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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社稷壇)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社)와 오곡(五穀)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개요편집

고대 중국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 〈고공기〉(考工記)에 실려 있는 좌조우사(左祖右社)에 따라 중국의 여러 왕조는 도성(都城)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었다. 사직단 위에는 오색토(五色土)라 불리는 각 방위 주변에서 헌상한 오색의 흙이 뿌려졌는데, 오방사상에 따라 가운데는 황색, 동쪽은 청색, 남쪽은 적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으로 꾸며졌다. 이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 따라 오색은 만물 즉 천하의 모든 토지를 가리키며,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莫非王土)」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사직단편집

원(元)대에는 대도(大都)의 태묘를 당시의 제화문(齊化門) 안에 세웠고, 사직단은 평칙문(平則門) 안에 세웠는데,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사직단은 명(明)・청(清)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지금의 베이징(北京) 시내의 자금성(紫禁城) 남쪽, 천안문(天安門) 서쪽의 중산공원(中山公園)에 위치한다. 당(唐) 때부터 존재했다는 사찰을 이용한 것으로 영락제(永樂帝)가 영락 18년(1420년)에 건립하였다. 홍무제(洪武帝)가 처음 남경에서 처음 명조를 수립하고 사직을 세웠을 때만 해도 전대 왕조와는 달리 사와 직을 굳이 나누려 하지 않았지만, 홍무 10년(1377년)에 사와 직의 예관의 의식을 합쳐버렸다. 영락제도 그러한 홍무 10년의 제식을 따라 북경의 사직단 역시 사와 직을 하나의 장소에 모시는 단으로 세웠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산공원이라는 이름은 1928년에 고친 것으로 그 유래는 1914년에 이른바 신해혁명이라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로 국부(國父)라 칭송받는 쑨원(孫文)의 운구를 공원 안에 안치했을 때 쑨원의 호인 중산(中山)을 붙인 것이다. 중산당(中山堂) 자체가 원래 배전(拝殿)으로서 명대에 세워진 것인데, 황제가 비바람을 피해 신에 대한 제사를 행하던 장소였던 것을 쑨원의 관이 안치된 뒤로는 1928년에 중산당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중국 황제는 이곳에서 천명(天命)을 받았기에, 중산공원에는 오늘날에도 천지(天地)를 이어주는 상징으로 여겨졌던 수령(樹齢) 천년이 넘는다고 알려진 잣나무 거목이 많이 서있다.

(한국)사직단!편집

한국에서 처음 사직이 세워진 것은 이미 삼국시대의 일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고국양왕 8년(391년)에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근개루왕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백제의 수도가 함락되기 직전에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면서 "나는 마땅히 사직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신라는 선덕왕 4년(783년)에 사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전에 중국식의 종묘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더 이른 시기에 사직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고려는 성종 10년(991년)에 처음 수도 개경의 서쪽에 사직을 세웠는데, 그보다 앞서 성종 2년(983년)에 박사 임노성이 송에서 태묘당과 사직당의 그림과 기(記)를 가져와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현종 5년(1014년)에 강감찬이 거란의 2차 침공 이후 파괴되었던 사직의 중수를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사직은 너비 5장, 높이는 3자 6치 가량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었는데, 당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고려시대 사직은 제후국의 제도가 아닌 황제국의 제도를 따르고 있는데 이는 고려가 대내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문종 6년(1052년) 개경의 황성 안 서쪽에 사직단을 새로 짓고, 그 달에 황제가 몸소 가서 제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고려의 사직 제일(祭日)은 매년 2월과 8월의 상무일(上戊日)과 납일(臘日, 동지 뒤 세번째 술일(戌日))로 정해져 있었다. 개경의 사직단은 당시 나성의 서문인 선의문(오정문) 안쪽, 옛 불은사터 앞에 그 터가 남아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사직단 외에 만월대 부근에도 더 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은 기록이나 유구로서 확인된 것이 없다.

 
서울 사직단
(사적 제121호)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이듬해인 1393년에 한양 천도와 관련된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고, 1394년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으로 사직의 터를 정하여 1395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너비가 5장이었던 고려의 사직과는 달리 대외적으로 명의 제후국임을 자처한 조선은 제후의 제도를 따라 사직의 너비를 2장 5자로 줄였지만, 기본 형식이나 제례 방식에서 큰 틀은 고려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였다.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이 되면 대향사(大享祀), 정월에는 기곡제(祈穀祭), 가뭄에는 기우제(祈雨祭)를 각각 행했고, 세종 8년(1426년)에는 사직단 바깥의 북쪽에 사직서(社稷署)를 세워 사직단을 관리했다.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 황제는 사직제를 폐지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1911년에는 사직단 부지가 아예 총독부로 넘어가서, 일제는 1922년에 사직단 주위에 도로를 내고 1924년에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인왕산 자락을 따라 이어져 사직단 주위에 형성되어 있던 대부분의 숲이 멸실되었다. 1960년대에는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그 부지의 축소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1970년대에는 도서관 · 수영장 · 동사무소 · 파출소 등이 건립되었다.

관련 문화재편집

같이 읽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