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죽도(巽竹島)는 대한민국의 남해안에 위치한 이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이다. 원래는 흥양현에 속하였으나 1896년 지방제도 개편 때 돌산군 삼산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여수군에 편입되었다. 1949년 여천군에 편입되었고, 1965년 손죽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98년 여수시에 통합되었다.

개요 편집

소거문도, 평도, 광도와 함께 손죽열도를 이룬다. 여수 시내에서 약 74km 떨어져 있다. 2010년 현재 인구는 194명(91가구). 400여 년 전 제주에서 고씨, 부씨, 양씨가 최초로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하여 육지로 피신하였고, 이후 전주이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이 다시 입도하여 거주하였다. 최고점은 깃대봉(242m)으로 섬 중앙에 있으며, 서쪽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가 곳곳에 분포한다. 해안은 암석해안이 많으나 섬 북쪽에 형성된 만 일대에는 사질해안이 발달되어 있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며 비가 많다. 1월 평균기온 2.7℃ 내외, 8월 평균기온 23.6℃ 내외, 연강수량 1,362㎜ 정도이다. 취락은 선착장이 있는 북쪽 만 안에 주로 분포하며, 주민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농산물로는 고구마·마늘·옥수수·보리·양파·콩 등이 생산되며, 근해에서는 문어·삼치·방어·도미 등이 잡히고, 자연산 톳의 채취와 미역·김 등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북서쪽 돌출부 끝에는 무인등대가 있고, 길이 1㎞되는 손죽해수욕장이 있다. 여수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1일 1회 운항된다.[1]

지명의 유래 편집

1587년(선조 22) 음력 2월 26일, 왜구들이 전라도 남해안을 침범한 정해왜변(丁亥倭變)이 발생했다. 녹도와 손죽도에도 왜적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는데,[2]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당시 22세)이 이 섬에 쳐들어온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숨진 일이 있었다.[3] 조정에서는 신립변협을 방어사로, 김명원을 전라도 순찰사로 삼아 방어하게 했다.[4]

또한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南彦經)은 낙향하여 있던 정여립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정여립은 전주로 낙향후 그가 조직한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출병하였다.[5] 당시 왜구는 별로 수가 많지 않아 대동계원이 녹도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은 이미 퇴각한 뒤였다.[6] 그러나 손죽도(損竹島)에 정박하고 있던 왜구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 미처 떠나지 못한 왜구들을 전멸시켰다.[7]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큰 인물을 잃어 큰 손해를 봤다며 '손대도'(損大島)라고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8]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손죽도'(損竹島)로 바뀌었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정해왜변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주민들은 해마다 3월 3일에 제를 지낸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네이버 지식백과] 손죽도 [巽竹島]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99페이지
  3. [네이버 지식백과] 이대원 [李大源]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586년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다가 같은 해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중략)...이어 흥양(興陽)에 침입한 왜구와 손죽도(巽竹島)에서 싸우다 사로잡혔으며, 항복을 거부하였으므로 살해되었다.
  4. 신정일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다산초당 2007년 초판1쇄 p149
  5.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일 乙亥 5번째기사.....丁亥倭變, 列邑調兵, 全州府尹南彦經, 踈迂不知所爲。 請汝立分軍, 汝立當之不辭, 一號令間, 軍兵皆會, 部分調遣, 不日而辦。 其將領則汝立皆用大同禊中親密武士。 賊退散軍,
  6.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0페이지
  7.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1페이지
  8. <징비록-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유성룡 저, 김흥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