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Nuel92/작업문서2

구유크
구유크 칸
재위 1246년 8월 24일 ~ 1248년 4월
대관식 1246년 8월 24일
후임 뭉케 칸
이름
별호 사인 칸
묘호 정종(定宗)
신상정보
출생일 1206년
사망일 1248년 4월
사망지 쿰 셍기르
왕조 몽골 제국
부친 우구데이 칸
모친 투르게네 카툰
배우자 오굴 카이미쉬
자녀 코자, 나쿠, 코쿠

귀위크 칸 또는 구유크 칸(貴由,1206년 ~ 1248년)은 몽골 제국의 3대 대칸으로 1246년부터 124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우구데이 칸의 장남이었다. 묘호정종(定宗)이다. 겁이 많고 힘이 약하였으나,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 정치면에서는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사인 칸(현명한 칸)이라고 불렸다.


초기의 생애 편집

구유크는 우구데이와 그의 6 번째 부인[1] 투르게네 카툰(황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구데이의 맏아들이었고, 메르키트 부 출신의 오굴 카이미쉬와 결혼했다. 우구데이는 카안으로서 즉위한 뒤에 본래 자신의 영지였던 에밀과 코바크 지방을 구육에게 줬다.(1229년)[2] 1232년 톨루이가 죽자 우구데이는 톨루이의 아내 소르칵타니에게 구유크와 결혼할 것을 명령했지만, 소르칵타니는 톨루이의 아들들을 교육하는데 집중하고 싶다며 이를 완강히 거절했다. 1233년 9월, 우구데이는 구육과 알치다이에게 포선만노랴오둥 반도에 세운 대진국을 섬멸케했다.

우구데이는 1234년부터 시작된 몽골 제국의 루스 원정에 자신의 장자 구유크를 보냈다. 주치의 장자 바투는 주치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에서 차출된 좌익군의 지휘관이자 원정의 총사령관이었고, 구유크는 우구데이 가문과 톨루이 가문에서 차출된 우익군의 지휘관이었다. 구유크가 원정군에 합류한 것은 1236년 가을이였다. 그는 1237년 겨울 리아잔 공략전에 참여했고, 1239년 말에서 1240년 초에는 뭉케와 함께 아스인들의 거점인 메게스를 점령했다. 1240년 겨울에는 키예프 공성전에도 참여했으며, 1241년 여름 셔요 강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 원정의 와중에 구유크와 바투의 사이는 점차 벌어졌다. 구유크는 바투와 그 형제들의 실책을 범한 것을 보고 그들의 전투수행 능력, 특히 바투의 능력에 불신을 품었다.[3] 이를 알게 된 우구데이는 구유크와 뭉케에게 우익군의 지위를 카단과 부첵에게 맡기고 회군할 것을 명령했다. 바투는 이들을 위해 티서 강다뉴브 강가에서 이별의 잔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구유크는 바투를 비롯한 우익군의 제왕들의 소극적 태도를 비난했다.[4] 구유크가 원정군을 떠난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계승 편집

구유크가 회군하고 있을때 우구데이가 카라코룸에서 죽었다.(1241년) 당시에는 몽골 제국의 여러 왕들이 모두 부재 중 이었는데, 이 틈을 타서 예수게이 바아투르의 막내 아들 테무게 옷치긴이 군사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오르도로 접근했다. 그가 목적한 바는 선제의 유해와 그의 부인들을 방패삼아 정국을 운영하는 것이었다.[5] 그러나 마침 그 때 구육이 몽골리아의 서쪽에 해당하는 이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옷치긴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우구데이의 오르도를 장악한 것은 투르게네였다. 그녀는 구유크를 다음 대의 칸으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본래 우구데이는 구유크를 후계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6]과 이전의 원정에서 그와 갈등을 빚었던 바투의 방해로 구유크의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구데이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본래 지배자의 명령은 그가 죽으면 모든 효력을 잃는다는 몽골의 관습[7],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섭정이었다는 점,[8][9][10] 우구데이 일문의 사람 중 가장 먼저 몽골리아에 도착했다는 점,[8] 우구데이 일문에서 그가 가장 유능하다는 평을 들었다는 점[11] 등이 있다. 하지만 투르게네의 다수파 공작은 성공을 거두어 1244년 봄 달란다바스[12]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의 제왕들은 구유크의 즉위를 합의했다.[11] 바투는 이에 마지못해 동의했으나 그 자신은 아프다는 핑계로 참가하지 않고 형인 오르다를 비롯한 형제들을 대신 보냈다.

쿠릴타이에서 자신의 계승이 결정된 이후에도 구유크는 관습에 따라 여러 차례 제위를 거절한 뒤에 이를 받아들였다.[11] 라시드 알딘에 의하면 그는 이때 칸의 자리가 자신의 후손들에게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조건을 내걸었고, 왕공들은 이를 지키겠다고 맹세를 했다.[13][14]

구유크는 1246년 8월 24일에 칸위에 올랐다. 이 행사에는 조지아 왕국의 왕위 계승자 다비드 나린과 다비드 라샤, 블라디미르의 대공 야로슬라브 2세,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 헤툼 1세와 그의 동생이자 원수(元帥)인 셈파드, 후일 룸 술탄국의 술탄이 된 킬리츠 아르슬란 4세, 케르만의 아타벡들의 사절, 바그다드 칼리프의 사절,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절 플라노 카르피니 등의 외국인들도 참가했다.[15]

재위 기간 편집

 
구육이 자말 알딘 마흐무드 후잔디를 심문하고 있다. 주베이니, 『세계정복자의 역사』의 삽화.

구육은 그의 어머니가 섭정으로서 반포한 몇 가지의 악평을 듣던 칙령들을 취소했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아직 공고해지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반역이라는 명목으로 전 정권의 고위 인사들을 처형했기 때문이다.

1246년, 의 술탄 기야스 알딘 카이쿠스로 2세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재상 샴스 알딘 에스파하니는 그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왕자 이즈 알딘 카이카우스 2세를 술탄으로 세웠다. 그러자 루큰 알딘 킬리치 아르슬란이 몽골 고원을 방문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구육에게 호소했다. 1248년, 구육은 킬리치 아르슬란을 술탄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야를릭을 주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주치 울루스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는데도 굳이 구육이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바투를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 같다.[16] 구육은 킬리치 아르슬란에게 다루가치와 2,000명의 몽골 병사들을 딸려보냈다.

서부의 크리스천과 실리시안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몽골과 위대한 동맹을 맺기를 바랐다. 실리시안 아르메니아인들은 1247년과 1254년 그들의 왕인 헤토움이 몽골의 수도를 방문함으로써 몽골에 대하여 종속의 예를 갖추었다.

 
1246년에 구육이 교황 이노센트 4세에게 보낸 편지.

제7차 십자군을 구성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46년 카라코룸에 있는 몽골의 대칸에게 프란시스코파 선교사 지오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를 보내 무슬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고자 하였으나, 그는 귀위크 칸에게 교황과 유럽의 왕들이 모두 귀위크 칸에게 복종해야만 동맹이 성립할 것이라는 실망스러운 대답을 받았다.

차가타이는 우구데이보다 7개월 먼저 죽었다. 그는 후계자로 바미얀에서 죽은 맏아들 무에투겐의 아들 카라 훌레구를 지명하였다. 그러나 구육은 아들이 있는데 손자가 계승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이수 뭉케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구육은 동유럽에 대한 새로운 원정을 계획했다. 중국 원정에 대해서는 수베데이와 차간을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는 서아시아에 대한 원정도 계획하고 있었다. 초르마군과 아버지의 심복인 엘지기데이를 이란으로 보냈는데, 이때 엘지기데이의 임지는 룸, 조지아, 알레포, 모술, 실리시아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권한은 바투가 트란스캅카스에 파견한 장군들의 것을 능가했다. 구육은 이를 통해 이란 북서부에 대한 바투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본래 몽골제국의 원정에서 책임자는 대체로 제왕이었으나, 그는 이렇듯 원정의 책임자로 장군들을 임명해 정복 전쟁의 수행에서 몽골제왕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그가 킵차크 원정에서 바투를 비롯한 제왕들의 실책을 직접 목격한 결과인 동시에, 정복전이 끝난 뒤 정복지역에 대한 제왕들의 영향력 발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7]

귀위크의 즉위 이후 귀위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갑작스레 귀위크가 병으로 사망하자 무산됐다. 귀위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톨루이 계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1251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계의 몽케를 칸위에 올렸다.

 
연회에서의 구육. 주베이니, 『세계정복자의 역사』의 삽화.

이에 귀위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시와 우구데이계의 왕자 시레문은 몽케를 제거하고 다시 우구데이계 대칸을 세우려는 음모를 세웠지만 발각당해 몽케에 의해 숙청당하고 말았다.

같이 보기 편집

참고 서적 편집

  • ʿAlāʾ-al-Din ʿAṭā Malek Jovayni, tr. John A. Boyle, The History of the World-Conqueror, 2 vols., Manchester, 1958.
  • The Encyclopædia Iranica, arts. Güyük Khan. Saljuqs iii. Saljuqs of Rum(2011년 5월 25일 확인함)
  • 『두산백과』의 항목들: “구유크 칸”, “귀위크 칸, 포선만노”.(2011년 5월 25일 확인함)
  • 르네 그루쎄 씀,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쿠빌라이 칸과 원·고려 지배세력 관계의 성립」, 『팍스몽골리카와 고려』,혜안, 2009, 41 ~ 91쪽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항목: 구유크(2011년 5월 25일 확인함)
  •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신서원, 1999.
  • 윤은숙, 『몽골제국의 만주 지배사』, 소나무, 2010.
  •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근세 동아시아의 국가와 사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편, 지식산업사, 87-132쪽.

각주 편집

  1.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85쪽.
  2. ʿAlāʾ-al-Din ʿAṭā Malek Jovayni, tr. John A. Boyle, The History of the World-Conqueror, vol.1, p.43.
  3.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5쪽.
  4.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6쪽.
  5.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86쪽.
  6.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83, 85쪽.
  7.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84쪽.
  8.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임대희·김장구·양영우 옮김, 『몽골 세계제국』, 85쪽.
  9. 〈구유크〉.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1246년 구유크가 칸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그의 어머니의 책략 덕분이었다. 
  10. 〈귀위크 칸〉. 《doopedia 두산백과》. 1241년 태종이 죽자 바투와 중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당시 섭정으로 있던 모후(母后)의 끈질긴 천거와 책모로, 1246년 황제가 되었다. 
  11. Jovayni, Boyle J. A.(tr.), The 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 vol.1, p.251-252.
  12.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08쪽.
  13.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13쪽.
  14. Peter Jackson, “Güyük Khan,” Encyclopædia Iranica.
  15. 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390쪽.
  16. Andrew Peacock, “Saljuqs iii. Saljuqs of Rum,” Encyclopædia Iranica.
  17. 김호동, 「구육(정종)과 그의 시대」, 124쪽.
전임
아버지 우구데이 칸
제3대 몽골 제국 대칸
1246년 ~ 1248년
후임
사촌동생 몽케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