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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의 역사

서울대학교 정문

해방 이후 1946년에 대한민국에서 설립된 서울대학교는, 1975년 종합화 계획을 거쳐, 현재 서울 관악구종로구에 자리잡고 있다.

설립편집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청 문화교육부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대학교에 따르면, 조선교육심의회에서 현대적 국립대학을 건립할 때 친잂심를으로 여러 관ㆍ공립 및 사립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자는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1]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공·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초대 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Harry B. Ansted) 미국 해군 대위가 취임하였다.[2] 그러나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은 반대 운동을 강렬히 전개했으며, 이를 국대안 파동이라 부른다.

서울대의 공식적인 설립 연도는 1946년이지만, 개교 원년을 앞당겨야 한다는 논쟁이 있었다.[3] 법대의 전신인 법관양성소(1895년)[4] 를 비롯, 한성사범학교(1895년·사범대), 의학교(1899년·의과대), 상공학교(1899년·상과대, 공과대), 농상공학교(1904년·상과대, 공과대, 농생대)를 비롯한 근대교육기관이 구한말 시작했기 때문에 1895년이 개교 원년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서울대의 학내 최종 의결기구인 평의원회는 개교(開校) 연도는 현재와 같은 1946년으로 그대로 두되, 1895년을 개학(開學) 연도로 설정키로 하였다.[5] 한편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에서는 광혜원(1885년)을 자신들의 효시라고 주장하여 연세대학교와 대립[6][7] 하기도 하였으나, 개학 연도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 전쟁과 1950년대편집

한국 전쟁의 발발로 1951년부터는 부산으로 옮겨가 전시 연합대학의 형태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듬해 5월에 전시 연합대학은 해체되었다. 1951년 5월 동숭동 캠퍼스는 미8군사령부가 쓰기 시작했으며, 1953년 9월 15일 이를 대학 본부에 돌려주고 용산으로 옮겨갔다. 1953년 8월 7일부터 10월 17일까지 서울로 이전 작업이 진행되었다.[8]

한국 전쟁의 영향으로 458개의 건물 중에 276개의 건물이 파손되었으며, 재건을 위해 미네소타 대학교의 원조를 받았다.[8] 1954년부터 62년까지 미네소타 대학교로부터 받은 원조액은 천만 달러에 이른다.[8]

1950년대 후반에는 정부와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고 교수들에 의해 처음으로 총장이 선출되었다. 그렇게 선출된 총장은 제6대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이었다.

서울대 총장 직접 선거편집

1956년 윤일선은 서울대학교 총장에 천거되었다. 1956년 문교부 장관이 된 최규남 박사는 6월 19일 자신의 후임 서울대 총장으로 당시 부총장이던 윤일선을 지명하였으며, 이에 따른 투표에 따라 총장에 임명되었다.[9][10] 같은 해 문교부 장관이 된 최규남 박사는 동년 6월 19일 자신의 후임 서울대 총장으로, 당시 부총장이던 윤일선을 지명했는데[11], 당시 국립대 총장은 교육공무원임명령 제7조에 의거, 문교부 장관이 지명하면, 당해 대학 교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되어 있었으며, 조교수 이상 재적교수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교수 중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12] 따라서 총장 지명자 윤일선에 대한 동의 투표를 실시하기 위해 6월 28일 하오 2시 서울대학교 조교수 이상 재적교수 2백70명 중 외유(外留) 교수 61명과 불참자 9명을 제외한 2백 명의 교수가 출석(95%), 본부 강단에서 교수회를 개최, 윤일선에 대한 동의 투표를 실시했다.[9] 그 결과 가 1백81표, 부 13표, 무효 6표로서 윤일선은 90%의 동의를 얻었다.[9][10]

그러나 그의 서울대학교 총장 취임을 이승만 대통령이 못마땅하게 여겼다. 서울대학교 총장을 임명제로 임명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최규남 문교부장관에게 윤일선의 취임을 비토할 수 없겠느냐고 묻기까지도 했다.[13]

4.19 혁명 전후편집

 
4.19 혁명

4.19 혁명 전후 서울대학교에서도 다수의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 집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학 총장이던 윤일선 등의 노력으로 서울대 희생자들의 수는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가 있던 날 저녁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최규남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에게 연락하여 "서울대학생들도 데모에 나올 주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4월 19일 아침 8시에 윤일선은 각 단과대학 학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데모를 벌일 기세를 보여 학장들이 황급히 달려나가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학생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찰청과 법원에 전화를 걸어 학생들의 데모 참여를 만류할테니 최대한 관대한 처리를 요청하였다.

 
1960년 4월 27일 시민의 진정을 호소하는 학생 시위대

4월 19일윤일선신태환 서울법대 학장 등 7,8명의 학장들과 함께 여의도 국회의사장까지 간 서울대 데모대를 찾아가 학교로 되돌아가라고 설득했다.[13] 윤일선의 주장에 의하면 학생들은 공부가 학생들의 본분이며,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13]"이었다. 이어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동대문경찰서장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대생들은 건대, 중앙대 등의 데모대 대열과 함께 중앙청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13] 시위가 격화되면서 그는 학생들 옆을 따라갔다. 동아일보사 사옥 앞에서 서울대생도 아닌 불량차림의 청년이 데모대열에 끼어들어 선동하는 것을 본 윤일선은 "너 학생이냐"라고 물었다.[13] 윤일선과 교수들은 시위대와 동행하며 지켜보았으며, 학생들 사이에 끼어들려는 낮선 자들의 유입을 직접 막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대학 앞에서의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윤일선은 사태를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13] 이어 학생들의 학교 복귀를 촉구하는 한편 경찰에 찾아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호소하여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데모대에 가담했던 학생들도 자연 해산했고 그도 학교로 되돌아왔다.

학생 운동과 1960년대편집

1960년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으로 서울대학교 학생 7명이 사망했으며, 그 해 11월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다. 4·19 혁명이 끝나고 대학에는 학생회 조직과 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잠시 조성되었으나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탄압이 다시 이어졌다.[14] 1960년대는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지는 시기였다.[15] 한편 1961년에는 정부의 ‘국립대학 정비절차’에 따라 많은 사범대 학과가 폐지되고 문리대로 합쳐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범대 교수와 학생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듬해 정부는 없어진 학과들을 다시 부활시켰다.[16]

특수 전문 대학원인 사법대학원(1962년), 교육대학원(1963년), 신문대학원(1967년)이 이 시기에 세워졌다.[17]

종합화 계획과 1970년대편집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연건동(의과대학, 간호대학, 치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현) 노원구 공릉동(공과대학, 교양학부), 성북구 종암동(상과대학), 경기도 수원시(농과대학) 등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이에 서울대는 종합화 계획을 세우고, 1975년에 농과대학(현재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과 의과대학 본과만을 제외하고 단과대학들을 모두 새로 세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새로 지은 관악캠퍼스의 상징인 교문은 1978년에 설치가 완료되었다.[18]

문리과대학이 있던 동숭동 부지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기아산업이 사들였으며, 이후에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었다.[8] 공과대학이 있던 공릉동 부지는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편집

 
제24대 서울대 총장 이장무

10월 유신 이후 계속 억눌려 있던 대학에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1991년에 총장 선출 방식도 직선제로 변경되었다.[14] 첫 직선제 총장인 김종운을 시작으로 이수성, 선우중호, 이기준, 정운찬, 이장무, 오연천등이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014년에 성낙인이 제26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현재 재임 중이다.

1985년 관악 캠퍼스에 대강당(문화관), 1986년 실내 체육관, 1992년 박물관이 완공되었다. 수원에 남아 있던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이 2003년에 관악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현재는 관악과 연건 캠퍼스만 남게 되었다.[19] 1987년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1987~2001)이 수립되었다. 2011년 12월 28일 시행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법인 등기를 마치고 독립 법인으로 전환하였다.

각주편집

  1. 서울대학교 연혁.
  2. 서울대학교 창설 관련 기록
  3. 정환보 (2010년 9월 10일). “1946년? 1895년? 서울대 ‘개교 원년’ 논쟁”. 경향신문. 
  4. 법관양성소(1895년)→법학교(1909년)→경성전수학교(1911년)→경성법학전문학교(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대학 법학과가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출범함.
  5. 정환보 (2010년 10월 8일). “서울대 ‘개교’는 1946년, ‘개학’은 1895년”. 경향신문. 
  6. 박관규, 강희경 (2008년 8월 8일). “서울대 '校史개정' 정통성 논란”. 한국일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7. 박상준 (2007년 1월 8일). “서울대·연대병원 '뿌리' 논쟁”. 한국일보.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8. 서울대 60년사
  9. 차배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사 1(1952-196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80페이지
  10. 대학신문 제154호(1956. 7.2) 1면 머리기사
  11. 차배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사 1(1952-196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79페이지
  12. 총장임명 동의투표는 1953년 4월 제정된 '교육공무원법'에 총·학장의 임명을 위해서는 교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규정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이 규정에는 조교수 이상의 교직원의 임용 승진에도 교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고 되어 있었음. 그리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경우는 전임강사 이하 무급조교를 임용할 때도 교수회의 동의를 구하곤 했는데, 대체로는 통과되었지만 간혹 부결되는 경우도 있었음.
  13. 경향신문, 1972년 05월 05일자, 4면 사회면
  14. 이은정 기자 (2006년 9월 28일). “개교60년 서울대 세계와 경쟁하라”. 경향신문. 
  15. 김도현 (2007년 4월 25일). “27년 만에 빛 본 1980년 ‘신동아’ 계엄검열 삭제 기사 ‘4·19에서 10·26까지 학생운동이 걸어온 발자취’”. 신동아. 2004년 10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0월 18일에 확인함. 
  16. “파란만장했던 학제 변천사”. 대학신문. 2006년 4월 8일. 
  17. 서울대학교 소개 - 역사
  18. 서울대학교 발자취 1970년대
  19. 서울대학교 발자취 200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