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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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왕이 주교를 임명하는 모습

서임권 투쟁 (敍任權鬪爭)은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교황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성직임명권인 서임권을 놓고 벌인 권력다툼을 말한다. 이 서임권 투쟁으로인해 독일에서는 약 50년 동안 황제와 귀족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귀족이 황제보다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황제의 행사하던 서임권을 교회가 제한하게 되므로인해 교황의 권력이 세속권력을 앞지르게 되었다.

기원편집

투쟁의 근본원인편집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책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세속의 권력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주교대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는 직위에 따라 토지를 갖고 있었고 교회 직무뿐만 아니라 세속 직무도 수행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임명은 세속 권력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의 임명에 대한 특별한 권리가 있었고 교황은 황제의 대관식을 치루어주고 차기 황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다른 세속 권력에 비해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이러한 성직자 임명권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컸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편집

서임권 투쟁의 발단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운동이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세속 권력이 가지던 서임권을 교회로 다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그레고리오 개혁론자들은 황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교회권력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1056년 하인리히 4세가 6살의 어린 나이로 독일 왕으로 선출되자 개혁론자들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1059년 로마에서 벌어진 교회 회의에서 개혁론자들은 교황의 선출에 세속권력이 관여하지 못하도록하고 추기경 임명에도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만들어 공표했다. 교황청은 교황임명권을 되찾게 되자 다른 성직 임명권도 교회의 권력으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경과편집

교회개혁과 갈등편집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는 좀 더 과격한 개혁안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해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평신도의 교회 고위직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고 교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세속의 군주로부터 되찾아 올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즉각 교황의 선언에 반대하며 새로운 교황을 뽑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편지를 그레고리오에게 보냈다.

이후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하인리히는 자신의 가신을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러자 1076년 사순절,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의 모든 권한을 금하며 황제의 신하들에게는 충성의 의무에서 면제시켰다. 교황청의 명령에 반대하고 황제 편에 섰던 주교들을 파문하거나 성무 정지를 시켰다.

카노사 굴욕편집

신성로마제국 내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히고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교황이 머물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의 동북쪽 카노사로 향했다.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참회자의 옷을 입고 교황을 만나기 위해 성문 밖에서 3일간 기다리며 선처를 구했다. 이 사건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다.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권력이 황제권력 보다 우위에 서게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수 있다.[1]

하인리히의 복수편집

교황은 파문을 거두었지만 독일 제후들의 반란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라인펠트의 루돌프을 새로운 독일 황제로 선출했다. 이후 독일은 3년 동안 내전 상태로 권력투쟁에 들어갔으며 1080년 하인리히는 루돌프를 제거하고 권력을 다시 잡았다. 1084년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귀베르트를 새교황으로 옹립했다. 하인리히 4세는 같은해 3월 31일 새교황 클레멘스 3세를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을 로마에서 거행하였다.

로마약탈(1084년)편집

로마가 탈환되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성으로 도피한후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자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084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끈 군대가 로마로 진격해오자 하인리히 4세는 퇴각해버렸다. 로베르의 군대가 로마로 진입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는 세력과 시가전이 벌어졌으나 교황 구출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그 과정중에 노르만족 특유에 방화와 약탈이 자행되었다. 약탈로 인하여 도시 로마의 피해가 극심하게 발생하고 말았다.

교황의 망명편집

교황과 제휴한 노르만족의 만행에 로마시민들이 분노하였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교황은 로베르 군대와 함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교황은 다음해 망명지에서 객사하였다. 이후 서임권을 둘러싼 분쟁은 몇십 년간 계속 되었으며 이후 교황이 새로운 성직을 임명할 때마다 독일에서는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1106년 하인리히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 역시 서임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서임권 논쟁편집

잉글랜드 왕국에서도 서임권을 둘러싼 군주와 교황간의 분쟁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정복자 윌리엄은 자신의 정복 행위와 왕권에 대하여 교황의 인정을 받는 대신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따라 로마에 충성을 서약해야 했다. 이를 둘러싸고 캔터베리 대주교를 임명할 때 교황과 긴장관계가 있었다.

교황은 독일의 하인리히와 싸우기 위해서는 잉글랜드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았다. 1106년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때 그들의 영적 직무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주던 관행을 포기했고, 교회는 주교를 임명하기 전 반드시 군주에게 존경을 표시하도록 했다.

보름스 협약과 그 경과편집

서임권 투쟁은 약 5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1122년 보름스에서 영국에서와 비슷한 타협안이 타결되었다. 서임권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행사하지만 성직자 선출시 황제나 대리인이 입회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이로써 하인리히 5세와 교황 갈리스토 2세에 의해 기나긴 서임권 투쟁은 어느정도 일단락 되었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을 교회가 제한함으로 교회의 권력은 커졌고 황제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10세기초 귀족들이 투표를 통해 황제를 선출하게 됨으로 황제권이 약해졌는데 금번 보름스 협약으로 인해 황제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이로인해 독일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더욱 분권화 되었고 지방 권력은 더욱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결국 19세기까지 독일 지역에서는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한 교황권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교황은 십자군 제창 등 자신의 의도대로 정세를 움직일 수 있었다. 보름스 협약으로도 황제와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며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

각주편집

  1. 카노사의 굴욕사건은 교황권의 전성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7세가 1080년에 하인리히 4세를 두번째 파문하였으나 전혀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1084년에는 강제폐위당한후 로마시민들로 부터 버림받아 로마에서 사실상 추방당했다. 교황권과 황제권이 역전되는 전환기이자 교황권력이 전성기로 나아가기 위한 초반 과도기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보아야 합당하다.

출처편집

  • 두산백과
  • 종교학대사전
  • 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