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nchoi92/연습장

메흐메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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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오스만 술탄 (파디샤)
재위 1444년 8월 4일~1446년 9월 (1차)
1451년 2월 3일~1481년 5월 3일 (2차)
전임 무라트 2세 (1차)
무라트 2세 (2차)
후임 무라트 2세 (1차)
바예지드 2세 (2차)
이름
메흐메드 빈 무라드
Mehmed bin Murad
신상정보
출생일 1432년 3월 30일(1432-03-30)
출생지 오스만 술탄국
루멜리아 에야레트 에디르네
사망일 1481년 5월 3일(1481-05-03)(49세)
사망지 오스만 제국
게브제 인근 휭카르차이으르
가문 오스만 왕조
부친 무라트 2세
모친 휘마 하툰
배우자 귈바하르 하툰
귈샤흐 하툰
시티샤흐 하툰
치체크 하툰
하티제 하툰
자녀 바예지드 2세
술탄 젬
셰흐자데 무스타파
게브헤르한 하툰
종교 수니파
묘소 터키 이스탄불 파티흐 모스크
서명

메흐메트 2세(오스만 튀르크어: محمد ثانى Meḥemmed-i sānī[1][2], 튀르키예어: II. Mehmet 이킨지 메흐메트[*], 1432년 3월 30일 - 1481년 5월 3일)는 오스만 국가의 7번째 군주이다(1차 재위: 1444년8월 ~ 1446년8월 2일, 2차 재위: 1451년2월 18일 ~ 1481년5월 3일[3]). 21살의 나이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정복자 술탄 메흐메트(튀르키예어: Fatih Sultan Mehmed) 또는 더 짧게 정복자(오스만 튀르크어: ابو الفتح Abu 'l-Fatḥ, 튀르키예어: Fatih)라 불린다. [4]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메흐메트 2세를 실질적인 오스만 제국의 시황제(한국 한자: 始皇帝)로 평가한다. 메헴메드 2세가 고전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기초를 세웠기 때문이다. 영토적으로, 그는 다뉴브 강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전제 군주 통치 체제를 만들었고, 이 지역은 이후 4세기 동안 중앙 집권화된,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으로 흔들림 없이 존재했다. 비잔틴의 전통과 유산은 그에게 다뉴브 강, 다르다넬스 해협, 에게 해, 유프라테스 지역을 제국의 자연 국경으로 삼아야만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을 요새화함으로써 그는 다부진 제국을 형성하였고, 적당한 시기가 되자 두 대륙,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의 술탄, 두 바다, 흑해와 지중해의 하칸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다. 그의 중앙 집권적인 제국은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지방 귀족 가문들을 중앙의 통제 아래에 억압하거나 축소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가문들은 오스만 국가의 티마르 보유자가 되거나, 완전히 술탄의 쿨에 의해 대체되었다. 1478년에 실시된 그의 광범위한 토지 개혁은 세습 지주들이 소유한 많은 수의 자유 보유 토지와 와크프 토지를 국영지로 바꾸는 것이었으며, 이후로도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는 위대한 가지로써 제국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변경 공국 베그 가문의 자치권을 감소시켰다. 요컨데, 메헴메드 2세는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전제 오스만 파디샤가 되었다.[5]

생애편집

왕자 시절편집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3월 30일, 에디르네에서 무라드 2세의 네번째 아들로 태어났다.[3][4]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나 정확한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녀가 비무슬림 노예 출신이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6]

 
메흐메드가 어린 시절 그린 스케치

메흐메드의 어린 시절 역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몇몇 사료에 따르면 메흐메드는 어머니와 함께 아마시아로 보내졌다. 당시 아마시아는 메흐메드의 이복형이자 무라드의 맞아들인 아흐메드 첼레비가 발리로 있었고, 무라드의 둘째 아들 알라엣딘 알리 첼레비 역시 아흐메드 첼레비의 아래에 있었다. 1437년에 아흐메드 첼레비가 급사하자, 당시 5세였던 메흐메드는 아마시아의 발리로 임명되었고, 아흐메드 첼레비는 마니사의 발리로 임명되었다. 1439년, 무라드는 두 왕자를 에디르네로 불러들였다가, 두 사람의 임지를 교체하여 메흐메드는 마니사로, 알라엣딘 알리는 아마시아로 보냈다. 알라엣딘 알리는 이후 무라드가 추진했던 카라만 공국의 이브라힘 베이에 대한 원정에서 활약하여 총애를 얻었다. 그러나 일설에 따르면 1443년, 무라드는 높아져 가는 알라엣딘의 위명에 위협을 느끼고 알라엣딘을 암살했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이는 무라드의 측근들 사이에 존재한 파벌 싸움의 결과였다고도 한다. 여하튼 알라엣딘의 죽음으로 인해 당시 9살이었던 메흐메드는 무라드 2세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1443년 7월, 무라드는 메흐메드를 마니사에서 에디르네로 불러들여 후계자 교육을 실시하였다.[7]

이때 헝가리의 수도 부다에서는 십자군 부대가 발칸을 향한 행군에 나서고 있었다. 그해 12월 소피아와 에디르네 사이에서는 오스만군과 십자군 사이의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으나, 오스만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444년 6월, 무라드는 에디르네에서 헝가리의 왕과 10년 기한의 평화조약을 맺었다.[8] 이때 이미 무라드는 퇴위를 염두에 두었는지, 메흐메드가 이 조약에 서명하게끔 하였다.[3] 이후 무라드는 카라만의 이브라힘 베이에 대한 원정에 나섰으나, 교황의 충동에 따라 조약을 파기한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에디르네로 돌아왔다. 1444년 11월 10일, 십자군과 오스만군은 바르나에서 격돌했고, 무라드는 승리를 거두었다.[8]

이때 메흐메드는 에디르네에서 무라드의 자리를 대리하게 했다. 무라드는 재상 찬다를르 할릴 파샤카드아스케르 몰라 휘스레브가 메흐메드를 보좌하게끔 조치하였다. 그러나 메흐메드의 대리청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메흐메드가 후원하는 급진 하루피파 수피 운동의 지도자는 오스만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고, 예니체리들은 반란을 일으키며 메흐메드의 가신, 시합엣딘 파샤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무라드는 바르나 십자군 문제를 처리한 뒤 에디르네로 돌아와 메흐메드에게 양위하고 마니사로 은퇴했다. 대리청정 기간과 마찬가지로, 찬다를르 할릴 파샤와 몰라 휘스레브가 메흐메드를 보위했다.[8]

첫번째 즉위편집

메흐메드의 첫번째 재위는 이전의 대리청정 기간과 마찬가지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특히 메흐메드는 데브시르메 출신 당파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주장하여 할릴 파샤와 갈등을 빚었다. 메흐메드의 호전성은 세르비아나 비잔틴 제국, 카스타모누 공국, 카라만 공국 등 인근 국가들이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들은 마니사에 은거하고 있는 무라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메흐메드를 선동하는 재상들을 제거해달라고 청원했다. 찬다를르 할릴 파샤 또한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반대하는 예니체리들을 선동했고, 예니체리들은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3]

이 기회를 틈타 주변국들도 반 오스만 행위를 개시했다. 모레아의 전제군주는 코린토스 해협에 성채를 쌓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 역시 오스만 국가의 왕위 주장자 오르한 첼레비를 이용해 오스만 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무라드 역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찬다를르의 비밀 편지를 받은 무라드는 1446년 5월 5일에 마니사를 떠나 부르사를 거쳐 에디르네에 입성했다. 예니체리와 할릴 파샤는 무라드를 다시 옹립하였고, 무라드는 즉시 메흐메드를 마니사의 발리로 임명했다.(1446년 8월 2일)[3]

마니사 시기편집

메흐메드는 마니사의 발리로 임명받은 즉시 에디르네를 떠났다. 이때 그는 자가노스 파샤와 이브라힘 파샤를 아타베그로 선택하였다. 비록 퇴위당했으나, 메흐메드의 지위는 이전에 마니사의 발리로 임명된 왕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메흐메드 첼레비 술탄(튀르키예어: Mehmed Çelebi Sultan)로써 소아시아 서부 오스만령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1446년부터 1449년까지 메흐메드는 자신의 영지에서 베네치아가 소유한 에게 해의 섬들을 점령하였다.[3]

무라드 2세 또한 메흐메드를 항상 후계자로 대우했다. 1448년, 무라드는 이스켄데르 베이에 대한 원정에서 메흐메드 첼레비를 소환하였다.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메흐메드 칸(튀르키예어: Han Mehmed)는 오스만군의 우익을 지휘했다. 1450년의 제2차 알바니아 전쟁 승리 이후, 무라드는 메흐메드 첼레비를 오스만 국가의 전통적인 동맹, 둘카드르 공국의 지배자 쉴레이만 베이의 딸 시티 하툰과 결혼시켰다.[3][4]

두번째 즉위편집

 
에디르네에서 거행된 메흐메드 2세의 즉위식 / 작자불명, 1584년 작

메흐메드 첼레비와 시티 하툰의 결혼 얼마 뒤 무라드는 병에 걸렸고, 그 이듬해인 1451년 2월 3일에 죽음을 맞이했다.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즉시 메흐메드에게 무라드의 죽음을 알리며, 빨리 에디르네로 올것을 촉구했다. 메흐메드가 겔리볼루에 도착했을 무렵, 무라드의 죽음이 에디르네에 알려지며 예니체리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군대를 동원해 상황을 안정시키는 한편, 새 파디샤의 이름으로 곧 즉위 보너스가 주어질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메흐메드 2세는 1451년 2월 18일에 18살의 나이로 다시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3]

 
1451년, 메흐메드 2세 즉위 시점의 오스만 제국

새로운 술탄의 즉위를 주변국들은 기회로 보았다. 그들은 메흐메드 2세가 처음 군주가 되었을때의 혼란이 다시 일어나길 기대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이전의 조약을 파기하고 오르한 첼레비를 이용해 다시 보상을 얻어내길 희망했다. 소아시아에서는 카라만 공국의 이브라힘 베이가 하미드 지역에 있는 몇몇 성채를 점령했고, 게르미얀과 아이든, 멘테셰 지역에서는 옛 공국의 지배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3]

그러나 어린 시절의 경험은 메흐메드에게 트라우마와 같이 작용하였고, 이를 통해 메흐메드는 가차없는 통치자로 성장한 상태였다. 메흐메드는 찬다를르 할릴 파샤를 비롯한 무라드 2세의 재상들 대부분을 유임시켰다. 그런 한편, 무라드의 갓난 아들을 죽임으로써 계승 전쟁의 위험을 줄였다.[9] 그런 한편 아나돌루 베일레르베이로는 우즈구르오을루 이사 베이에서 이스하크 파샤로 교체했다. 마니사 시기의 측근 셰합엣딘 파샤는 제2재상으로, 사르자 파샤와 자가노스 파샤는 디반에 입성했다. 그런 한편 세르비아의 주라지 브란코비치에게는 얼마간의 영토를 떼어주고,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는 초를루까지의 지역을 양도하는 한편, 오르한 첼레비의 생활비 명목으로 300,000 악체를 매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헝가리 왕국 방면의 안정을 위해 카라자 파샤를 소피아로 보내고, 그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그 과정에서 비잔틴 사절이 다시 메흐메드를 방문, 오르한 첼레비를 명목으로 재협상을 시도하자, 메흐메드는 그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일로 메흐메드는 카라만 공국보다 비잔티움 제국이 더 큰 위협이라고 판단하여, 카라만 공국에게 알라이예 성을 양도하는 대가로 오스만조의 종주권을 재확인했다. 카라만 공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메흐메드는 에디르네로 귀환하였다. 이때 예니체리들은 즉위보너스를 요구하였다. 메흐메드는 찬다를르 당파에 속하는 예니체리의 지휘관, 쿠르트추 도안을 해고하고 다른 장교들을 처벌하였다.[3]

콘스탄티누폴리스 정복편집

 
보아즈케센 히사르, 즉 루멜리 히사르

카라만과의 분쟁을 마무리하고 에디르네로 귀환하던 메흐메드는 찬다를르 할릴 파샤에게 아나돌루히사르의 건너편에 성채를 세울 것을 명령했다. 1452년 2월, 자가노스 파샤의 노력으로 첫번째 탑이 해안가에 세워졌고, 그해 5월에는 구조물까지 완성되어 자가노스 보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메흐메드는 5월 26일 직접 공사 현장으로 나왔다. 8월 말 완공된 보아즈케센 히사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흐름을 잘라버리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고립시켰다.[3]

이후 메흐메드는 1452년 가을부터 1453년 봄까지 에디르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위한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메헴메드는 우선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헝가리 왕국과의 협상을 통해 서쪽을 안정시켰다. 에디르네에서 일어난 대 회의에서 찬다를리는 난공불락 성벽과 서방에서 올지 모를 십자군의 위험을 지적하였으나, 자가노스와 시합엣딘 파샤가 이끄는 주전파는 술탄의 결정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며, 비잔틴의 존재 자체가 오스만 국가의 통합에 대한 지속적인 위협이라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공성전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는 마침내 대구경의 대포를 주조하고, 육군과 해군을 소집하여 병사와 보급품을 에디르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육상성벽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1453년 3월에는 메흐메드 그 자신도 에디르네를 떠났으며, 공성전은 4월 6일에 시작되었다.[4]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는 메흐메트 2세

이 전투는 54일 동안 지속되었으나, 전투의 향방은 불분명해보였다. 공성전의 결과는 시간과 오스만 공병대의 효율성에 달려있었다. 공성전이 길어질수록, 헝가리와 베네치아의 군대가 포위된 도시를 도울 가능성이 높아졌다. 성벽 아래에 배치된 오스만 군대의 거대한 대포들의 파괴력 덕분에 공성전 기간은 2개월을 넘지 않았다. 공성전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순간은 오스만 해군이 금각만으로 들어가는 보급선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이 중대한 순간에 패배주의적인 소문이 포위군에 떠돌기 시작했고, 찬다를르는 다시 한번 공성전을 포기하자고 조언했다. 자가노스와 메헴메드의 영적인 스승, 아크 솀스엣딘은 군사들의 과단성 부족을 비난하는 젊은 술탄을 강하게 지지하였다. 자가노스는 마지막 대 공세를 준비하였다. 5월 29일, 오스만 군대의 마지막 성벽 공격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메흐메드는 이후 병사들에게 3일 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메흐메드 역시 병사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 하기아 소피아로 가서 기도를 올린 후에 모스크로 바꾸었다. 그렇게 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4]

같은 날 제노바 식민지 페라의 포데스타는 항복하였다. 메헴메드는 아흐드나메를 1453년 6월 1일에 펴내어 본래 살던 비무슬림 집단에게 딤미 집단으로써 상업적 특혜를 수여하였으며, 제노바 상인들에게는 카피툴레이션을 수여하였다. 또, 저명한 성직자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를 대주교로 임명하여 그리스 정도회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그런 한편, 메헴메드는 찬다를르를 체포하고 성벽에서 오스만 군대에 대항한 오르한 첼레비를 처형했다. 공석이 된 대재상으로는 자가노스가 임명되었다.[4][10]

이슬람의 전통에 의해 예정되어 있던 쿠스탄티니야 알우즈마를 정복함으로써 메헴메드 2세는 미증유의 카리스마를 얻게 되었으며, 이슬람 세계에서 홀로 "가자의 검을 가진 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가자 원칙은 오스만 술탄이 경쟁 무슬림 세력을 상대로도 명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메헴메드에게 저항하거나 도전한 무슬림 지배자들은 메헴메드의 가자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이슬람에 반대하는 자로 몰렸다. 이러한 가정은 오스만조로 하여금 16세기에 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 자신을 제도의 소유자로써 로마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 카이사르라 선언함으로써, 메헴메드는 비잔틴 황가의 모든 구성원을 죽이고 동로마 제국 아래에 있던 발칸 반도나 크림 반도와 이탈리아 남부 해안 등의 모든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잔틴의 전통에 따라, 메헴메드는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에 대해 종주권을 가진다고 주장하였으며, 1480년에 오트란토를 점령한 것은 이탈리아 정복의 서곡으로 생각되었다. 붉은 사과와 황금 돔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정복은 오스만 가자 이데올로기의 궁극적 목표로 남아있었다.[11][12]

세르비아 정복편집

 
1456년, 오스만 군대의 베오그라드 포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뒤 메흐메드는 세르비아로 눈길을 돌렸다. 1454년부터 1455년까지 이어진 원정에서, 메흐메드는 노보 브르도와 세르비아 남부의 은광지대를 점령했고, 세르비아 북부만을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영토로 남겨두었다. 1456년에 메흐메드는 베오그라드에서 패배했으나, 이것이 세르비아의 미래를 바꾸지는 못했다. 1457년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영토는 헝가리의 후녀디 마차시와 오스만의 메흐메드의 사이에 노출되었다. 1458년, 메흐메드는 마차시에 앞서 움직였다. 세르비아 출신의 재상 마흐무드 파샤는 군대를 이끌고 진군, 세르비아를 정복하였다. 이 정복 덕분에 다뉴브 강은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의 경계가 되었다.[10]

모레아 정복편집

세르비아 원정과 비슷한 시기에 에게 지역도 오스만 군대의 침략에 시달렸다. 원정의 규모는 세르비아의 것에 비해 적었으나, 그 이득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에게 해에 대한 라틴계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네그로폰테의 안전에 위험을 느끼고 스포라데스 북쪽의 섬들을 점령하여 북쪽에 방위선을 꾸리는 한편, 메흐메드에게는 협상을 제의했다. 메흐메드는 이를 받아들여 양자 간에는 자유로운 상업이 가능해졌고 베네치아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13]

반면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소아시아 쪽의 제노바 식민지 포카이아는 백반의 산지였기 때문에 메흐메드가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다. 1456년 1월 메흐메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 서부의 제노바 식민지를 공격하여, 에네즈, 사모트라케, 임브로스, 림니 등의 섬을 얻어냈다. 그에 반해 아테네 정복은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피렌체계 공작 네리오 2세 아키아줄리가 죽자, 그의 아내는 네리오의 조카와 결혼했다. 이후 이들은 메흐메드에게 아테네의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도움을 청했다. 메흐메드는 1456년에 투라한오을루 외메르를 보내 아테네를 점령하게끔 했다. 아테네가 함락되자 위협을 느낀 교황 칼릭스투스 3세와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왕은 동맹을 맺고 군대를 파견해 임브로스와 림니를 점령했다. 알폰소 왕은 이후 펠로폰네소스의 전제공, 데메트리오스의 딸과 그의 손자를 결혼시키려 했다. 메흐메드는 이를 막기 위해 펜로폰네소스를 침공,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데메트리오스의 딸과 결혼하는 한편, 데메트리오스는 펠로폰네소스를 떠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이 약속을 어기고 동생 토마스와 싸움을 벌여, 1460년 오스만 군대는 재차 펠로폰네소스를 침공한다. 결국 모레아 전제공국은 모두 오스만 군대의 손에 들어갔다. 데메트리오스는 트라키아에 영지를 받고 정착했으나, 토마스는 로마로 도주했다. 이제 펠로폰네소스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들만이 오스만의 통제 바깥에 남았다.[14]

흑해 방면으로의 원정편집

메흐메드의 다음 목표는 흑해 남반에 존재하는 여러 독립체들의 합병이었다. 1459년 여름 말 또는 가을에 메흐메드는 제노아의 식민지 아마스라로 원정을 떠났다. 메흐메드의 군대가 아마스라 인근에 나타나자, 제노아 총독은 메흐메드에게 항복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메흐메드는 흑해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을 후원하여 오랬동안 아마시아를 괴롭혀왔다고 한다. 메흐메드는 제노아 총독의 가솔을 이스란불로 데려가는 한편 인근의 주민들을 아마스라에 정착시켰다.[15]

2년 뒤인 1461년 봄, 메흐메드는 이 방면에 재차 원정에 나섰다. 해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흑해를 따라 이동했다. 메흐메드와 마흐무드 파샤가 이끄는 군대가 앙카라에 도착하자, 이스마일의 아들 하산 첼레비 그리고 카라만 공국의 이브라힘 베이의 아들 카심이 봉신으로써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합류했다. 이 시점에서 메흐메드의 목표가 드러났다. 이스펜디야르 공국의 이스마일이 지배하는 시노프였다. 메흐메드는 하산 첼레비를 구금한 뒤, 자신은 카스타모누에 대기하고 마흐무드 파샤에게 이스펜디야르 공국 원정을 맡겼다. 마흐무드 파샤의 군대가 이스마일의 영토에 들어가자 인근 영주들과 마을들이 오스만 군대에 항복했다. 마흐무드 파샤는 투항한 이들을 군대로 꾸린 후에 시노프를 포위했고, 오스만 함대 역시 시노프 항을 점령했다. 이스마일은 저항을 포기하고 오스만 군대에 항복했다. 메흐메드는 이스마일에게 부르사 인근의 예니히사르를 영지로 내리고 시노프를 점령했다.[16]

이후 메흐메드는 귀환하지 않고 계속 동진, 폰토스 산맥을 넘어 트라페주스 제국을 공격한다. 이미 아크 코윤루우준 하산은 1460년에 조카 무라드 베그를 메흐메드에게 사절로 파견하여 트라브존드가 자신의 세력권에 속해 있다며, 그 이상 동진하지 말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메흐메드가 직접 움직임으로써 이 경고를 무시한 것이 드러나자 우준 하산은 아들, 우구를루 무함마드를 코율히사르로 파견했다. 1461년 여름에 메흐메드의 군대가 코율히사르 인근에 접근하자 우구를루 무함마드는 저항하였으나, 우준 하산은 이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메흐메드와 평화조약을 맺고 군대를 거두어들였다.[17]

그럼에도 오스만 군대의 트라브존드 원정은 쉽지 않았다. 거친 지형, 쉽지 않은 보급, 주민들의 저항, 계속되는 우기로 인해 메흐메드가 직접 원정에 동행하고 있음에도 군대는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메흐메드 그 당사자 마저도 전쟁의 포기를 고민할 정도였다. 이에 메흐메드는 다른 도시들을 무시하고 트라브존드로 곧장 향했다. 오스만 함대는 트라브존드를 바다 방면에서 공격했고, 메흐메드는 기병을 파견해 인근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기독교계 사료들에 따르면 트라브존드 군대가 오스만 기병대를 약탈했고, 메흐메드는 결국 트라브존드를 포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약 6주 간 지속된 공성전의 끝에 결국 트라브존드의 황제는 오스만 군대에 항복했다. 항복한 적에게는 행동의 자유를 준다는 이슬람 전통에 따라 황제와 그 가족들은 에디르네로 옮겨졌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메흐메드의 하렘으로 들어간 안나를 제외한 나머지 황실 구성원은 2년 뒤 처형당했다. 다만 황제에게 항복할 것을 조언했던 게오르기오스 아미루체스는 오스만 궁정의 다른 비잔틴계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경력을 지속하였다. 특히 후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프톨레미오스의 저작을 다시 종합하여, 이후 이슬람 세계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에게 마저도 영향을 주었다. 보물은 해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메흐메드 그 자신의 육군과 함께 이동했다. 트라브존드의 태수로는 해군 제독 카심 베이를 임명했다. 메흐메드는 귀환하는 과정에서 토카트를 정복하고 1461년 가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였다. 이 원정을 통해 메흐메드는 제4차 십자군 이후 분열된 비잔틴 세계의 국가 모두를 정복하게 되었다.[18][19]

왈라키아 원정편집

 
블라드 체페슈와 오스만 사절단 / 테오도르 아만 작

메흐메드는 1462년 봄에 다뉴브 강을 넘었다. 당시 왈라키아의 보이보다, 블라드 체페슈는 메흐메드가 소아시아의 흑해 방면을 공격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한 연공 지불을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메흐메드가 보낸 함자 베이를 구금하고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넘어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기독교도와 무슬림을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그 코를 베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블라드 체페슈는 왈라키아로 귀환하여 함자 베이와 사절단 30여 명을 전부 꼬챙이에 꽂아 처형했다. 이에 분개한 메흐메드는 무흐무드 파샤와 이스하크 파샤에게 군대를 맡겨 블라드 체페슈의 동생 라둘을 왈라키아의 보이보다로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 군대는 400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졌으며, 메흐메드는 그 뒤를 따라 니코폴리스로 이동했다.[20]

오스만 군대가 니코폴리스에 도착했을때, 블라드 체페슈의 군대 역시 다뉴브 강 북쪽에 도착한 상태였다. 예니체리들은 메흐메드에게 왈라키아 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게끔 하여 그 틈에 공격하자고 조언했다. 메흐메드는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왈라키아 군대는 밤에 몰래 강을 건너서 오스만 군대를 습격했다. 오스만 군대는 초반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 블라디 체페슈의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오스만 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다뉴브 강을 건널 수 있었고, 메흐메드는 이 시점에 메흐메드에게 보너스를 지급해 사기를 높였다. 이후 오스만 군대는 블라드 체페슈를 쫓아 왈라키아로 진군해들어갔다.[21]

 
왈라키아 군의 야습 / 테오도르 아만 작

블라드 체페슈는 이 시점에서 오스만 군대에 정면으로 대적하지 않았다. 매일 오스만 군대의 야영지를 습격, 포로들을 잡아갔다. 왈라키아 군대는 이들을 꼬챙이에 꽂아 오스만 진군로에 두었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 접전으로 오스만 군대를 몰아낼 수 없었다. 몰다비아를 향해 진군하던 마흐무드 파샤의 군대는 왈라키아 군대의 매복을 기다렸다가 역으로 습격, 왈라키아 군대를 전멸시켰다. 그날 밤 예니체리들은 메흐메드의 눈 앞에서 왈라키아 포로를 전부 학살해버렸다.[22]

이로 인해 왈라키아는 오스만 제국의 손에 떨여졌다. 블라드 체페슈는 헝가리로 도주했고, 메흐메드는 라두를 왈라키아의 보이보다로 임명했다. 메흐메드는 브라일라에서 라마단을 기념한 뒤, 1462년 6월 29일에 에디르네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왈라키아 정복으로 메흐메드는 흑해의 서쪽과 남쪽 해안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를 이용해 메흐메드는 갈리폴리 인근에 성채를 세워 에게 해와 흑해 사이의 해로의 통제권을 높였다.[23]

레스보스와 보스니아 정복편집

1462년, 왈라키아에서 귀환한 직후 메흐메드는 예니체리 군단을 갈리폴리로 보냈다. 그곳에서 예니체리는 함대와 합류하여 레스보스로 향했다. 메흐메드 그 자신은 육로로 아야즈멘드까지 이동하여, 육지에서 레스보스 섬을 견제했다. 당시 레스보스 섬은 니콜로 가틸루시오가 통치하고 있었다. 니콜로는 로도스 기사단히오스섬의 카탈루니아인들까지 끌어들여 저항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9월 17일에 레스보스 섬은 항복했고, 메흐메드는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24]

 
스테펜 토마세비크 왕의 모습 / 자코포 벨리니 작

에디르네로 돌아온 메흐메드는 곧장 보스니아 원정을 명령했다. 당시 보스니아 왕국스테펜 토마세비크 왕은 오스만 제국에 15년 기한의 평화 조약을 연장해달라는 사절을 파견한 상태였으나, 메흐메드는 듣지 않았다. 원정을 담당한 이스하크 파샤와 마흐무드 파샤는 헝가리 왕국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결국 스테펜은 생명을 보전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마흐무드 파샤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메흐메드는 스테펜을 처형했고, 그리하여 보스니아 왕국은 멸망했다. 원정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마흐무드 파샤는 보스니아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마흐무드가 얻지 못한 땅 대부분은 스테펜의 아들 헤르섹자데 아흐메드 파샤의 손에 남겨졌다. 아흐메드는 나중에 오스만 왕가의 여인과 결혼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 헤르체고비나 점령을 끝으로 메흐메드는 에디르네로 귀환했다. 이 원정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드리나 강에 닾게되었다.[25]

베네치아 그리고 헝가리와의 전쟁편집

1463년 7월 28일,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한다. 메흐메드의 모레아 정복 이후 약 5년 동안 느꼈던 베네치아의 위기감이 드디어 표출된 것이다. 여기에 보스니아 정복으로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확장에 제동이 걸린 헝가리 왕국 역시 베네치아에 가담한다. 메흐메드의 군대가 보스니아에 묶여있던 , 8월 23일에 베네치아 군대는 아르고스를 습격했다. 25일에는 베네치아 군대가 나브플리온을, 다음달 1일에는 헥사밀리온을 점령했다. 3일 오스만 군대가 코린토스로 오자 베네치아군은 일시 후퇴하였으나 오스만 군의 수가 베네치아와 비슷한 1만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반격했다. 이후 크레타, 코르푸 그리고 알바니아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자 베네치아 군대는 코린토스를 포위한다. 9월 말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파트라스, 미스트라, 코린토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베네치아의 손에 들어갔다. 헝가리의 후녀디 마차시 왕 역시 베네치아와 발을 맞추어 보스니아를 침공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26]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마차시 왕의 선전에 고무된 베네치아 공화국은 3번째 전선을 열어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1463년 10월, 안드레아 코너는 사절단을 이끌고 카라만 공국의 이브라힘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교황청 역시 이 사실에 고무되어, 피우스 3세부르고뉴 공국의 군대와 함께 펠레폰네소스의 십자군에 직접 참전하겠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1464년에는 이 동맹에 아크코윤루우준 하산마저 동참했다. 그러나 이 동맹군은 자연히 해체되었다. 베네치아의 코린토스 공성전은 실패했고, 피우스와 부르고뉴 공국 역시 펠레폰네소스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7월에는 카라만 공국의 이브라힘 베이가 죽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우준하산,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 그 어디도 베네치아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베네치아는 해군을 다르다넬레스 해협으로 파견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타격해보지만, 마흐무드 파샤의 군대에 가로막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해 12월 14일, 미스트라 공성전의 실패를 끝으로 베네치아의 펠로폰네소스 원정은 실패하면서 끝이 났다.[27]

그러나 헝가리의 마차시 왕은 오스만 군대가 베네치아 방면에 매달려 있었던 점을 활용하여 많은 과실을 누릴 수 있었다. 메흐메드가 갑작스레 군대을 이끌고 보스니아 방면으로 진군하자, 마차시 왕은 오스만 군대와 직접 충돌하지 않고 후퇴했다. 그러나 마흐무드 파샤가 3일 거리를 단 하룻밤에 주파, 즈보르니크 인근에 있던 마차시 왕의 군대를 급습하여 격파했다. 마차시 왕은 상처 투성이 군대와 함께 허겁지겁 퇴각했다. 마흐무드 파샤의 군대는 헝가리 군을 사바까지 추격했다. 이후 마흐무드는 소피아에 있던 메흐메드와 합류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이 너무 혹독했기에, 두 사람은 에디르네로 회군했다.[28]

카라만 공국과의 전쟁편집

메흐메드가 트레비존드 제국을 정복한 이후 아크 코윤루우준 하산과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갔다. 우준 하산은 베네치아와 접촉하여 반오스만 동맹을 형성하려 시도했다. 1464년,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던 카라만 공국의 이브라힘 베이가 죽자, 카라만 공국은 오스만 제국과 아크 코윤루 세력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브라힘의 맏아들 이스하크는 오스만 제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준 하산과 맘루크 술탄국와 접촉했다. 그러나 당시 우준 하산은,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유럽 방면에 집중하는 틈을 이용하여 카라 코윤루의 세력을 흡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하크를 적절히 지원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메흐메드의 후원을 받는 이브라힘의 또 다른 아들, 피르 아흐마드가 카라만 공국에 집권하였고, 이스하크는 우준 하산에게 망명하였다.

카라만 공국을 다시 속신화한 메흐메드는 아크 코윤루로의 원정을 기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메흐메드는 밀라노 공국에 사절을 파견해 베네치아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알바니아스컨데르베우가 반 오스만 제국 활동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이 원정 계획을 포기했다.

알바니아 원정편집

1468년, 메흐메드는 이집트 정복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동진했다. 그러나 카라만 공국의 피르 아흐마드는 이 원정에 충분한 지원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자 메흐메드는 군대의 방향을 돌려 카라만 공국을 공격했다. 이때에 우준 하산은 티무르 제국아부 사이드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또 한번 카라만 공국에 개입할 수 없었다. 피르 아흐마드는 메흐메드에게 항복하였다.

아시아와 유럽의 정복편집

발칸반도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세르비아를 정복했다. 이후 그의 관심은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쏠렸다.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셀주크 왕조의 해체 이래 각지에 할거한 여러 제후국을 정복하고 현재의 터키 공화국의 국토라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 전부를 손안에 넣었다.

1475년에는 크림 반도에 할거하던 몽골 제국의 후예국가인 크리미아 칸국을 복속시키고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바다로 만들었다. 30년에 걸친 두 번의 치세에 이르러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발칸 반도의 여러 왕국,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여러 세력을 정복해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시켰다. 이로 인해 오스만 왕조는 제국이라 불릴 수 있는 내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소아시아가 안정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힘을 얻은 메흐메트는 자신이 로마 제국의 황제의 계승자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1480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다. 로마를 점령하여 로마 제국을 다시 재건할 그의 의도는 좋았으나 때마침 알바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배후를 모두 차단당하고 교황 식스토 4세가 이끈 강력한 군대에 밀려 퇴각했다. 그러나 그는 발칸 지방에서 작은 군주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발칸지방으로 확대하고 베오그라드까지 진출했다. 이후 1481년 이집트 원정을 나섰으나 사망했다.

내정편집

내정면에서는 수도를 종래의 에디르네에서 새롭게 정복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고 그곳에 무슬림을 대거 불러모아 살게 하면서 동로마 제국 시대부터 살아왔던 동방 정교회 교도와 서방으로부터 온 가톨릭교도, 아르메니아 정교도유대인도 살게 했고, 모스크와 상업시설 등의 인프라를 건설해 이스탄불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붙여진 이 도시를 부활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관습법이나 법령을 집대성한 《카눈나메》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고, 카프쿠르라 불리는 자식같은 군인관료를 재상이나 주지사 등의 고관으로 임용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기구를 정비했다.

정책편집

메흐메드는 오스만 제국을 통합하고 중앙집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9] 이때 확립된 제도와 관직은 메흐메드 3세의 시대까지 큰 틀에서 변화없이 이어졌다.

군주권의 강화편집

1453년 이전까지 오스만 국가의 군주는 ‘동등한 권력자들 가운데 제일인자’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 오스만 엘리트들은 변방의 영주, 튀르크멘 지도자들이었고, 오스만 군주에게서 독립적인 세력을 이끌고 오스만 국가에 봉직하였다. 따라서, 오스만 군주는 거의 동등한 엘리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그들과 협상을 해야만 했다.[30]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메흐메드 2세는 엄청난 권위를 얻게되었다. 메흐메드 2세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 이제 그는 독립적인 행보를 했던 엘리트들에게서 부와 권력을 빼앗았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데브시르메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이론상으로 전적으로 오스만 군주에게 의존했다.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군주는 이론적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다.[31]

카눈나메 편찬편집

칭기스 칸몽골 제국야삭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온 이후, 왕조의 법이 정당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관념이 이슬람권에 확산되었다. 몽골 제국이 무너진 후 생겨난 많은 투르크몽골 국가들에서는 야사, 카눈, 다스투르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실정법들이 입법되었다. 이러한 카눈은 샤리아가 다루지 않거나 시대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부분에서 실제로 적용되는 법 조항들을 마련했다.[32]

메흐메드 2세 역시 이 전통에 따라 오스만 국가에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법적, 제도적 틀을 마련하기 위해 카눈나메를 집전했다. 이 법전에는 왕정의 조직과 의례, 제국의 의전 원칙, 왕실의 궁정예법 및 관료들의 경칭, 형벌과 조세등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33][34] 특히 메흐메드는 일반 백성이 부담하는 역을 엄격히 규정하였다. 이후 메흐메드의 카눈나메는 17세기까지 오스만 국가 법 체계의 기초이자 핵심이 되었다. 또한 메흐메드 2세가 카눈나메에서 보여준 일반 백성에 대한 태도는 오스만 제국에서 선정(한국 한자: 善政)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35]

관료제 정비편집

메헴메드는 위대한 천문학자 알리 쿠슈지(ʿalī al-ḳus̲h̲d̲j̲ī)의 조언에 따라서 오스만 제국 내부에 종교 교육(tadrīs, ḳaḍā)과 울레마의 위계(ṭarīḳ)를 구성하였다. 아불파스로써의 전례없는 그의 카리스마와 동, 서방에서 온 많은 재능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메헴메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이전에는 존재한 역사가 없는 완벽한 중앙 집권적 관료제 제국을 실현했다. 법학자 물라(Mollā) 호스루(K̲h̲osrew) 아래에서 받은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교육과 셰이흐 아크 샴스 알딘이 그에게 불어넣은 신의 지지와 계시에 대한 믿음은 이슬람 신앙과 로마 제국주의의 결합이라는 메헴메드의 놀라운 업적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재정정책편집

메흐메드는 끝없는 군사 원정과 군대의 강화를 위해 막대한 재정을 얻어야 했다. 그 결과 크게 3가지 정책이 실행되었다. 첫번째는 새로운 은화의 발행이다. 그는 은의 함유량을 계속해서 줄여나갔다. 1471년 이후로는 세차례나 행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신민들은 옛 은화를 액면가에 맞추어 세금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그 다음 정책은 뮐크와 와크프 등 민간에 주어진 징세권을 국가로 환수한 조치이다. 이를 통해 오스만 국가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마지막 정책은 징세도급제도의 확장이었다. 그 결과 1481년 경 오스만 재무성은 현금만 350만 두카트 가량 보유할 수 있었다.[29]

그러나 제국의 탄생에 있어서 더 중요한 점은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에서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던 지방의 종교적, 군사적 지주들에게 착취당하던 농민들이 조용히든 공개적으로든 보호를 보장하는 중앙 집권적 권력의 부활을 환영했던 것이다. 술탄의 포고령은 제국이 언제나 '가난한 이들(yoḳsullar)'과 함께 '권력자들(ḳudretlüler)'에 맞선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료기구, 토지조사, 카눈나메는 단호하게 소규모 농장을 가진 농민 가정들(k̲h̲āne bā čift)의 착취문제를 강하게 염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메헴메드의 '폐지(nask̲h̲)'는 단순한 군사 개혁이라기 보다는, 와크프와 자유 보유 토지가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책임 추궁에 가까웠다. 또한 이것은 국가의 토지 소유 확장과 봉건 귀족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농민 생산자, 노동자에 대한 보호, 장악력 확대를 의미한다.

전제 군주 원칙는 술탄을 권위와 합법성이 나오는 단 하나의, 유일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국가와 사회의 근원이라 주장하였으며, 이는 메헴메드 2세의 아래에서 철저히 주장되었다. 도시 경제와 장인, 상인들의 상황 역시 술탄의 제어 하에 있었는데, 이는 술탄이 바자르, 베데스탄(bedestān; bazzāzistān), 카판(ḳapan; ḳabbān), 휴게소(ḳanṭār) 등을 설립하면서 물품을 구입하고, 시장을 제한하면서 주기적으로 새로운 은화, 악체(aḳča)를 발행하는 한편 세금을 내는데 과거의 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경제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농사용 토지를 전부 국유지로 바꾸고 노동을 철저히 국가의 통제 아래로 조직함으로써, 메헴메드의 전제정은 경제를 철저히 장악하였고, 메헴메드는 가자의 궁국적인 의무와 이슬람의 확장, 피지배자들의 안녕, 내세와 구원을 위하여 군주로써, 이맘으로써 국가의 필요에 따라 사회와 경제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옹호하였다. 술탄의 칙령에서 계속해서 강조되듯이, "알라는 레아야를 지배자에게 맡겼다(wadīʿa)."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의 표현을 빌자면, 이러한 제도와 이데올로기적 주장은 오스만 '봉건' 국가가 인민을 직접적으로 착취하기 위함이었다.

비무슬림 집단에 대한 정책편집

메헴메드의 비무슬림 집단에 대한 정책은 과거 이슬람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무함마드의 시대부터, 무슬림 국가들은 비무슬림 집단이 지즈야를 내는 대가로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메헴메드 역시 한 지역을 정복하면 매번 항상 외국인이나 비무슬림 집단의 자치권과 상업적 특권을 재확인해주었다. 이들 집단에서 거두어 지는 지즈야는 오스만 제국의 세입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이와 같은 관용적 정책 덕분에 18세기와 19세기, 유럽 국가들이 카피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비무슬림 신민들은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받쳤다.[33][36][37]

메흐메드는 제국 내의 다양한 비무슬림 집단을 통합하기 위해 밀레트 제도(튀르키예어: millet sistemi)를 도입하였다. 아랍어 밀라(아랍어: milla)에서 기원한 밀레트는 오스만 제국에서 종교와 민족별로 구성된 일종의 종교자치체를 이르는 말로 사용되었다. 밀레트 제도 아래에서 오스만 제국의 비무슬림 신민들은 인두세를 내는 대가로 자신의 신앙과 관습을 지키며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3일 후에 반포된 칙령으로, 그 내용은 갈라타에 살고 있는 제노아인들의 종교적 자유와 자치를 보장하는 것이었다.[38]

각 밀레트는 무슬림과 관련된 재판 외에는 중앙 정부의 간섭 없이 결혼, 이혼, 출생, 사망, 교육, 언어, 전통 등에서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자치권을 향유했다. 또한 모든 밀레트 구성원은 개인의 능력과 동기에 따라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였으며, 개종하여 다른 밀레트로 옮겨 갈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메흐메드의 관용적인 정책은 제국의 이질적이고 다양한 민족적 요소를 통합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39]

특히, 오스만 군주들은 언제나 스스로를 동방정교회의 수호자로 비치기 위해 노력해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전에도 오스만 제국령 내부에 존재하던 정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은 오스만 군주에게 충성을 받쳤고, 심지어 다른 오스만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티마르를 분봉받았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도 이들 정교회 성직자들이 오스만과 협력하여 베네치아에 대항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였다.[40]

메흐메드 2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리스인을 2등 신민이 아니라 제국의 정당한 신민으로 대우했다. 실제로 메흐메드 2세의 치세에 오스만 행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그리스인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루카스 노타라스였다. 메흐메드는 다른 비잔틴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노타라스에게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융숭한 대접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타라스가 자신의 막내 아들을 데브시르메 교육기관에 보내기를 거부하고, 베네치아와 협력하여 이전의 지위를 회복하기를 꾀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메흐메드는 가차없이 그를 처형해버렸다. 그러나 데브시르메 계층에 포섭된 다른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승승장구 하였으며, 룸 메흐메드 파샤와 메시흐 파샤는 후일 대재상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하였다.[41]

콘스탄티노폴리스 개발편집

오스만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1453년 봄에, 이 도시는 이미 반쯤 파괴된 도시였다. 그 인구는 5만 명 이하 수준이었다. 1204년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도시는 차츰 쇠락하였다. 과거 부흥했던, 이란과 트레비존드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던 교역로는 부르사로 옮겨간 상태였다.[42]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와중에도 메흐메드는 도시가 파괴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이 도시가 제국의 수도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포위전이 시작된 시점에서도 이 점을 들며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항복을 권하였다. 원정의 와중에도 끝없이 신하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자신의 수도가 되리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도시의 함락 직후에도 병사들에게 전통에 따라 3일 동안의 약탈을 허용했지만, “도시의 돌 한톨 땅 한자락마저도 짐에게 속한 것이다. 병사들의 몫은 재화, 포로 그리고 식량에 한정된다”고 말하며 약탈을 제한하였다. 그나마 이 명령 역시 함락 당일 철회되어 약탈은 중단되었고, 도시의 건축물을 파괴한 병사들은 곧장 처벌받았다.[43]

그랬으니 만큼, 메흐메드는 도시 함락 직후 재건 작업에 착수한다. 우선 1454년 1월 6일,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이 일은 메흐메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난 기독교도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1459년부터는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직접 후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재상 마흐무드 파샤를 비롯한 다른 재상들 역시 이를 본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또, 기독교도들의 복귀를 장려하기 위해 정복을 전후하여 노예로 잡혀간 기독교도들을 해방시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왔다. 이로 인해 아드리아노폴리스, 필리포폴리스, 갈리폴리, 부르사 등 여러 도시에 정착하여 부를 쌓아온 그리스 장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또한 메흐메드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서 주민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계속 이주시켰다.[44]

메흐메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다양한 비무슬림 집단을 이주시키거나 정착을 권장하였지만, 메흐메드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집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적 삶이 보장되어야 하는 무슬림의 도시이며,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메흐메드 2세는 온갖 비무슬림 집단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착을 허락하는 가운데서도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도록 정책적인 배려를 하였다. 15세기 말의 인구 통계에서 이점은 분명히 관촬되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무슬림 인구는 비무슬림 인구의 2배 가량 되는 숫자였다.[45]

시인편집

메흐메드는 아브니(아랍어·페르시아어·오스만 튀르크어: عوني Avnî[*])라는 필명으로 여러 시를 남겼다. 그의 언어는 간단명료했고, 구어에 가까웠다.

군주평편집

메흐메트 2세 자신은 페르시아어로 시를 짓고, 아라비아어로 풀이할 정도로 경건하고 교양있는 무슬림이었으나, 동시에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만을 고집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를 모았고, 자신의 초상화를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젠틸레 벨리니에게 그리게 하는 등 고전적인 이슬람 국가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제국의 군주로써 군림했다.

각주편집

  1. Bearman, P.; Bianquis, Th.; Bosworth, C.E.; van Donzel, E.; Heinrichs, W.P. (1991). 〈Meḥemmed〉.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6》. Brill. 973쪽. 
  2. Heywood, Colin (2008). “Mehmed II and the Historians”. 《Turcica, 40》: 311. 
  3. İnalcık, Halil (2003). “Mehmed Ⅱ”. 《TDV İslâm Ansiklopedisi》. Türkiye Diyanet Vakfı. 2019년 2월 9일에 확인함. 
  4. İnalcik, Halil (1991). 〈Meḥemmed Ⅱ〉.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6》. Brill. 978쪽. 
  5. İnalcik, Halil (1991). 〈Meḥemmed Ⅱ〉.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6》. Brill. 979~980쪽. 
  6. Heywood, Colin (2009). 〈Mehmed Ⅱ〉.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364쪽. 
  7. Heywood, Colin (2009). 〈Mehmed Ⅱ〉.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364~365쪽. 
  8. Heywood, Colin (2009). 〈Mehmed Ⅱ〉.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365쪽. 
  9. Heywood, Colin (2009). 〈Mehmed Ⅱ〉.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365~366쪽. 
  10. Imber, Colin (2009). 《The Ottoman Empire, 1300-1650: The Structure of Power, Second Edition》. Palgrave Macmillan. 26쪽. 
  11. İnalcik, Halil (1991). 〈Meḥemmed Ⅱ〉. 《Encyclopaedia of Islam, Second Edition, vol. 06》. Brill. 978~979쪽. 
  12. Heywood, Colin (2009). 〈Mehmed Ⅱ〉.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Facts On File, Inc. 367쪽. 
  13. Imber, Colin (2009). 《The Ottoman Empire, 1300-1650: The Structure of Power, Second Edition》. Palgrave Macmillan. 26~27쪽. 
  14. Imber, Colin (2009). 《The Ottoman Empire, 1300-1650: The Structure of Power, Second Edition》. Palgrave Macmillan. 27쪽. 
  15.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76쪽. 
  16.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77쪽. 
  17.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77~178쪽. 
  18.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78~179쪽. 
  19. Finkel, Caroline (2006). 《Osman's Dream: The Story of the Ottoman Empire 1300-1923》. John Murray. 62~63쪽. 
  20.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79쪽. 
  21.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79~180쪽. 
  22.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80쪽. 
  23.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80~181쪽. 
  24.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81~182쪽. 
  25.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82~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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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Imber, Colin (1990). 《The Ottoman Empire, 1300-1481》. The Isis Press. 188~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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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İnalcık, Halil (1969). “The policy of Mehmed II toward the Greek population of Istanbul and the Byzantine buildings of the city”. 《Dumbarton Oaks Papers 23》: 236~237. 
  41. İnalcık, Halil (1969). “The policy of Mehmed II toward the Greek population of Istanbul and the Byzantine buildings of the city”. 《Dumbarton Oaks Papers 23》: 239~240. 
  42. İnalcık, Halil (1969). “The policy of Mehmed II toward the Greek population of Istanbul and the Byzantine buildings of the city”. 《Dumbarton Oaks Papers 23》: 231. 
  43. İnalcık, Halil (1969). “The policy of Mehmed II toward the Greek population of Istanbul and the Byzantine buildings of the city”. 《Dumbarton Oaks Papers 23》: 231~234. 
  44. İnalcık, Halil (1969). “The policy of Mehmed II toward the Greek population of Istanbul and the Byzantine buildings of the city”. 《Dumbarton Oaks Papers 23》: 236. 
  45. 이은정 (2015). “17세기 이스탄불에서 기독교인 이주의 영향: 인구 구성과 종교집단 간 관계에 대한 함의”. 《歷史學報 第226輯》: 473~475.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