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정책

나라의 문을 닫고 외부와의 접촉을 막는 정책.

쇄국정책(鎖國政策)의 말 뜻은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을 말하며, 정치·외교·통상에서는 이윤의 확보나 자기 방위 및 국제적 고립 상태의 유지가 불가피할 때 외국인의 입국이나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을 일컫는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通商修交拒否政策)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사상쇄국주의(鎖國主義)라고 부른다.

경주박물관 척화비

조선 편집

조선 왕조1636년 병자호란 이래로 수세기 동안 대체로 사대교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왔다.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국정 전반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외교적인 면에서는 청나라를 제하고는 척양척왜를 주장하여 쇄국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특히 천주교의 유입을 단호히 배격하여 1866년 병인양요1871년 신미양요까지 두 차례에 걸친 양요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러한 양요와 열강의 문호 개방에 대한 요구가 맞물리자 전국에 척화비(1871년)를 세워 적극적인 쇄국정책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강한 자세로 구미 열강은 통상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일본에서는 정한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를 위요한 국제 정세는 문호 개방의 필요성과 열강으로부터의 국권 수호라는 상호 모순된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1875년(고종 12년)의 운요호 사건으로 폭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타의로 문호 개방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조선 정부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면서 쇄국의 빗장을 풀었으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으로 외국인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1882'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해금을 풀었다. 1886년에 비준된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전교의 특권을 누리기 시작하였다.[1]

중국 편집

중국의 경우에는 주로 연안지역의 왜구를 포함한 해적 방어와 해상에서의 밀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해금의 목적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1567년(융경 원년)까지, 거의 200년간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을 실시하였다. 이 해에 복건 순무 도택민이 하이진을 풀어 줄 것을 청하여, "배를 유인하는"(船引) 제도의 실시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명 조정은 단지 복건 장주월항 한 곳만을 교역항으로 개방했을 뿐이었다.

청나라 초기, 정성공정씨 왕국등 청에 저항하는 세력이 외국 상인과 제휴할 것을 염려하여, 한층 해외 교역을 제한하는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이 강화되었다. 17세기 종반이 되면 삼번의 난의 평정(강희20년 1681년), 정씨 왕국의 귀순(강희 22년 1683년) 등 국내의 안정화에 따라, 1684년 (강희 23년), 청나라 조정은 쇄국정책을 해제하고 정식으로 바다를 열어 해관(세관)의 설치 등의 조치를 행함에 더하여, 외국과의 무역을 윤허하였다.[2][3] 당초에는 마카오 등 4개의 항구가 외국과의 무역을 행하는 장소로 지정되었다. 일본 · 캄보디아를 시작으로 프랑스 · 네덜란드 등의 "무역"을 행하는 여러 나라는 종래의 조공국과는 달리, 중상(中商, 중국 상인)과 이상(夷商, 외국 상인)이 항구를 통하여 교역을 행하는 관계였다.[4]

일본 편집

 
쇄국 초기의 명나라 정크선(1644–48 일본 목판화)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쇄국(일본어: 鎖国 사코쿠[*])이라고 하면 1639년(간에이 16년)의 남만(포르투갈)선의 입항 금지에서부터 흑선 내항 이후 1854년 (가에이 7년)의 〈미일화친조약〉 체결까지의 기간을 ‘쇄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쇄국’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며, 최근에는 제도로서의 ‘쇄국’은 없었다고 하는 견해가 주류이다.[참고 1] 해외와의 교류, 무역을 제한하는 정책은 에도 시대의 일본 만 보였던 정책이 아니라 동시대의 청나라 등 동북아 국가에서도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채택하고 있었다.[각주 1]

어원 편집

‘쇄국’이라는 말은 에도 시대난학자인 시즈키 타다오(1760년 ~ 1806년)가 1801년 쓴 《쇄국론》(鎖国論, 필사본)에서 처음 사용했다. 1690년부터 1692년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독일인 의사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가 귀향 후 일본에 관한 체계적인 저작 작업을 하였고, 사후 〈일본지〉(The History of Japan, 日本誌, 1727년 간행)가 편집되어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그 네덜란드 제2판(1733년 간행) 중 권말 부록의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일본에서는 내국인 출국,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또 이 나라는 세계 각국과의 교통을 금지하는데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라는 논문[5]을 1800년경에 나가사키의 원래 네덜란드 연습통역사였던 시즈키 타다오가 번역했다. 그 때, 논문의 제목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번역된 본문 중 적절한 단어를 찾다가 《쇄국론》이라는 제목을 뽑은 것이다. 이 ‘쇄국’이라는 단어는 그 때 만들어진 신조어였지만, 책은 출판되지 않았고, 필사본으로 일부에 전해졌을 뿐 ‘쇄국’이라는 단어도 퍼지지 않았다.

실제로 ‘쇄국’이라는 단어가 막부 각료들 사이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853년이며,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858년 이후가 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메이지 시대 이후이다.[참고 2]

배경 편집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감합 무역을 통해 일본과 무역을 했다. 그러나 1549년을 마지막으로 감합 무역이 단절되면서 양국 간 무역은 밀무역만 유지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아시아로 진출, 식민지화를 추진하여 1511년에는 말라카를 점령하고, 1557년마카오에 거류 권을 얻어 중국 상품(특히 실크)을 안정적으로 입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마카오를 거점으로 일본, 중국, 포르투갈 삼국의 상품이 거래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으면서, 네덜란드, 영국에 친서를 보냈고, 네덜란드는 1609년, 영국은 1613년에 히라도에 길드 사무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양국 모두 중국에 거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일본에 수출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영국은 1623년에 일본을 철수하였고,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일본 진출은 상업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였다. 또한 당시 스페인의 관심은 필리핀멕시코 간의 무역이었으며, 1611년 세바스티안 비즈카이노가 사절로 슨푸번의 이에야스를 찾았지만 무역 협상 부진으로 끝이 났다.

기독교의 금지 편집

포르투갈 선박이 내항하게 되면서 ‘물건’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들어왔다.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내항 이후 이베리아반도(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의 열성적인 선교와 또한 전국 다이묘와 도쿠가와 막부 휘하의 다이묘에게도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에, 기독교인(당시 이름은 기리시단, 포르투갈말 크리스티아오를 옮긴 말임.)의 수는 규슈를 중심으로 넓게 확대되었다. 당시 권력자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방임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묵인하고 있었지만, 1587년에 바테렌 추방령을 내렸고, 1596년생 펠리페 호 사건이 발생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일본 26 성인 순교 사건)

이에야스는 당초 무역 이익을 중시하고 있었지만,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는 “기독교 포교를 수반하지 않는 거래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야스에게 적극적으로 선교사와 기독교를 보호할 이유를 없게 했다. 또한 1612년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다이묘와 막신들에게 기독교 금지령을 통지하고, 이듬해 1613년에 기독교 신앙의 금지가 명문화되었다. 또한 일본 내 기독교인의 증가와 단결은 도쿠가와 막부에 매우 위협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도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에야스의 대외 정책에 무역 제한의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 금교령이 쇄국과 직결되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해외 포교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던 기독교 세력은 기독교 중에서도 오로지 가톨릭 교회였으며, 그 동기로서 종교 개혁에서 비롯된 개신교 세력의 신장으로 유럽 본토에서 설자리를 잃고 있던 가톨릭이 해외에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배경이 있었다. 한편, 통상에 의한 실리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개신교 세력은 그런 종교적인 동기는 얕았다. 특히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전쟁(팔십년 전쟁) 중에 있었던 네덜란드는 그때까지 가톨릭을 신봉하는 스페인으로부터 전제적 지배와 종교적 박해를 받아왔다는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한 적대 의식이 유난히 강했던 것도 도쿠가와 막부에 협력적이었던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기는 했지만 중국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던 네덜란드영국이 즉시 포르투갈을 대체할 수 없는 이상 포르투갈과의 교역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단순히 일본 내에서의 금지뿐만 아니라 해외의 스페인, 포르투갈 근거지를 공격할 계획도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상관 차석이었던 프랑스와 카론은 1637년 9월, 나가사키 부교 사카키바라 모토나오와 일본-네덜란드가 동맹을 맺고 마카오, 마닐라, 지룽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그 후 곧 나가사키 대관이었던 스에쓰구 시게사다는 길드사무소장인 니콜라스 쿠케배커에게 다음 해에 필리핀을 공격하기 위해 네덜란드 함대에게 호위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듬해 시마바라의 난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시마바라의 난 편집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을 단행한 결정적인 사건은 1637년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이다. 이 난에 의해 기독교는 도쿠가와 막부를 흔들 원흉으로 간주되었고, 새로운 포교 활동이 향후 일절 행해질 수 없도록 이베리아반도 세력을 배제했다. 포르투갈1636년 이후 데지마에서만 교역이 허용되었지만, 1639년에는 포르투갈이 아예 추방되면서 데지마는 공터가 되어 있었다. 1641년 히라도섬의 네덜란드 상관 창고에 ‘서기’가 새겨져 있다는 사소한 이유로, 네덜란드는 창고를 파각하고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옮길 것을 강요당했다.(포르투갈은 데지마 사용료를 연간 은 80관을 주고 있었지만, 네덜란드는 55관만 지불하게 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에 포교를 일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마바라의 난에서 포르투갈 추방까지 2년 동안의 간격이 있었다. 이것은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대신하여 중국 제품(특히 비단와 약재)을 확보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일본 상인이 포르투갈 상인에게 상당한 돈을 빌려주고 있었으므로, 즉시 포르투갈인을 추방하면 회수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과정 편집

쇄국 체제는 제2대 쇼군 히데타다의 통치부터 시작하여 제3대 쇼군 이에미쓰의 통치에 완성되었다. 1612년 막부령으로 종교를 금하는 조치를 했다. 1616년에는 명나라 이외의 선박 입항을 나가사키히라도섬으로 제한했다. 1623년 영국은 실적 부진으로 히라도에 있던 길드사무소를 폐쇄했다.

쇄국 중의 무역 편집

쇄국은 무역의 권한을 도쿠가와 막부가 제한하고, 관리하는 정책이었다. 쇄국 하에 외국에 개방된 4개의 창구을 사구(四口)로 불렀다.

  • 나가사키 구 : 대 네덜란드와 대 청나라 중국 : 나가사키 회소(천황령)를 통해 나가사키는 막부의 직할지 로 막부의 관리 무역이 이루어졌다.
  • 쓰시마 구 : 조선과의 무역은 쓰시마 번을 경유했으며, 쓰시마 번의 소씨 일족은 중세부터 대조선 외교 무역의 중계를 맡아왔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쓰시마 번은 그 권한을 계속 인정받았으며, 부산 왜관의 교역을 통해 막부의 대조선 외교를 중계하는 역할을 맡았다.
  • 사쓰마 구(류큐 구) : 대 류큐 왕국과의 무역은 사쓰마번을 통해 이뤄졌으며, 사쓰마가 류큐 왕국을 공략 지배한 것으로, 류큐를 통한 무역이 인정받았다.
  • 에조 구 : 대 아이누들과의 무역은 마쓰마에번을 경유했다. 마쓰마에 번에 마쓰 씨에조에서 북방 무역을 담당해 왔다. 그 권한은 에도 시대에 들어서도 계속 인정을 받았고, 마쓰마에 번 수입의 대부분은 북방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각주 편집

  1. 천주교 서울 대교구 노동 사목 위원회 (2008년). 〈제1장 가톨릭노동청년회 중심의 노동참여(1970년까지)〉. 《서울 대교구 노동 사목 50년사》. 58-59쪽. 
  2. 권117〉. 《강희조실록(康熙朝實錄)》. 
  3. 이와이2009, 38쪽.
  4. 이와이2009, 43~47쪽.
  5. Engelbert Kaempfer, The History of Japan. 글래스고: MacLehose & Sons, 1906, 3 vols., vol.1. pp.259-260.

내용주 편집

  1. 청나라는 1684년 해금을 풀었지만, 그 후도 나가사키 무역과 유사한 관리 무역 제도를 유지했다.(광둥 시스템)

참고주 편집

  1. 아라노 야스노리 저『근세일본과 동아시아』, 도쿄대학출판회, 1988년, 등
  2. 아키히데 호시마 저 『「쇄국」이라는 담론, 캠퍼 지음, 시즈쿠 타다오 번역 『鎖国論』의 수용사』미네르바 서방, 2009년

참고 문헌 편집

(수록 논문)
  • 이와이 시게키(岩井茂樹). “제국과 무역 16-18세기 동아시아 교류(帝国と互市 16-18世紀東アジア通交)”. 

같이 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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