출판상(商) 크란츠가 훗날 붙인 것이며, 작곡자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형용은 악곡의 내용을 그야말로 잘 나타내고 있다. 비바람치는 암흑의 밤이라고도 할 만하고, 또 불안과 고뇌의 외침소리 같기도 하다. 베토벤 자신도 이 곡을 '최대의 피아노 소나타'라고 평하여, 즐겨 연주하였다.

바이올린 협주곡편집

violin 協奏曲 베토벤 작곡 라장조, 작품61(1806). 베토벤이 작곡한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서, 죽마고우 스테판 폰 블로이닝에게 바쳤다. 19세기 이래 뷰탄, 요아힘을 비롯해서 명연주가들이 즐겨 연주했던 곡이다.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편집

violin sonata Kreutzer 베토벤 작곡 가장조, 작품47(1803). 베토벤의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9번째에 해당하며, 파리에서 알려져 있던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크로이처에게 바쳐진 것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이 곡을 소설의 제명으로 한 데서 한층 더 유명해졌다.

현악 4중주곡 라주모프스키편집

絃樂四重奏曲 Rasoumovsky베토벤 작곡 작품59(1806). 작품59에는 바장조, 마단조, 다장조의 3곡의 현악주곡이 있으며, 빈 주재의 러시아 대사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주문에 의해 작곡하였으므로 그 이름이 제명으로 되었으며, 특히 마장조의 피날레와 마단조의 트리오에서는 러시아 민요를 주제로 하고 있다.

피델리오편집

Fidelio 베토벤 작곡(1805), 존 라이트너의 대본으로 된 2막의 오페라. 빈 극장의 주문에 의하여 작곡하였으며, 1805년에 초연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나폴레옹군이 빈을 점령했을 때였으므로 흥행은 실패로 끝났다. 초연 때는 3막이었으나, 다음해에 2막짜리로 고쳐서 상연한 것이 오늘날의 것이다. 정절(貞節)한 부인 레오노레가 자기의 남편 플로레스탄을 옥중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남장을 하고 피델리오라는 이름으로 변명(變名)한다는 이야기로서, 서곡에도 레오노레라는 것이 있고, 또한 피델리오가 있음은 그 때문이다.

크로이처편집

Conradin Kreutzer(1780-1849) 19세기의 독일 민족적 가극의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배운 뒤 음악으로 전향했으며, 후에는 빈에서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서 대위법을 배우고,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슈투트가르트를 비롯하여 각지의 극장에서 지휘자로서 활약하고 호평을 받았다. <그라나다의 야영>(1834), <방탕자>(1836) 외에 약 30편의 가극을 작곡하였다.

베버편집

Carl Maria von Weber(1786-1826) 독일 낭만파(浪漫派) 초기의 작곡가이다. 1786년 11월 18일 올덴부르크의 작은 도시 오이테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기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극장감독 겸 지휘자로 근무하였으나 베버가 출생한 다음해부터는 극단을 만들어 순회를 시작하였다. 베버가 후년에 독일 낭만파의 국민가극의 확립자로 되기 위한 조건은 이와 같이 어릴 때부터 특수한 생활 속에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10세 때에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고, 12세 때 합창단에 들어가서 성악을 배웠다. 또 잘츠부르크에서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에게서 대위법을 배우고 작곡을 시작하였다. 1799년에는 최초의 가극 <사랑과 술의 힘>을 작곡하였고, 이 무렵에는 또한 피아니스트로서도 활약하였다. 1800년 프라이부르크로 옮겨 살며 가극 <숲의 딸>을 완성, 다시 잘츠부르크로 가서 가극 <페이터 슈몰과 그의 이웃들>을 완성하고 다시금 전전하며 각지를 돌아다녔다. 1810년 가극 <실바나>를 발표하였는데, 그 초연 때의 주연 가수였던 카롤리네 플란트와는 7년 후에 결혼하였다. 1811년 뮌헨에서 가극 <아브 하산>의 초연이 대성공을 거두고, 저명한 클라리넷 주자 베르만을 알 기회를 얻었고, 이후 클라리넷곡을 많이 작곡했다. 1813년부터 3년 반 동안은 프라하 가극장의 지휘자로서 일했다. 워털루에서의 나폴레옹군의 패배를 다룬 칸타타 <전쟁과 승리>를 발표하여 크게 호평받은 것도 이 때의 일이다. 1817년, 드레스덴의 궁정관현악단 지휘자에 취임하였다. 당시 드레스덴에는 이탈리아 가극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었지만, 베버의 독일국민적 가극 완성에 대한 의지는 점점 더 강하고, 1대(一代)의 명작 <마탄(魔彈)의 사수(射手)>에 착수, 1820년에 완성하였다. 이 가곡은 1821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그 전년에는 애처를 위해 피아노곡 <무도(舞蹈)에의 권 유>를, 다음해에는 <콘체르트쉬튀크>(피아노 소협주곡)를 완성하고 있다. 1823년에는 가극 <오이리안테>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빈에서 초연되어, 맨 처음에는 대호평이었으나 대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시적인 호평으로 끝났다. 이 무렵부터 베버의 결핵은 악화하였다. 1825년, 런던의 코벤트가든 가극장으로부터의 신작 의뢰에 응해 가극 <오베론>에 착수, 다음해에 완성하였다. 이것을 지휘하기 위하여 신병을 무릅쓰고 런던으로 여행하였으므로 병의 상태는 급작스레 악화하고, 그해의 6월 5일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일단 성(聖) 메리 교회에 안장되었으나, 1844년 바그너의 노력에 의해서 드레스덴으로 옮겨졌다. 작품으로서는 가극 <마탄의 사수>가 가장 중요하며, 이것은 전형적인 독일 낭만파의 오페라라고도 할 수 있다. 독일의 자연을 무대로 자연에의 동경을 묘사하고 있는 점, 또 민요로부터 시작된 단순한 선율이라든가 화성을 사용하고 있는 점, 합창이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점 등, 베버의 작품은 낭만파음악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베버는 역사적으로도 본질적으로도 오페라 작곡가로서 중요하며, 그 밖의 작품(<피아노 소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무도에의 권유> 등)은 연주 기교의 화려함이라는 점에서 뒤의 낭만파 피아노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탄의 사수편집

魔彈-射手 베버 작곡 작품 77(1820). 독일 초기낭만파 가극의 대표적 작품이며, 이의 성공에 따라 독일 국민가극이 번성하게 되고 큰 영향을 미쳤다. 프리드리히 킨트의 대본에 의한 3막 가극으로서, 이야기는 보헤미아의 삼림지대에서 전개되는 사냥꾼의 로맨스이다. 사냥꾼 막스는 아가테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내일의 사격경기에 우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마와 거래하여 7개의 마탄을 얻은 그는 그것으로 우승하지만, 7개째의 탄이 아가테에게 맞고 만다. 은자가 나타나 그의 죄를 용서하고 아가테도 소생한다. 초연은 1821년 6월 18일 베를린 왕립극장에서 있었다. 서곡은 모든 가극 서곡 중에서도 걸작으로 알려져, 단독으로 연주되는 일도 많다.

무도에의 권유편집

舞蹈-勸誘 베버 작곡 내림라(D)장조, 작품65(1819). 원래는 피아노 독주용의 곡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베를리오즈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피아노곡으로서는 베버 특유의 화려한 기교가 잘 발휘되고 있다. 음악은 한 사람의 신사가 귀부인을 무도회로 권유하는 조용한 서주(序奏)로 시작되고, 이윽고 화려한 무도가 펼쳐진다. 결미는 신사의 감사의 말, 대답, 퇴장으로 된다.

마르슈너편집

Heinrich Marschner(1795-1861) 19세기 전반(前半)의 중요한 독일 오페라 작곡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시히트에게 사사하여 작곡을 공부, 1817년 빈으로 가서 베토벤과 만났다. 그 뒤에 프레스부르크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나, 1820년 베버로부터 드레스덴에 초빙되어, 1823년 오페라 지휘자가 되었다. 베버 사망 후, 라이프치히 극장의 악장에 취임, 1829년 오페라 <성당기사(聖堂騎士)와 유대여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1831년 하노버의 궁정악장에 임명되고, 28년 동안 이 지위에 있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흡혈귀(吸血鬼)>(1828), <한스 하이링크>(1833)가 있다.

레베편집

Johann Carl Gottfried Laewe(1796-1869) 19세기 독일 서사가곡(발라드) 완성자. 1813년부터 할레의 징그아카데미에 들어가, 그 뒤 대학에서 신학을 배웠다. 후에 성(聖) 야콥 교회의 합창장으로 되고, 1820년에는 시테친의 김나지움 교사가 되었다. 그는 교수와 지휘활동에 중점을 두고, 다망한 음악생활을 보냈다. 각지의 음악제에 출연하기도 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하기도 하였다. 레베의 가곡은 그리 인기가 높지는 않았으나 <새잡이 하인리히>, <오이겐 왕자>, <시인 톰> 등의 발라드는 오늘날에도 자주 노래되고 있다.

로르칭편집

Albert Lortzing(1801-1851) 낭만파 초기의 독일 가극작곡가. 1824년, 쾰른에서 최초의 오페라를 상연하였고, 그 뒤 라이프치히 가극장에서 제1테너 가수로 있으면서 많은 가극을 작곡하였고, 이어서 지휘자로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자기 작품을 상연하였다. <러시아 황제와 배목수>(1837), <밀렵자>(1842), <운디네>(1847) 등은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민중적 가극으로서 애호받고 있다.

멘델스존편집

Felix Mendelssohn[Bartholdy](1809-1847) 1809년 2월 3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인이며 유복한 은행가였므로, 그는 어릴 때부터 충분한 음악교육을 받아 재능을 발휘하였다. 3세 때 베를린으로 이주, 당시의 대작곡가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한여름밤의 꿈>의 서곡이 쓰인 것은 1826년 18세 때이다. 20세 때에는 세상에서 잊혀져 있었던 바흐의 명곡 <마태 수난곡>을 상연함으로써 19세기에서의 바흐 재평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영국이나 이탈리아 등 각지로 여행을 하였는데, 이 무렵의 작품에는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1829)와 서곡 <핑갈의 동굴>(1832),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1833) 등이 있다. 1833년에는 뒤셀도르프 시(市)의 지휘자가 되었고, 또 1835년에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있으면서 이 악단의 수준을 높였다. 다음해 프랑스 목사의 딸 세실 잔루노와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보냈다. 이해의 8월엔 영국을 방문하였다. 그 뒤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궁정지휘자 칭호를 받고, 다시금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창립하는 등 활약하였다. 1844년에는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완성하였고, 1846년에는 오라토리오 <에리아>를 작곡하였는데, 원래부터 허약했던 멘델스존은 1847년 11월 4일, 38세의 젊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멘델스존은 젊었을 때부터 완성된 작품을 썼으며,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는 음악을 아무 어려움 없이 작곡하였다. 그는 낭만파에 속하는 작곡가이지만, 고전파적 절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고전주의적 낭만파 작곡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 만큼 사람의 혼에 파고드는 듯한 감정의 깊이는 없다. 대표작은 <한여름밤의 꿈>, <핑갈의 동굴> 등의 서곡이나 관현악곡, 4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및 피아노 협주곡, 또 피아노 소곡집 <무언가집>(봄의 노래, 베네치아의 곤돌라 노래 등을 포함한다)이라든가 가곡 중에서는 하이네의 시에 작곡한 <노래의 날개에>가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오라토리오 <엘리아>도 종교음악으로서 중요하다(오라토리오 분야에서 그의 역할은 크다).

한여름밤의 꿈편집

멘델스존 작곡 작품21, 61(1826-1843). <한여름밤의 꿈>은 고전적 형식 속에 낭만적인 정감(情感)을 지니고 전아(典雅)한 내용이 넘치는 명작이다. 1826년 17세경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고, 그 몽환적(夢幻的)인 시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고 작곡한 것이 <서곡>이며, 다른 12곡은 그로부터 17년 후에 작곡되었으나 작품 전체는 잘 통일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몽환적·공상적인 기분이 표현된 <서곡>, 요정의 속삭임이라든가 장난을 묘사한 것 같은 <스케르초>, 감정의 기복이 풍부한 <간주곡(間奏曲)>, 호른과 파곳의 깊은 선율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사랑의 음악인 <야상곡(夜想曲)>, 유명한 <결혼행진곡> 등의 5곡은 특히 연주 횟수도 많고 널리 애호되고 있다.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편집

交響曲第三番 Scotland 멘델스존 작곡 가단조, 작품 56(1842). 멘델스존의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한 이 곡은 1842년 33세 때 베를린에서 완성되었으나, 착상은 13년 전 스코틀랜드에 가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성을 방문했을 때에 시작되었다. 300년 전 이 성에서 일어난 여왕 메리의 총신(寵臣) 리지오 살해의 비극에서 파생된 환상과 스코틀랜드의 풍물이 아름다운 선율로 풍성하게 진술되고 있다. 제1악장은 홀리루드성의 비극을 회상케 하는 슬픈 환상적인 주제로 시작되고, 제2악장은 스코틀랜드 무곡풍의 소박 명랑한 음악이며, 제3악장은 황량한 고지나 삼림, 거리, 고성(古城)의 모습을 생각게 하고, 제4악장은 용장(勇壯)하고 밝으며, 후반은 스코틀랜드 음계를 사용한 민요풍의 음악이다.

바이올린 협주곡편집

violin 協奏曲 멘델스존 작곡 마단조, 작품 64(1844). 독일 낭만파의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 협주곡으로서 널리 애호되고 있다. 고전적인 균제(均齊)가 잡힌 형식과 우아한 낭만적 정서와는 멘델스존의 모든 작품에 공통되는 특징이지만, 이 두 가지가 이처럼 훌륭하게 조화(調和)된 작품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다. 바이올린 독주부는 노래와 화려한 기교로 가득하며 매혹적이다. 3악장으로 성립되는데, 중단없이 연주되는 것이라든가, 카덴차를 스스로 쓰고 더욱이 전개부와 재현부(再現部) 사이에 삽입한 점 등은 새로운 수법이다.

슈만편집

Robert Schumann(1810-1856) 슈만은 1810년 6월 8일 출판업자의 아들로서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10세 때에 피아노 공개연주를 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는 법률을 배우고 문예에 흥미를 품었으나, 라이프치히에서 프리드리히 비크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고, 스위스와 이탈리아로 여행함으로써 음악가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잘못된 피아노 연습법 때문에 오른손 힘줄을 다쳐, 피아니스트로서 입신할 것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로부터 작곡과 평론에 열중하고, 1834년엔 <음악신잡지>를 발간하였다. 1835년, 비크의 딸인 클라라와 약혼하였다. 클라라는 당시 제일류 피아니스트였다. 1838년 그녀는 슈만의 피아노 작품을 처음으로 공개 연주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40년 그의 옛 스승 비크의 반대를 물리치고 클라라와 결혼하였다. 이 약혼과 결혼의 행복한 해에 그의 명가곡의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1841년 멘델스존은 슈만의 제1교향곡을 지휘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친교가 맺어졌다. 1843년, 멘델스존은 슈만을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사로 맞이했다. 이듬해엔 아내와 함께 러시아 여행길에 올랐다. 1845년 드레스덴으로 이주하고, 개인교수라든가 합창지휘자가 되었으나 정신적 지병이 악화되어 그를 괴롭혔다. 1850년 뒤셀도르프에서 페르니난드 힐러의 후계자로서 3년간 교향악 연주회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1853년에는 그 직을 사임하였다. 1854년 2월 24일 라인강에 몸을 던졌으나 구출되어 본의 근교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서 요양생활을 계속하였지만 완전히 낫지 못하고 1857년 세상을 떠났다. 슈만은 온후 전아한 멘델스존에 비하여 깊은 정열과 고뇌를 지닌 작곡가였다. 슈만의 음악은 그 피아노곡에서부터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베버나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피아노곡에서는 결국 이룩해내지 못했던 것, 즉 피아노의 표현 성격의 정도(正道)로 되돌아서 이것을 파내려 가는 방법을 그는 실천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숭배하는 바흐와 베토벤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철저한 낭만주의자였다. 베버가 오페라에서, 슈베르트가 리드에서, 베를리오즈가 관현악에서 낭만주의를 구현했다고 한다면, 슈만은 피아노의 낭만적 성격을 가장 깊이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피아노곡은 젊었을 때의 것에 걸작이 많다. 24세 때의 <교향연습곡>(1834)을 비롯하여 <사육제>(1835), 28세 때의 <클라이슬레리아나>(1838), <어린이의 정경>(1838) 등의 걸작은 그의 특색을 잘 나타내었다. 조그만 곡을 모아서 1곡으로 한 독특한 형태는 슈만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비교적 후기의 작품으로는 35세 때의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가 걸출하다. 그의 실내악이나 교향곡도 피아노를 통하여 이해된다. 특히 교향곡은 실로 아름다운 음악이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슈만의 교향적 형성력의 취약성과 관현악법의 졸렬성에 의하여 충분히 표면에 나와 있지 못하였다. 또 가곡도 음악역사상 중요하다. 클라라와의 연애절정에 있었던 1840년에 100곡 이상의 가곡을 만들었다. 그 해는 그 때문에 '노래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그 해의 가곡에는 <여자의 사랑과 일생>, <시인의 사랑> 등의 뛰어난 가곡집이 있다. 이 밖에 <유랑민>이라는 제명으로 알려지는 합창곡 <집시의 일생>도 많이 노래되는 작품이다.

사육제편집

謝肉祭 슈만 작곡 작품9(1835). 슈만의 작품1로부터 23까지는 모두가 피아노곡이며, 비범하고 환상적(幻想的) 창조력이 넘치는 명곡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이 사육제는 가장 많이 연주된다. 사육제 광경을 묘사한, 개개에 표제(標題)를 지니는 20곡의 소품으로써 되어 있다. 1835년 작곡되고, '4개의 음표로 만들어진 작은 광경'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것은 슈만의 첫사랑의 여성 에르네스티네의 고향 앗슈의 철자(綴字)인 4음, 즉 A는 가음, S는 내림마음, C는 다음, H는 나음(또 SCH는 슈만의 최초의 3자에 해당한다)에 근거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제1곡 <서곡>에서 사육제의 소란을 묘사하고, 이하 여러 모양의 이름이 붙은 소곡이 계속되며, 맨 나중에 다윗 동맹원의 힘찬 승리의 행진으로 끝나는 슈만의 기지에 넘친 명곡이다.

어린이 정경편집

-情景 슈만 작곡 작품15(1838). 슈만이 소년시절을 생각하면서 1838년에 작곡한 30곡 정도의 소품 중에서 13곡을 골라 <어린이 정경>이라는 표제를 붙여 출판된 것. 어려운 연주기교를 사용치 않고 마음 가볍게 작곡된 곡집이지만, 내용적으로 유치한 것은 아니고, 소품이지만 높은 향기를 뿜고 있다. 대략 3부형식으로 되었으며, 각각 표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제7번 <트로이 멜라이>의 부드러운 선율은 유명하다.

시인의 사랑편집

詩人- 슈만 작곡 작품48(1840). 클라라와의 오랜 연애가 결실된 해(30세)에 작곡된 것으로서, 그의 대표적인 가곡은 거의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시는 하이네의 <노래의 책>에서 따오게 된 것으로서 <아름다운 5월에>, <나는 원망치 않겠다> 등 일련(一連)의 작품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의 정열과 비련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곡들은 하나하나가 단편적인 시이며,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와 같은 일련의 이야기시(詩)는 아니다.

니콜라이편집

Carl Otto Nicolai Fhrenfried(1810-1849) 최초엔 로마의 프로이센 공사관에서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고, 이어서 1837년에 빈의 켈른트나토어 극장의 악장이 되었다. 그간 나폴리로 도니체티를 방문하고, 극음악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였다. 그 성과는 1838년 이후 로마에서의 많은 이탈리아어 오페라 작품으로 되어서 나타났다. 1841년에는 빈 궁정극장의 수석악장이 되었다. 현재의 빈 필하모니를 그가 창립한 것은 이 무렵이다. 1847년에는 베를린 궁정가극장의 악장이 되었는데, 그의 대표작 <윈저의 경쾌한 아낙네들>(1849)은 이 시기에 완성하였다. 이 오페라는 유머 있는 제재(題材)와 친근한 멜로디로 지금도 자주 상연되지만 니콜라이 자신은 이 초연(1849) 2개월 후 졸도로 사망하였다.

플로토편집

Friedrich Von Flotow(1812-1883) 1839년 가극 <메두즈호의 난파>로 성공을 거두었다. 1844년, 가극 <알렉산드르 스트라델라>와 1845년 가극 <수부(水夫)들>을 함부르크에서 상연함으로써 크게 성공을 거두고, 그의 작품은 독일 각지에서 상연되었다. 1846년 독일로 돌아와, 1847년에는 가극 <말타>를 빈에서 초연해서 대성공을 거두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 플로토의 이름은 가극 <말타>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바그너편집

Richard Wagner(1813-1883) 바그너의 일생은 파란에 찼으며, 이야기할 것도 많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설명한다. 1813년 5월 22일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의 음악공부에 대해서는 라이프치히 토마스 학교의 바인리히로부터 배운 이론이 그의 기초를 만들어냈다. 또 베버의 <마탄의 사수>에 열중했으며, 베토벤의 작품으로부터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당시 가수였던 형을 뷔르츠부르크로 찾아가서 가극의 실제면을 배웠다. 21세 때 막데부르크의 지휘자가 되고, 다시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23세 때 연상의 여배우 민나 플라나와 결혼하였으나 그 결혼생활은 불행이었다. 그 전후에 <요정(妖精)>(1833), <연애금제(戀愛禁制)>(1836)의 두 가극을 작사 작곡하였다. 실직과 빚 때문에 각지를 전전하다가 마지막에 리가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숙망(宿望)에 따라 파리로나가, 3년간의 체재 중 1840년에 <리엔치>를 완성하고, 다음해에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완성하였다. 드레스덴으로 옮겨, 1842년 <리엔치>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음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도 상연되고, 그 해 드레스덴의 궁정극장 지휘자가 되어, 겨우 생활이 안정되었다. <탄호이저>는 1845년에, <로엔그린>은 1848년에 완성하였으나, 1849년 드레스덴 혁명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스위스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위스 체재 중, 그의 재정적 후원자인 베젠동크의 부인 마칠데와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1859년에 완성되었다. 1864년 이후 바이에른 국왕의 보호와 원조를 받아, 먼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1867년에 완성하고, 주로 스위스에 머물렀으나, 57세 때 리스트의 딸이며 폰 뷰로의 아내였던 코지마와 결혼하였다. 바그너는 자기의 무대작품을 상연할 이상적 극장을 만들고자 하여 바이로이트를 그에 알맞은 역으로 정하고, 1782년 그 곳으로 이주하여 극장을 건축하였다. 이 극장은 '축전(祝典)극장'이라고 불리며, 관현악석은 반 정도가 지붕으로 뒤덮이어 객석으로부터는 악원(樂員)도 지휘자도 보이지 않으며, 관현악의 소리는 일단 무대로 올라가서 가수의 소리와 융화(融和)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1876년 8월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의 상연과 함께 그 극장은 개관되었다. 1882년, 맨 마지막의 악극 <파르지팔> 역시 바이로이트에서 상연되었다. 1883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정양 중 심장장애로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바그너의 사후 바이로이트에서는 매년 '바그너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의 가극은 대규모적인 구상하에 신중히 준비되고, 제작에 임해서는 많은 작품이 수년을 요하고 있다. 또 그 대사는 모두 그 자신의 손에 의해서 씌어졌다. 바그너의 이상은 시와 음악과 무대가 완전히 일체가 된 드라마를 만드는 일이며, 종래의 오페라의 형태를 버리고서, 말의 자연스런 억양에 좇아서 계속하는 무한선율을 사용하였다. 또 관현악에는 지도동기(指導動機)를 사용하여, 극의 표현에 도움이 되게끔 하였다. 화성의 표현력은 철저하게 추구·확대되고, 반음계 화성을 매우 사용하였다. 관현악은 대규모화하고 강렬함에서나 섬세함에서도 표현능력을 눈에 띄게 확대하였다. 바그너의 가극은 종래의 오페라와는 매우 다르므로, 특히 악극이라고 부르는 수가 있다. 초기의 오페라는 오늘날 거의 상연되지 않는다. 바그너의 개성이 잘 표현되고 있는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후의 작품으로서, 뒤에 말하는 <탄호이저>, <로엔그린>, <니벨룽겐의 반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등이다. 무대작품 외로는 관현악곡 <지크프리트 목가(牧歌)>(1870), 가곡집 <베이젠동크의 5개의 시>(1857-1858) 등이 알려져 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편집

彷徨-Netherland人 바그너 작곡(1841). 종래의 가극 작법으로부터 탈피하여, 바그너가 개성을 부각시킨 최초의 작품이다. 대본은 하이네의 소설이나 하우프의 <유령선 이야기>를 기초로 작곡자 자신이 썼다. 폭풍우에 항거하여 반드시 건너가고야 말겠다고 호언했더니만 악마에게 저주받아 영원히 해상을 헤매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지어진 네덜란드 사람은 7년에 한 차례 상륙을 허락받고, 그 때 영구히 정조를 맹세하는 소녀를 얻으면 구제된다. 노르웨이의 항구도시에서 그는 젠타를 알게 되고 젠타도 정절(貞節)을 맹세하였으나, 네덜란드 사람은 젠타가 그녀의 약혼자 에리크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변심한 것으로 오해하여, 다시금 유령선을 타고 출범한다. 이를 안 젠타는 네덜란드 사람에게 정절을 맹세하면서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진다. 이 희생에 의해 네덜란드 사람은 저주로부터 풀리고, 그와 젠타는 하늘 위로 오른다. 여기에는 인간의 숙명과 동시에 사랑에 의한 속죄의 이데가 취급되고 있다. 이 구제의 사상은 바그너의 전작품에 기조(基調)를 이룬다. 구성은 종래의 번호 붙은 가극이지만 지도동기가 중용(重用)되어서, 후대 악극에의 제1보를 내디딘 작품이다. 제1막의 네덜란드 사람인 아리아, 제2막의 <실을 잣는 노래>, <젠타의 발라 드>, 제3막의 <수부의 합창> 등이 유명하다. 1841년 파리에서 완성을 보고, 1843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초연(初演)되었다.

탄호이저편집

Tannhauser 바그너 작곡(1845).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다음에 작곡된 3막의 로맨틱 오페라 <탄호이저와 발트부르크의 노래시합>은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애호되고 있는 것으로서, 상연의 기회도 많다. 초연은 1845년 10월 19일 드레스덴의 궁정극장에서 있었다. 대본은 중세 독일의 노래시합의 이야기와 탄호이저의 전설을 바탕으로 작곡자 자신이 쓴 것이다. 탄호이저는 엘리자베스 따님의 청순한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베누스베르크로 가서 이교(異敎)의 사랑의 여신 베누스와 환락의 나날을 보낸다. 이윽고 발트부르크 성으로 되돌아온 탄호이저는 노래시합에서 베누스의 관능적인 사랑을 칭찬함으로써 청중의 분노를 산다. 이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그는 로마로 순례를 하였으나 용서를 받지 못한다. 이 때 엘리자베스가 탄호이저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바쳐 그는 구제된다. 가극 중에서는 서곡 입장의 행진곡, <엘리자베스의 기도>, <순례의 합창>, <저녁별의 노래> 등이 유명하다.

로엔그린편집

Lohengrin 바그너 작곡(1848). <탄호이저>에 계속되는 낭만적 오페라이며, 제재는 역시 중세의 전설에 의거하고 있다. 초연은 1850년 8월 28일,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지휘하에 행해졌다. 죽은 브라반드공(公)의 딸 엘자 공주는 동생을 죽인 누명을 쓰나, 백조가 끄는 조각배를 타고 온 기사(騎士)에게 구조되어, 이름과 출신을 묻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결혼한다. 그러나 마음 속에 싹튼 의혹에 이끌려, 엘자는 드디어 금지된 말을 하고 말았다. 이 기사는 성배(聖杯)를 받드는 기사로서, 팔시팔의 아들 로엔그린이라고 신분을 밝힌 다음 멀리 떠나가고, 아가씨는 슬픔 속에서 숨진다. <전주곡>, <엘자의 꿈>, 특히 <혼례의 합창>은 유명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편집

Tristan-Isolde 바그너 작곡(1856). 3막으로 된 이 악극은 바그너의 원숙기의 대표작이다. 그가 목표 삼은 종합예술로서의 악극의 양식을 최고의 모습으로 구현한 불멸의 역작이다. 소재로 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는 중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전설이지만, 바그너는 사랑과 죽음이란 이야기의 중심부만을 다루었다. 이졸데와 트리스탄은 서로 원수가 되는 사이이지만, 마음으로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이졸데는 마르케 왕가에게 시집가게 되는데, 그 호송역할을 트리스탄이 하게 된다. 그와 그녀는 죽음의 약을 마시나, 그것이 실은 사랑의 술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잊고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마르케 왕에게 발견되고, 트리스탄은 왕의 부하 손에 의해서 중상을 입고 고향으로 보내지지만, 이윽고 달려온 이졸데의 팔 속에서 숨지고 그녀도 따라 숨져, 두사람은 죽음에 의해서 영구히 맺어진다. 1856년에 작곡은 완성하였으나 초연은 1865년 뮌헨에서 하였다.

브람스편집

Johannes Brahms(1883-1897) 브람스는 1833년 5월 7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부르크 시립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이며, 브람스는 아버지에게서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1853년부터 바이올린의 레메니와 함께 연주여행을 하고, 또 하노버로 요아힘을 방문하였으며, 바이마르에서는 리스트와 만났다. 이해 9월 말에는 뒤셀도르프로 슈만을 방문한 바 있다. 슈만, 그리고 슈만의 아내 클라라와의 우정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슈만은 그가 주재하는 잡지로 브람스를 세상에 소개하였다. 브람스는 그후 데트몰트에서 1857년부터 1859년까지 머물렀고, 또 함부르크에는 1860년부터 2년간 체재하고, 1862년에는 빈으로 나와 1874년까지 징그아카데미의 지휘자로 있었다. 브람스는 작곡을 하는 한편 연주가로서도 활약하였다. 1868년의 독일진혼곡(鎭魂曲)의 성공에 의해 명성은 확립되고, 1872년에는 빈 악우협회의 총무가 되고, 1875년까지 합창과 관현악의 지휘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무(公務)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그 후에는 각지를 여행했으며, 그 외에는 빈과 오스트리아의 시골에 머무르면서 작곡에 열중했고, 교향곡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써냈다. 1896년 이후는 건강이 쇠퇴하더니 1897년 4월 3일 빈에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브람스의 작풍은 독일 낭만파 중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전파적인 양식 위에 서서, 중후(重厚)하고 북독일적인 맛을 지니며, 또한 아름다운 서정성도 잃고 있지 않고 있다. 4개의 교향곡은 어느 것이나 걸작으로서, 그 중에서도 제1교향곡은 베토벤의 제9에 이어지는 제10교향곡이라고 할 만큼 베토벤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브람스 독자적인 세계를 쌓아올린 뛰어난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도 놀랄 만한 완성도에서 베토벤곡 다음에 놓일 만한 가치가 있다. 피아노 음악에서도 피아니스틱한 화려한 기교를 배격하고 중후한 작품을 작곡하였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노가 관현악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데에 특색이 있다. 독주곡에서는 <파가니니 변주곡>(1863), <헨델 변주곡> 등이 뛰어났고, 연탄용(連彈用)인 <헝가리 춤곡>은 특히 유명하다. 실내악에도 특필할 만한 작품이 많으나, <클라리넷 5중주곡>이 많이 연주되고 있다. <대학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도 많이 알려져 있다. 가곡에서도 그는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중후하고 교묘한 화성은 다소 가까이하기 어렵지만, <알토 랩소디> 등 깊은 슬픔을 담은 명작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엔 심각한 종교적 <독일 레퀴엠>(1866-1869)을 들 수 있다. 그의 암담하고 우울한 깊이가, 여기에서는 다듬어진 아름다움 속에 정화(淨化)되고, 어느 누구도 감명시키는 숭고함에 이르고 있다.

헝가리 춤곡편집

Hungary 舞曲 브람스 작곡(1869-1880). 브람스는 집시음악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에게서 배운 이래 특별한 흥미를 지니고, 종종 자기의 작품에도 그 색채나 감각을 인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틈을 타서는 집시의 음악을 기록하고 그것들을 편곡하여 이룩한 것이 <헝가리 춤곡>이다. 모두 21곡이며, 4손용의 피아노 연탄곡이지만 처음의 10곡이 출판되자 즉시 호평을 받아 어디에서나 연주되며 여러 가지로 편곡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헝가리계(系) 음악가들로부터는 저작권 침해라 하여 기소되었으나, 그는 편곡이라고 표기하고, 작품번호도 붙여져 있지 않아 승소하게 되었다. 양식은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 헝가리 집시적이며, 리듬이 자유롭고 생기가 있으며, 색채가 풍부하다. 전부 잘 알려져 있으나 그 중에서도 제5번 올림바단조라든가 제6번 내림라장조는 특히 유명하다.

교향곡 제1번편집

交響曲第一番 브람스 작곡 다단조, 작품68(1876). 브람스는 4곡의 뛰어난 교향곡을 남겼다. 지휘자인 한스 폰 뷰로는 이 제1번의 교향곡을 '제10번'이라고 불렀다. 이 곡이 베토벤의 '불멸의 9곡'에 계속되는 명작이라고 하는 뜻이다. 몇 번이고 신중히 초안을 연마한 끝에 교향곡을 작곡하고자 결심한 지 21년 후인 1876년, 그의 43세 때에 겨우 제1번이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완성된 교향곡은 명실공히 베토벤 교향곡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취급되고 있다. 고전적인 전통 위에 서서, 견고한 구성이라든가 주제 전개, 색채적이지는 않으나 견실한 관현악법 등에서는 베토벤을 본따고 있지만, 두터운 맛이 있는 화성, 짙은 빛깔의 중량감, 곡상(曲想)의 서사적인 전개 등은 확실히 브람스의 특색이다. 4악장으로 되며, 제9합창교향곡의 주제를 잘 닮은 주제를 갖는 제4악장 등은 뛰어난 작품이다.

바이올린 협주곡편집

violin 協奏曲 브람스 작곡 라장조, 작품77(1878). 브람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1곡밖에 작곡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곡은 베토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동렬에 서서 고금의 3대 협주곡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바이올린의 대가 요아힘의 유익한 조언도 주효하여, 바이올린 연주의 기교도 무리없이 쓰여지며, 전통적인 3악장 형식을 취하고, 고전적인 충실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적으로도 철저하게 파내려간 깊이와 밀도가 있는 작품으로서, 원숙하고 참된 브람스의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브루흐편집

Max Bruch(1838-1920) 다년간 베를린에 있었고, 생전에는 독일 악계의 중진으로서 숭앙되었으나, 작품적 경향은 보수적인 낭만주의였다. 1852년 교향곡 제1번을 작곡하고 나서, 모차르트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 4년간 프랑크푸르트에 체재하였다. 그동안 힐러와 라이네케에게 사사하였고, 1865년에는 코블렌츠의 연주협회 지휘자가 되고, 1867년 존다스하우젠의 궁정악장에 임명되었다. 1868년, 그의 <제1바이올린 협주곡>이 요아힘에 의해서 초연되고, 세계적 명성을 획득하였다. 1878년, 실러의 시에 곡을 붙인 <종(鐘)의 노래>가 성공을 거두고, 1883년엔 브로츨라프 연주회장에, 1891년에는 베를린 대학 교수에, 1892년에는 제실(帝室)예술원 작곡부장이 되었다. 그의 작곡은 기교가 확실하지만 깊이가 부족하다. 작품의 중점은 오라토리오 등의 합창곡에 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1866),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콜 니드라이> 등이 애호되고 있다.

훔퍼딩크편집

Engelbert Humperdinck(1854-1921) 지크부르크 태생. 쾰른 음악원에서 배웠으나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악극상연을 보조해 주었고, 그 거장의 영향을 받았다. 1900년부터는 베를린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그의 작품으로는 다만 동화 가극 <헨델과 그레텔> 한 종목만이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다. 바그너풍의 수법에 의하여 작곡되어 있지만, 독일민요를 받아들임으로써 친근하기 쉽게 되어 있다.

슈트라우스(리하르트)편집

Richard Strauss(1864-1949) 20세기의 작곡가로서 그 작품이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음악가로, 1864년 6월 2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가로서 당시 실력이 있던 사람으로서, 그 곳 궁정악단의 호른 주자로 있었다. 1832년부터 3년에 걸쳐서 뮌헨대학에서 배우고 철학을 즐겼다. 젊었을 때의 작품은 고전파, 슈만, 브람스 등의 영향을 보였다. 1884년에는 대지휘자 한스 폰 뷰로에게 인정되어, 다음해 그가 지휘하고 있던 마이닝겐의 궁정악단의 보조지휘자 및 합창지휘자가 되었고, 또 그 곳의 궁정악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는 뷰로의 영향으로 한때 브람스 찬미자가 되었으나, 리스트라든가 바그너의 이른바 신낭만주의로 개종함으로써 여기에서 일생의 태도가 결정되었다. 1886년에는 마이닝겐을 떠나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뮌헨의 궁정가극장의 제3악장이 되었다. 이탈리아 여행의 성과인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로부터>를 1887년에 완성하였고, 1889년 10월에는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제1악장이 되었다. 1889년 작곡인 <돈 환>은 레나우의 시에 의한 교향시로서, 앞서 작곡한 <이탈리아로부터>가 모음곡풍이었던 것과는 달리 리스트가 확립시킨 교향시의 양식을 따르고, 슈트라우스의 독창적 개성이 발휘된 최초의 걸작이다. 이 시기에는 또 <죽음과 변용(變容)>(1889), <맥베스>(1887-1890 改修) 등을 내고,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892-1893년의 겨울에는 그리스·이집트·시칠리아 등으로 여행하고, 최초의 음악극 <군트람>의 대본을 썼으며 일부 작곡도 하였다. 1894년 여름, 바이로이트에서 <탄호이저>를 지휘했으며, 10월에는 다시금 바이마르로 초빙되어 그 곳의 궁정악장이 되었다. 또 이해에는 <군트람> 초연의 주역을 연출한 가수 파울리네 데 아나와 결혼하였고, 그의 가곡의 명작은 이 무렵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해부터 또 뮌헨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1908년 베를린에서 뷰로의 뒤를 이어서 필하모니를 지휘하였다. <틸 오이렌쉬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등이 이 무렵에 작곡되었다. 1898-1918년에는 베를린의 제실가극장의 제1악장을 맡았다. 1905년에는 악극 <살로메>가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어 성공하였다. 이어서 악극 <엘렉트라>(1908)를 작곡하여 근대적인 작곡 기교를 활용하였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의 작곡과 주임교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1919-1924년에는 프란츠 샤르크와 함께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도 하였다. 교향적 변주곡 <돈 키호테>(1898)나 교향시 <영웅의 일생>(1899), <가정교향곡>(1904) 등의 표제악적 관현악곡을 작곡하였으나, <살로메>와 <엘렉트라>의 성공으로 슈트라우스는 가극의 창작에 흥미를 갖고 그 밖의 장르는 그다지 작곡하지 않게 되었다. 1911년에 희곡 <장미의 기사>가 드레스덴에서 초연되고, 이것이 또 앞의 두 작품에 뒤지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엘렉트라>에서부터 슈트라우스는 오스트리아의 시인 푸고 폰 호프만슈탈에게 가극의 대본을 쓰게 하고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의 협력은 <장미의 기사>에서 굉장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의 가극 <낙소스섬의 알리아도네>는 몰리에르의 <거리의 귀족> 뒤에 상연되어야 할 것으로서 구상되었다. 1912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초연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 후 1916년 빈 상영을 위한 개정판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지금까지도 종종 상연된다. 1915년에는 또한 <알프스의 교향곡>이 작곡되고, 1919년에는 악극적인 <그림자없는 여인>이 빈에서 초연되었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 음악극 총재로 있었다. 1945년 스위스로 이주하였고, 2년 후에는 토마스 비첨에게 초빙됨으로써 영국에서 지휘봉을 쥐었으나, 그 뒤로는 정양을 계속하다가 1949년 9월 8일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트라우스의 주된 작품은 대체로 위에 말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주로 교향시와 가극과 가곡의 세 분야에 걸쳐 있다. 교향시에서 슈트라우스는 베를리오즈나 리스트를 본으로 하여 출발하고, 바그너의 지도동기라든가 심리표현의 수법을 이용하고, 대관현악을 뛰어난 작곡기법으로 활용함으로써 매우 효과적인 음악을 작곡하였다. 가극도 주로 바그너의 영향하에서 출발하였으나, 그 밖에 과거의 오페라 양식을 교묘히 자기의 것으로 하여 아름다운 가극을 만들었다. 가곡은 일생을 통하여 작곡하였으나, 대체로 노래 불려지고 있는 것은 초기의 것이 많다.

돈 환편집

Don Juan R. 슈트라우스 작곡 작품20(1888). 슈트라우스는 리스트에 의해서 창시된 교향시를 계속적으로 작곡하였는데, 그 최초의 대표적인 작품이 교향시 <돈 환>이다. 이것은 독일시인 니코라우스 레나우의 같은 이름의 시를 표제로 하고, 이상적인 여성을 항상 그리워해 찾아서는 실망하고, 결국 염세적이 됨으로써 자살한다는, 정열적이고 다정다감한 돈 환의 모습을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을 쓰되 뛰어난 음악적 기법으로써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하였다. 1888년 완성된 슈트라우스 초기의 대표작이다.

영웅의 일생편집

英雄-一生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 작품40(1898). 이것은 슈트라우스의 최후의 단일악장 형식 교향시로 1898년 34세 때에 작곡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웅이란, 예술의 혁신자인 슈트라우스 자신을 가리키고, 표제악적(標題樂的)으로 몇 개의 에피소드를 끼우면서 자전풍(自傳風)으로 영웅의 인간적인 생활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곡은 슈트라우스 특유의 교묘한 관현악법을 사용하고, 재현부(再現部) 없는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었으며, 6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제1부 <영웅>, 영웅을 표시하는 주제로 시작되고, 각종 면으로부터 영웅의 전모를 묘사한다. 제2부 <영웅의 적>이라고 표제 붙여진 주제에서부터 나온다. 비평가, 선배, 동배(同輩) 등의 몰이해와 적시(敵視)가 강조된다. 제3부 <영웅의 반려> 독주 바이올린으로 우아하게 노래불려진다. 전개부에 들어가 제4부는 <전쟁터에서의 영웅>. 영웅의 일생에 걸친 결렬한 투쟁과 승리가 묘사된다. 제5부 <영웅의 업적>에서는 슈트라우스의 이때까지의 저명한 작품의 주제가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제6부 <영웅의 은퇴>가 잔잔한 선율로 묘사되어 있다.

살로메편집

Salome R. 슈트라우스 작곡 작품54(1905). 슈트라우스는 가극을 15곡 작곡하였다. 이는 그 세 번째의 작품이다. '살로메'의 이야기는 <구약성서>에 있는데, 대본은 19세기 말영국의 탐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H. 라하만이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였다. 기원전 30년, 유태왕 헤롯은 왕비가 데리고 온 딸 살로메의 아름다움에 욕망을 불태운다. 한편 살로메는 성안의 역사 깊은 우물 속에 갇혀 있는 예언자 요하난의 창백한 얼굴에 매혹되고, 왕이 요구하는 육감적(肉感的)인 <7개 베일의 춤>을 대상(代償)으로 드디어 은쟁반에 담은 요하난의 목을 얻어 미친 사람처럼 기뻐한다. 그러나 살로메의 이러한 모양에 두려움을 느낀 헤롯왕의 명령에 따라 살로메는 살해된다. 이 이상한 드라마를 많은 지도동기의 활용과 대편성의 관현악 구사에 의해서 관능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막짜리로서 1905년에 초연.

피츠너편집

Hans Pfitzner(1869-1949) 최초의 음악 지도는 음악가였던 부친에게서 받았다. 17세 때 프랑크푸르트의 호흐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뒤에 코블렌츠,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의 교사로 있었고, 1908년부터 스트라스부르의 음악감독과 음악원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7년, 대표작인 오페라 <팔레스트리나>가 발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그 뒤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뮌헨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제2차세계대전 때와 대전 후의 혼란기에도 현악 4중주곡 등을 작곡하였으며,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피츠너의 예술을 기념하여 피츠너협회가 설립되었다(1950). 피츠너의 양식은 슈만, 바그너 등의 독일 낭만파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최후의 낭만주의자'라고 불리었다.

레거편집

Max Reger(1873-1916) 바이메른에서 태어나 1886년부터 1889년까지 바이덴의 카톨릭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있은 후, 1890년에는 음악학자 리만에게 사사하였다. 바흐나 브람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음악형식을 공부하였으며, 이것이 뒤의 작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뮌헨에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독자적 작풍을 확립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독일파의 세찬 비판을 받았으나 지지자는 점차로 증가하고, 1905년부터 2년간 그 곳의 음악학교에서 작곡법을 강의하며, 합창지휘자도 겸하였다. 1907년에 라이프치히로 초빙되어, 그 곳 대학의 음악과 주임, 음악원의 작곡과 교사로 일하였다. 1911년 뷰로의 후계자로서 마이닝겐의 궁정악장을 지냈으며, 1916년 여행 중인 라이프치히에서 43세의 일생을 마쳤다. 레거는 엄격한 음악구성을 수단으로 하여 절대음악의 영역에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순독일적 고전주의에 투철하였지만, 화성에서는 바그너의 반음계적 수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 작품은 매우 많으나, 오르간곡이 가장 유명하다. 관현악곡에서는 딱딱한 수법으로 성공한 <힐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가 유명하며, 몇 편의 가곡도 애호되고 있다.

오르프편집

Carl Orff(1895-1982) 20세기 독일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1895년 뮌헨에서 태어났다. 바이에른 국립음악원에서 카민스키 등에게 사사하였다. 젊었을 때는 각지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고, 1924년에는 도로테 귄터와 함께 고전교육이나 음악 무용교육을 위한 귄터학원을 창립하고 교육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리듬교육을 창도(唱導)하였는데, 이 일이 그의 작곡에서의 독특한 리듬의 특성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1925년, 몬테베르디의 <오프페오> 그 밖의 작품의 편곡에 전념하였으며, 몬테베르디의 <망은자(忘恩者)의 딸들>과 <폼페아의 대관(戴冠)>에 대한 교정판은 현재 그들 작품의 결정판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악계에서 그를 주목케 한 것은 <카르미나 부라나>였다. 이것은 무대상연 형식의 칸타타로서, 193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늘날도 세계 각국에서 상연되고, 독일 현대음악의 고전으로 되어가고 있다. 그후 <카툴리 카르미나>(1951)와 <아프로디테의 승리>(1953) 같은 작품을 작곡하였고, 이것들을 합쳐서 '승리의 3부작'이라고 이름붙였다. 그 밖에 가극에서는 <달>(1939 초연), <현명한 여인>(1943 초연), <안티고네>(1945 초연) 등이 있으나, 역시 개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오르프의 특징은 리듬의 표현력을 극단으로까지 높인 것이며, 또 거기에는 일종의 야성이 있고, 복(複)음악적 취급도 일절 피하였다. 보통 의미로서의 선율도 매우 적고, 화성도 거의 변화하지 않고 있다. 오르프는 또 한편으로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나 악곡을 만들었다.

카르미나 부라나편집

Carmina Burana 오르프 작곡(1936). 무대형식에 의한 칸타타의 3부작 <승리>의 일부를 이룬다. 193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되었다. 오르프가 독자적 작곡양식의 확립에 정진한 결과 탄생된 것으로서, 그의 출세작임과 동시에 대표작이며, 또 현대음악에 한 분야를 개척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 음악은 단순한 화성구조와 매우 대담하고 강렬한 리듬을 기초로 한다. 수명의 독창, 대소(大小)의 합창단, 대관현악을 위해서 씌어 있다. 오르프는 그 가사를 13-14세기의 유랑 신부나 음유시인에 의한 방랑의 노래모음 <카르미나 부라나> 속의 24곡에서 발췌하였다. 모든 곡은 3부로 나누어지며, 운명 앞에는 모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운명의 힘을 노래한 것이다.

힌데미트편집

Paul Hindemith(1895-1963) 20세기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독일 작곡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고등음악학교에서 제크레스와 아놀드 멘델스존 등에게 배웠다. 1915년부터 192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가극장의 콘서트마스터로 일한 뒤 아마르 4중주단의 비올라 주자로서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다. 그의 작곡활동은 제1차세계대전 후에 시작됐다.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초연된 <제3현악 4중주곡>은 그의 데뷔곡으로 되고 제1차대전 후의 음악계에 신풍을 불어넣었다. 그의 작풍은, 낭만파적 경향을 부정하고, 음악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한층 더 순수한 음의 즐거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피아노 모음곡 <1922년>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또 재즈의 영향도 보인다. 이 무렵의 작품에는 <현악 4중주곡>, 가곡 <성모 마리아의 일생> 등이 있다. 한편, 교육활동도 무시할 수가 없다. 1924년에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의 작곡과 교수에 취임하고, 교육적인 작품을 낳았다. 1930년경부터 그의 작풍은 변화를 보여, 신고전파적인 중후한 작곡수법이 현저하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화가 마티스>(1934)가 오페라와 교향곡의 2개의 형태로 발표되었다. 이에 이어서 <고상한 환상>(1938), <바이올린 협주곡>(1939), <제2현악 3중주>(1934) 등의 걸작이 속속 발표되었다. 그런데 나치스 정부에 의하여 예술활동에 제한을 받게 되자, 그는 터키의 앙카라로부터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옮겨갔으며, 보스턴 음악학교에서 근무한 뒤 예일 대학 음악부장에 취임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후, 유럽으로 되돌아와 스위스에서 살았다. 1935-1941년에는 관현악용 악기와 피아노나 오르간을 위한 일련의 소나타가 완성되고, 또 1943년의 피아노곡 <루두스 토나리스>는 바흐의 평균율의 현대판이라고 일컬어진다. <베버의 주제에 의한 교향적 변용>, <피아노 협주곡>, 오페라 <우주의 조화(調和)> 등을 발표하였다. 또 제작활동도 왕성하여 <작곡의 지침>, <전통적 화성학>, <음악가의 기초훈련>, <작곡가의 세계>, <바흐> 등의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힌데미트는 젊었을 때는 급진적인 경향으로 달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나, 그의 개성은 1930년 이후의 중후한 작곡 기법에 의한 작품에 한층 잘 나타나 있다. 표면적인 화려함보다는 뛰어난 대위법적 수법으로 치밀하게 작품을 완성시키고 있다. 조성(調性)을 벗어남이 없어 그 때문에 만년에는 보수적인 음악가로 간주되고 있다.

바일편집

Kurt Weil(1900-1950) 독일 태생의 작곡가이나, 후반생을 미국에서 보냈다. 베를린에서 훔퍼딩크, 부조니 등에게 사사하였다. 1926년 <중심인물>을 초연하고 혁신적인 오페라 작곡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재즈의 영향을 받아 그 수법을 채용해서 대중적인 가극을 작곡하였다. 특히 1928년의 <서푼짜리 오페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33년, 유태계였기 때문에 나치스를 피하여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1935년엔 영국을 거쳐서 미국으로 건너가 여기서 정주하였다. 도미 후로는 뮤지컬과 영화음악 작곡에도 손을 대어, 널리 미국 대중 속에 침투해 들어갔다. 극음악 외에 협주곡·실내악곡 등의 작품도 남겼다.

에크편집

Werner Egk(1901-1983) 독일 작곡가로서, 독학으로 작곡을 배웠다. 베를린 국립가극장 지휘자 등을 거쳐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베를린 음악학교장을 역임하였다. 작품은 근대적 수법을 그의 고향인 바이에른 지방의 향토적 음악의 스타일 속에 교묘히 살리고 있다. 주요 작품에는 오페라 <마법의 바이올린>(1936), <올림픽 음악>(1936) 등이 있다. 1949년에 발레 <아브라크사스>에서는 전기악기 '트라우트늄'을 사용하였다.

블라허편집

Boris Blacher(1903-1975) 독일 작곡가로서 중국에서 태어났다. 1953년부터 베를린 음악대학의 학장을 지냈고, 독일 악계의 중진으로 있었으며 특히 리듬에는 독특한 수법을 생각해 냈다.

하르트만편집

Karl Amadeus Hartman(1905- ? ) 뮌헨에서 태어났다. 요제프 하스셰르헨, 베베른에게 사사하였고, 제2차세계대전 후 뮌헨에 무지카 비바협회를 설립하여 현대음악의 소개에 노력하고 있다. 아르반 베르크의 수법을 이어받아, 12음기법(技法)을 사용하지만, 형식이나 구성감에 고전적인 것에의 결부가 느껴진다. 텍스처(書法)는 정열적이며 선율적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에 많지 않은 교향곡 작자로서, 작품에는 7곡의 교향곡, 협주적 교향곡, 시편 등이 있다.

헨체편집

Hans Werner Henze(1926- ) 베스트팔렌의 귀테르스로에서 태어났다. 브라운 슈바이크의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타악기를 배우고, 그후 포르트너, 레보비츠에게 사사, 1949년에는 콘스탄츠의 독일극장 발레 지휘자, 1950-1953년에는 비스바덴의 헤센 국립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있었다. 1953년부터는 이탈리아로 이사가서 작곡에 전념하고 있다. 다작가로서, 작품은 여러 모양의 곡종(曲種)에 이르고 있다. 1947년의 바이올린 협주곡 이래 12음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퍽 자유로운 사용법이다. 정묘(精妙)한 리듬, 색채가 풍부한 음빛깔의 효과를 구사하고 있다. 이탈리아로 간 뒤에 작곡한 <5개의 나폴리 노래>(1956), <테너 기타와 8악기를 위한 실내악>(1958) 등은 서정성이 강하다. 특히 오페라에서는 성공하였는데, <고독한 거리>(1952)에서는 엄밀한 12음기법, 효과적인 소음의 사용이 보인다. 대작 <사슴의 왕>(1955)을 비롯하여 <젊은 연인들에의 비가(悲歌)>(1961)는 근년에 보기 드문 오페라의 걸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슈톡하우전편집

Karlheinz Stockhausen(1928- ) 현대 독일의 대표적인 전위작곡가. 프랑크 마르탄과 메시앙에게 사사하였다. 12음기법이나 독특한 리듬, 음력(音力) 등의 구성에 의한 작품 중에서는 1953년의 <콘트라풍크테>가 주목되었다. 1953년경부터 쾰른 방송국 전자음악 스튜디오와 협력하여 작곡한 전자음악에 의한 <습작> Ⅰ, Ⅱ, <소년의 노래> 등이 있다. 1960년에 전자음악 분야에서의 최고 걸작이라고 칭찬받은 <콘타쿠테>(4트랙의 전자음과 피아노, 타악기)를 발표하였고, 1966년에는 <텔레뮤직>, <솔로> 등을 작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